99년 1월에 결성된 프리마켓은 김두현(보컬, 기타), 이창현(기타), 최재웅(베이스), 홍석현(드럼) 4인조로 구성돼 있고 베이스 최재웅을 제외한 멤버들은 모두 프리마켓을 통해 처음 음악을 시작했다.
자신들의 음악을 '차력 코어'라고 말하기도 하는 프리마켓의 음악은 펑크, 뉴욕 코어, 멜로딕 펑크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퍼포먼스 형태의 공연으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프로젝트 밴드인 '코리티쉬'로 활동 중이다.
어느날이었다. 나에게 전화가 왔다.
"두현아 우리 미팅하러 노래방 가는데, 좀 와줘라. 우리 다 음치잖아.."
우리 학교는 머리와 복장이 자율화였다. 난 중2 때부터 이 자유스러운 학교로 오길 원했고 다른 애들이 부러워할 만큼 머리를 기르고 싶었기에 한성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평소에 바이브레이션이 많이 들어간 디오나 롭 헬포드의 창법을 좋아해서 연습했고 노래방에 가면 바이브레이션을 남발하였기에 애들은 나보러 "락커"라는 별명 지어주었고, 미팅이 있는 날이면 꼭 나를 데려갔다.
"얘가 우리반 락커인데..머리 봐라 머리. 환상이지 않냐???"
친구들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귀 밑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무슨 인간 노예 팔러 와서 구경 시키듯이 떠벌리고 다녔다. 그때는 내가 약간 우울증 비슷한 것이 있었기에 그냥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노래를 하고 있자니, 다시,
"얘가 우리반 락커인데..음 떠는 거 봐라. 어~어~어~ 환상이지 않니???"
그러던 어느날 나하고 비슷하게 우울하게 생긴 덩치 큰 넘이 찾아왔다. 그 넘은 넥스트를 상당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넘은 밴드의 보컬이 꿈이라고 하면서 옆 반에 드럼 치는 넘이 있는데 실력이 아주 아주 뛰어나다고 했다. 우리는 곧바로 밴드를 만들자고 했고 그때 낙원에서 바가지 쓰고 산 기타를 자랑하는 넘을 발견했다.
덩치 큰 넘은 그 애도 꼬시자고 했고 나도 동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짜장면집 아들이 베이스기타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 아이도 밴드에 넣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카루쓰' 라는 팀을 만들었다. 성당드러머 홍석원과 낙원바가지 이창현과 짜장 박장국, 덩치와 함께..
일년동안 한 짓이라고는 팀 이름 만들기 밖에 없었던 우리는 클럽 오디션을 보자는 제의에 오디션을 봤으나 보기 좋게 떨어졌고, 그때 리더였던 덩치가 나가 버렸다. 뒤따라서 장국이도 팀을 떠났다. 그리고 김태호라는 아이가 기타로 들어와서 그때부터 우리는 제대로 팀 생활을 했다.
낡아빠진 연습실에서 똘똘이 엠프와 함께 밥대신 과자 부숴 먹어가며 아랫층할아버지한테 쌍놈 소리 듣고 손 비벼 가며 애드립 후리고, 가끔 뜨거운 컵라면을 후룩 마셔가며 우리는 열심히 연습했다. 우리는 우선 우리가 쉽다고 생각한 너바나, 그린데이, 래디오헤드의 크립을 열심히 연습했다.
어느날 우리는 신촌에 '트럭' 이란 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아마 그날이 내 삶의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난 베이스/보컬이었으나 베이스는 절대 치지 않고 죽어라 액션만 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웃겼나 보다. 우리는 단번에 합격이 되었고 트럭이라는 클럽의 첫 밴드가 되었다.
일주일에 12~14번을 공연하는 강행군을 2주일 정도를 하고 하루에 6시간이상 합주를 했다. 사장님은 밥은 굶으면 안된다며 자기 이름을 달아놓고 밥을 시키라고 했다...나중에 밥값만 100만원넘게 나왔지 아마..^^
2주일동안 무리하게 공연을 해서 그런지 하루는 심하게 피를 토했다. 그 뒤로는 3옥타브 라까지 두성으로 올리던 내가 3옥타브도 겨우 넘기게 되었다. 그 때쯤 비욘드 에이지라는 코어 밴드가 오디션에 붙었다. 비욘드 보컬 김종규씨는 그를 아는 사람은 믿기지 않겠지만 바스켓 케이스를 불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패닉의 '단도직입'도..후후후
봄이 되자 우리는 야외 공연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연예인들만 타는 줄 알았던 밴을 탔다.오~~ 그리고 우리는 일산 호수공원으로가서 첫 야외공연을 했다. 우리의 쑈를 본 사람들은 좋아했고 사장도 흡족해 하며 우리에게 '페이'라는 것을 주었다. 3만원 정도의 페이였지만 우리는 돈이 든 봉투를 꽉 쥐구 감격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원래 페이는 15만원이었단다..
그렇게 봄이 찾아 왔고, 우리밴드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타에서 베이스로 전환하여 플레이하던 태호가 밴드에서 개인적인 이유로 빠지고 말았다. 우리는 베이스를 열심히 물색했다. 77년생 문희 누나라는 여인이 우리밴드에 들어 오게 되었고… 그녀는 열심히 우리를 따라 주었다. 그러나 문희 누나는 우리의 미친 짓에 짓눌려 팀을 떠나게 되고 우리는 낙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잠깐 같이 밴드를 했던 지금의 해머 베이스 진봉렬군을 만나게 되었다. 봉렬이가 들어와서 '우리는 이제는 정말 이렇게 평생 음악을 하는 거야!' 했으나, 고등학교 3학년의 신분이었던 봉렬군은 학업 때문에 도중하차 하고야 말았다.
우리는 정말 많은 낙심을 하게 되었다. 음악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었으나... 정말 기적적으로 지금의 베이시스트 쓰시맨을 만나게 되었다. 쓰시맨은 그 전부터 언더에서 공연을 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공연 하나 하나의 타이틀을 신중히 생각하였다. 그는 우리에게는 데모 씨디가 필요하는 얘기를 했고, 우리는 데모 씨디 녹음에 들어 갔다.
'오빠땡겨'와 '내님'을 아주 아주 열악한 사운드로 녹음을 했는데 그 녹음실에 있던 누군가가 그것을 엠피쓰리로 올려서 여기저기 뿌렸다. 우리의 허락도 없이... 그러나 전화위복이 맞는지 새옹지마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특이하게 녹음이 된 우리 음악이 의외로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그 후로 우리는 닥치는 대로 공연을 했다. 작년 이맘 때에는 하루에 4탕이나 뛰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공연을 하다가 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불쑈를 하다가 얼굴에 화상을 입었는데 일주일동안 드러머 집에서 숙식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걱정해주고 격려해주었지만 난 정말 회의감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다시 공연을 시작하니 그제서야 느꼈다..내가 죽어야할 곳은 무대구나.. 거창하게는 썼지만 정말 그랬다.
한참을 그렇게 프리마켓이라는 이름을 걸고 공연을 하다가 우리는 매너리즘이란 것에 빠지고 말았다. 한정된 레파토리에 연주력을 무시하고 공연을 했던 우리에게 그런 결과는 당연했다. 자구책이 필요했고 새로운 음악 색깔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코리티쉬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멤버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던 정적인 음악 색깔에 맞춰 한 곡 한 곡 맞추기 시작하고, 처음에는 우리 멤버 끼리만 재미로 연습을 했지만 나중에는 공연도 하고 싶어졌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그룹 '제네바'를 표방했기에 우리 음악을 들은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이렇게 라도 하지 않았으면 음악적 괴리감에 빠져 어떻게 됐을지도 몰랐기에 스스로 만족을 했다. 코리티쉬란 그룹은 그냥 우리가 좋으면 되는 음악들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서로 욕심이 많아서 이것 저것 건드려 보며 우리의 음악적 방향을 세우고 싶었다.
요즘에 음악 싸이트에서 음악을 들으러 가면 별로 들을 게 없는 것 같다. 특히 요즘 음악들은 특히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에는 펄프나 이기팝같은 글램락이나 디오나 라우드니스같은 정통 메틀을 많이 듣는다. 보컬 쪽을 연구 하다보면 나 같은 경우엔 옛날 보컬들이 더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아서다. 기타 톤이나 전체적인 마스터링이 딸리긴 하지만 그만한 운치가 보이는 것 같다. 사운드를 채우기 위해 집어넣은 허밍 코러스나 휘파람, 박수소리 같은 게 굉장히 정겹다.
나중에 우리음악이 조금이나마 알려진다면, 그래서 다른 뮤지션들이 영감을 받고 우리음악을 참고를 하며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면 나에게는 더 없는 기쁨일 것 같다. 그리고 또 한가지 부러운 게 있다면 무대 위에서 늙을 때까지 공연을 하는 롤링스톤즈나 딥퍼플을 보면 정말 부러울 따름이다. 몇 번의 강산이 바뀌어도 줏대가 흔들리지않는 음악인.. 그런 음악인이 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