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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에 관하여
대승불교 전통에서 석가모니 이후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용수(Nagarjuna, 150~250)에 의해 지어진 『중론』은 초기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에 입각해 공(空) 사상을 논증한 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모든 현상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변화한다는 연기 사상과, 그러므로 모든 현상은 고정된 본질적 실체를 지닐 수 없다는 공 사상에 관한 내용은 『중론』의 핵심 골자를 이루며, 다채로운 논의를 위한 지반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론』의 본격적인 텍스트를 들추어보기 전에, 나는 먼저 이 책이 지닌 독특한 형식적 특성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논리’를 비판하는 많은 사유들은 주로 ‘직관’에 의존해왔다. 이러한 사유들은 자신을 주장하는 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큰 틀에서 보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동일하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그동안 배우고 엮어온 논리의 그물을 건져 올릴 때,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거대한 바다를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날마다 논리를 통해 도출하는 결과들은 마치 싱싱한 물고기처럼 우리의 허기를 달래주며 만족감을 주고, 또다시 바다에 그물을 던질 힘을 제공하지만, 그것들로는 결코 바다에 관한 전체적인 앎에 이를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과정 중에 건져 올린 물고기를 먹지도 않고 풀어주지도 않으며, 실험대로 가져가 분석을 통해 바다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괄목할 만한 성과이긴 하나, 역시 부분적인 앎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앎은 파편화되고 흩어진, 이성의 지배욕만을 충족시킬 뿐인 앎이 아니라, 대상과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전체적인 앎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다에 대해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습관처럼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일을 멈추고 즉시 배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 그 안의 다양한 생명들과 함께 헤엄치며 바다의 수온과 색깔, 그리고 생동하는 흐름을 느껴야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분명 ‘논리’에 근거한 사유들과는 다른 특유의 울림을 갖는다. 그리고 수없이 다양한 물고기가 돈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의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생각해볼 시간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직관’에 의존하는 사유들이 많은 경우 비주류의 자리에 머무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령 주류의 반열에 오른다 해도 금방 뒤처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사유들이 마치 동양의 정신이 그 형식은 우아한 그림처럼 아름다우나 내용은 공허하다는 식의 비판을 받는 것 처럼* 현실에서 실효성을 띄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직관’이라는 방식이 일종의 주관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모두가 뛰어난 다이버처럼 야생의 바다에 뛰어들어 살아있다는 희열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이고, 몸이 아프거나, 용기가 없거나,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주류의 자리는 본질적으로 다수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주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직관’에 의존한 사유들은 세상의 주변부에 존재하게 되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소수들에 의해 지탱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직관’의 특성을 장점이나 단점으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직관’이 지닌 주관성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에는 어려울 수 있으나, 그만큼 자유롭고, 어쩌면 변화하는 현실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불교의 정신, 그중에서도 ‘모든’ 고통스러운 중생을 구제하려는 불교의 자비적 정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주관성을 상대적인 약점으로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중론』 또한 앞서의 주장과 같이 논리를 비판하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중론』은 단순히 ‘직관’의 영역에서 머무르지만은 않는다. 『중론』의 저자는 거기서 빠져나와 직관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아보곤 깊은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용수는 석가모니가 꿰뚫은 바다의 찬란함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했음에 틀림없다. 그를 따라 해안가에 다다른 우리는 어느 낯설고 커다란 잠수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간의 인내와 열린 마음만 있다면, 이 신비한 잠수함을 타고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바닷속을 탐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성, 그것이 『중론』의 특별한 점이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용수가 이러한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준비한 잠수함이 바로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즉, 용수는 습관적으로 사용되던 ‘논리’를 해체하기 위해 또 하나의 ‘논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성격, 어쩌면 그것은 모든 위대한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그러한 모순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모든 분별이 사라진 탁 트인 평야에 다다르게 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용수가 어떻게 논리를 통해 논리를 비판하는지, 그리고 그 비판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중론』은 제1장 관인연품(‘무엇이 발생한다’는 생각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제27장 관사견품(‘윤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대한 비판)으로 끝난다. 총 27장으로 이루어진 『중론』의 각 장에서는 다양한 개념과 이론들이 논의되지만, 이 글에서는 『중론』의 모든 내용을 다룰 수는 없기에, 먼저 용수가 논리를 해체하는 방법인 4구 비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4구 비판에서의 4구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낼 수 있는 네 가지 방향의 판단을 의미한다. 현상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의식의 ‘지향성’ 개념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무엇’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의식은 있을 수 없으며, 이러한 상태를 불교에서는 연기적 관계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적 관계에 있는 의식이 ‘무엇’에 관한 판단을 내릴 때, 그것은 4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4구란 의식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모든 방향의 길인 것이다. 이러한 4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첫째는 긍정이고, 둘째는 부정이며, 셋째는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것이고, 넷째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용수는 각 장에서 이러한 4구의 판단들을 소개하며 그동안 논리가 습관적으로 드나들던 모든 길들이 잘못된 것임을 보인다.
『중론』은 팔불(八不)의 연기 법칙을 가르쳐 주신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노래로 시작한다. 팔불이란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상(不常), 부단(不断), 불일(不一), 불이(不異), 불래(不來), 불거(不去)인데 전통 해설서에서는 팔불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생: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에서 싹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불멸: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불상: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이 싹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과 싹이 단절된 것이 아니다.
불일: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과 싹이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다.
불이: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과 싹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불래: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싹이 다른 어느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불거: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이 그대로 싹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팔불의 연기 법칙처럼, 모두 다른 것과 얽혀서 발생하는 것이다. 싹은 반드시 그 씨앗이 있어야 발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싹은 씨앗 등에 의존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얽혀서 발생하는 것, 즉 연기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묘사할 수가 없다. 우리의 생각은 흑백 논리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이란 있음을 부정하면 없음을 떠올리고, 같음을 부정하면 다름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싹의 경우를 예로 들면, 우리는 씨앗에 ‘없던’ 싹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든지, 씨앗에 ‘있던’ 싹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모두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만약 싹이 씨앗 속에 미리 존재했다면, 싹이 다시 발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리 존재하는데도 굳이 다시 만들어 낸다면, 싹이 두 개가 되는 오류에 빠진다. 발생케 하는 싹과 발생된 싹이 그것인데, 두 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1구 비판) 그와 반대로 싹이 애초에 씨앗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류에 빠진다. 애초에 씨앗은 싹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씨앗이 거기서 나올 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싹이 발생한다면, 그 싹과 관계없는 모든 곳에서도 그 싹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2구 비판) 그렇다면 누군가는 싹의 요소가 씨앗 안에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판단은 싹의 일부는 씨앗 속에 있고, 다른 일부는 씨앗 속에 없다는 판단으로 치환될 수 있다. 이는 결국 3구에 해당하는 판단으로, 싹이 씨앗 속에 있으면서 없다는 것인데, 무언가가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는 것은 모순된다. (3구 비판) 마지막으로 싹이 씨앗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판단이 남았는데, 이는 있음도 부정하고 없음도 부정하며 그것의 논리적 보편성을 상실하므로 우리의 정신으로 파악하기엔 무의미한 판단이다. (4구 비판)
또 다른 예시를 들자면 주체와 움직임에 대한 분석이 있다. 만약 무엇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움직임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 ‘내가 걸어간다’는 움직임의 경우 ‘나’는 주체가 되고, ‘걸어감’이라는 움직임은 그 작용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보고 이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있고, 그것과 별개로 ‘걸어감’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의 의식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을 주어와 술어로 ‘분별’해 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의 오류를 용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가는 자가 없다면, 가는 작용은 성립하지 않는다.
가는 작용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가는 자가 존재하겠는가?
(중론 2장 7절)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은 연기 관계에 있는 개념쌍이다. 누군가 걸어갈 때,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얽혀, 즉 서로 의존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용수는 나아가 그렇다면 왜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이 따로 존재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약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이 따로 존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기 ‘가는 자’가 ‘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러한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술어와 주어 속에 들어 있는 술어의 의미가 중복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철수가 간다, 영희가 간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서의 철수는 앉아 있는 철수가 아닌 ‘가는’ 철수이고, 영희는 서 있는 영희가 아닌 ‘가는’ 영희이다. 따라서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는 철수가 간다, 가는 영희가 간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의미 중복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는 ‘가는 작용’을 갖지 않는 ‘가는 자’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가지 않는 가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는 논리적 모순에 더불어 명백히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이다. 이와 같이 주어와 술어를 독립적으로 인정하려는 시도의 ‘가는 자’가 ‘간다’는 명제는 양극단에서 모두 오류를 범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판단이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 이 판단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판단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비가 내린다’고 할 때 우리는 흔히 비와 내리는 작용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비가 내린다’는 현상만 있을 뿐이다. ‘비’라는 주어 속에서는 ‘내림’이라는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우리가 ‘비’와 ‘내림’을 독립적으로 보고 ‘비가 내린다’고 말하면, ‘내리는 비’가 내린다는 표현이 되어 의미 중복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내림을 갖지 않는 비’가 어딘가에 있어 그런 비가 내린다는 주장 또한 논리적 모순과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글을 쓰다 보니 목적과 무관하게 내용이 길어진 것 같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강의 시간에 언급되었던 진제와 속제의 내용, 즉 현상 세계에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진실을 뜻하는 속제와, 모든 것을 넘어선 진리를 뜻하는 진제의 내용까지도 다루어보고 싶지만 다른 과제도 작성해야 하기에 이만 줄이려고 한다. 『중론』에는 소개한 내용 이외에도 다양한 논리적 형식과 그를 타파하는 신선한 논리들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통해 용수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상만사가 공(空)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흑백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우리의 사유는 우리도 모르게 인간과 세계, 영혼과 육체, 시간과 공간 같은 다양한 이론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석가모니 또한 이와 같은 이론들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았으며 그 속에서 다양한 도전들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들을 받았을 때 침묵했으며, 이후 연기(緣起)에 관한 가르침을 설파했다.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형식의 답변이었고, 잘못된 물음을 바로잡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용수는 왜 그러한 물음들이 잘못된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중론』을 집필한 것이다. 우리가 진정 용수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그가 구사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만 알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다양한 현실의 문제들에 적용하고, 나아가 그가 준비한 세련된 잠수함도 실은 허구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헤겔 『역사철학 강의』 : "동양의 정신은 구체적 자유를 알지 못하고, 그 대신 절대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질서 안에 갇혀 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와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예술과 철학은 형식적으로는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그 내용은 비어 있다."
첫댓글 중론에 대한 상세한 설명 잘 읽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군요. 그런데 헤겔을 빌려 직관을 포함한 "동양의 정신"이 "인간의 자유와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일정 정도 동의한다는 점에서 중론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도 가능할 듯합니다. 헤겔을 포함한 서양철학의 한 계보인 합리주의는 인간 일반이 "본질적으로 다수의 인정"이 가능한 무엇, 곧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자유와 개별성"이라고 하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다수의 인정이 가능한 범위에서 인정되는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는 논리에서 가끔 찾을 수 있는 모순이 여기서도 발견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직관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의 경험에 기초하기 때문에 보편성과 절대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유와 개별성을 억압하는 이성의 "절대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질서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수의 중론은 이러한 합리에 대한 되물음을 논리적인 방법인 4구 비판을 통해 던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입니다. 분명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가닿지 못해 보편성을 상실한 논리들과, 잠시 고개만 돌려보아도 모두에게 미소짓고 있는 직관들이 존재합니다. 또한 논리와 직관의 문자적인 경계를 해체하고 들여다보면, 논리의 계단에서 계단으로 넘어가는 것은 직관이고, 또 그러한 직관의 순간 속에는 무수한 논리의 계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