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가치와 보편적인 진리
철학과 2022101243 서은서
삼론공종은 용수의 중관사상을 중국에서 체계화해 성립한 종파이다. 인도 대승불교에는 중관불교와 유식불교의 두 흐름이 있는데 이들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중관불교는 삼종론, 유식불교는 법상종이 되었다. 고구려의 불교는 소수림왕이 중국 전진에서 순도로부터 수용하였기에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특히 고구려에서 삼론종이 발전하는데 기여한, 삼론종을 발전시킨 이는 고구려의 승려인 승랑이다. 인도 출신 나가르주나(용수) 스님이 만든 ‘중론’, ‘십이문론’, 그의 제자가 만든 ‘백론’ 이렇게 3가지 글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학설인 삼론은 당시 제대로 연구되지도 못한 상태였으나, 승랑이 연구한 바를 주옹이 배워 <삼종론>이라는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고, 6세기 말엽 고구려에 다시 불교가 발전하기 시작할 때, 고구려 스님들에 의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삼론은 용수의 <십이문론>, <중론> 그리고 제바의 <백론>을 가리킨다. <십이문론>은 현상계의 일체제법은 실체적으로 보아 공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중론>은 유·공·가·중, 즉 중도를 밝히는 데 근본취지가 있으며, <백론>은 주로 공의 도리만 설해있다.(한국철학사, 65)” 본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중론>이다. <중론>에서 용수는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공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절대적인 무라는 관점에서의 파악이 아닌,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는 연기론의 관계에서의 파악이다. <중론>에서 핵심으로 봐야 할 용어는 공(空), 가(假), 중(中)이다. 공은 ‘비어 있다.’, 즉 고정불변한 실체는 없으며,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일체가 공하여 같다. 만물의 어떤 보편적인 실체라고 하는, 단 하나의 고정불변한 무언가도 없으며, 우리 또한 죽어도 영원히 있는 영혼도 없고, 그저 연기에 따라 임시로 존재할 뿐이다. 그 공한 본질의 이치에서 일어나는 연기 현상이 있을 때 이는 가가 된다. 가는 일시적인, 현실적인, 현상을 의미하는데,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임시로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 있는, 상호의존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공과 가가 분리되어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이 고정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이 없으므로 공하고, 모든 것이 연기하여 상호 의존하면서 일시적으로 존재하여, 모두가 다르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가이다. 즉, 연기하면서 공한 것이고 공하면서 연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세속의 이치를 기준으로 보편타당하다고 여기는 진리인 속제를 갖는다. 이는 분별로 인식되는 진리라고 일컫는다. 속제와 함께 이제라고 불리는 진제는 절대적 진리, 최고의 진리로서 세속적 입장을 초월한 진리를 뜻한다. 출세간의 차원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자각한 올바른 진리를 진제라고 하는데, 비록 공하지만 현상적 차원에서는 연기하여 상대적인 세계가 이루어지므로 세간의 관점에선 유를 인정하는 속제가 된다. 그렇다면, 속제는 상대적 세계에서 인간이 표현한 인간의 진리이기에 의미 없는 것이고 알 필요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제만을 알고 속제를 모른다면 일체가 공이라고 하며 공에 머물러 있고 공에 집착하게 된다. 그렇다고 속제만을 추구한다면, 이 속제에 모든 것이 있다고 믿고, 이것만이 진리라고 믿게 되어 바르지 않은 견해에 빠지기 쉽다. 진제는 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속제 역시 진제에 근거한다. 승랑은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를 말하는데, 이는 이제(진제와 속제)가 합쳐져 밝게 되었을 때 명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가 여여하여 맞아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게 중하고 명확해진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현상적인 측면을 인정하기보다는 이데아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했기에, 현상에 속하는 속제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이를 통해 진제를 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론>은 개인의 다양성, 각자성을 인정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세계는 이전보다 조금 더 평등하게 되었고,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으며, 이를 근거로 타인의 가치를 무시하는 이들도 많다. 우리는 각자마다 각자의 기준이 있다. 무언가를 행할 때, 말할 때, 생각할 때마다 자기만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만약 내가 무언가 행할 때 어떤 기준이 작동한다면, 그리고 그 행함이 오직 나의 일이고, 나만의 문제라면 결과값이 실패든 성공이든 나의 책임이고, 내가 해결해야 할, 혹은 기뻐해야 할 일이 된다. 그러나, 만약 어떤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고서 행해야 하는 일이 나뿐만 아니라 타인과, 혹은 한 사회 내에서 함께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나의 기준이 필연적으로 그 일에 적용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내게 절대적인 기준이 그 안에서 진리이자 기준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나 홀로 하는 일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내 기준을 돌아보고 수정할 수 있다. 내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의심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홀로 해결해야 하는 일 안에서도 잘못되었을 때, 타자의 탓을 하거나, 내가 처한 환경의 탓을 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그 일이 내 판단의 오류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만약 타자, 사회와 엮여있는 일이라면 어떻게 될까? 다수의 사람과 한 팀을 이루어 성취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의 말이 모두 맞고, 자기 말만 따르면 결과물이 무조건 좋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리고 그의 주장과 생각, 가치관 등이 나와 상당 부분이 맞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의 말을 따를 것인가?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내가 만약 내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기준이, 나의 가치관이 조원들과 맞지 않는다면, 나의 기준, 가치관은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모두가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생각하는 진리가, 내가 가치 있다고, 보편적이라고 믿는 무언가가 정말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타자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어떤 순간에는 맞는 가치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가 옳다고 이야기하는 진리라면 어떨까? 미국 사회에서 성행하는 ‘능력주의’는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이를 개발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이 가치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능력이 있고 이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더해진다면 성공에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가치가 보편적으로 모두가 맞다고 하는 진리라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태생적으로 어떤 특출난 능력이 없는 이라면? 혹은 능력을 발전시킬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진리는 분명히 맞고, 옳을지라도 현실적인 적용의 측면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혹은 능력주의가 내포하는 그 가치가 비록 다수가 옳다고 하는 진리라고 할지라도 정말 이 세계에서 본질적으로 통용되는 진리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독일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나치즘’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의 독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했던 사상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매우 전체주의적이라 비판받는다. 그렇다면 진리는 다수가 옳다고 한다 한들 정말 진리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세계, 그게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현상계든, 좀 더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형이상의 세계이든 간에, 그 속에 정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모두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진리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완벽히 깨닫는 이가 있을지 의문일뿐더러, 그 진리가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완벽하게 100% 맞아떨어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중’한 상태가 되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100% 진리라고 주장하며 완전히 깨달은 자가 나타나더라도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개인의 가치만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사회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각 개인이 모두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며 타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의 단일 가치, 누구나 동의하는 보편적 가치만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것 또한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전체주의적 사고로 흐를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각자성을 잃고, 다양성이 소멸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무언가가 다른 이에겐 너무나도 확고히 아닐 수 있고, 특정 상황에서는 다른 이의 말도 맞을 수 있음을, 혹은 너와 내 생각을 합쳐 제3의 가치, 주장, 기준 등이 생길 수도 있음을 인정하며 우리는 좀 더 수용적일 필요가 있다. 어떤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누군가를 차별하고, 사회의 문제를 등한시하기보다 타인의 의견에 좀 더 수용적이고, 나의 기준은 언제나 변할 수 있으며, 설사 정말로 본질, 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이 현상, 현세 속에서 타인과 어울리며 조화로운 사회 안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기보다, 인간으로서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다양성에 대한 수용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성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지, 그리고 보편적인 가치를 어디까지 추구해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리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어디까지 적용 가능하며, 어디에선 틀릴 수 있는지 가늠이 잡히지 않을 때가 많다. 가끔은 자기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혀 내가 맞다고 우기고 난 후 한참 뒤 후회한 적도 많다. 이론적으로는 타인의 다양한 의견도 수용하면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현실적으로 막상 눈앞에 일이 닥쳤을 때는 조급해져 내 중심적으로 일을 바라본다. 아마 영원히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생명체이면서, 인간인 우리는 생명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인간으로서의 인식도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어느 정도 수준에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 질문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에서 "영원히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라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삼론종, 공, 가, 중을 통해서 대승불교가 고민했던 지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파불교는 서양적 전통에서 본다면 일종의 주지주의, 합리주의로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선각자, 곧 먼저 깨달은 자로서 그가 이른 곳은 진리 그 자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삶의 여러 과정 가운데 한 갈래, 국면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완전하고 흠결 없는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완전하고 흠결 없는 질리라고 한다면 부처님을 친견한 당시의 아라한은 모두 부처가 되었어야 합니다. 오히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우리는 현재에도 각자가 그것을 찾아가고 실현해내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