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와 악행의 구분에 따른 선악에 대한 고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보게된 조력자의 역할과 의미>
저는 우연히 이 만화를 보다 악의 없는 악행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고찰해보게 되었습니다. 악의와 악행은 엄연히 구분되는 말입니다. 악의란 어떤 것에 대한 나쁜 생각, 의지를 나타내고 악행은 나쁜 행위 자체를 나타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사법 또한 행위자의 악의적인 정도를 고려하여 형량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범죄가 아닌 것을 범죄라고 생각하고 행한 사람인 환각범은 죄형 법정주의에 따라 처벌할 수 없습니다. 이런 환각범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할까요? 반대로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규제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철학의 아주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를 ‘선과 악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선악에 대한 구분을 하려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각 나라들 간의 선악의 기준은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나라마다 법도 다르지만, 특정 행위에 대한 보편적인 가치 평가 또한 달랐습니다. 서양의 칸트는 오로지 동기만을 보고 행위를 판단하였고, 벤담과 밀은 공리주의 입장에서 행위의 긍정적/부정적 정도를 측정, 혹은 비교하여 행위를 판단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예를 기준으로 삼기도 하고, 가치 판단을 본성을 토대로 설명하려 하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죠.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여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물입니다. 저는 이 말에 따라 사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사회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사회마다 가치 판단의 기준, 정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죠. 그리하여 저는 현재 이렇게 사회마다 법과 규범, 판단 기준이 모두 다른 것을 긍정적으로 관망합니다. 서로의 기준이 다름을 이해해주고 사회의 흐름에 따라 계속하여 변화하도록 두는 것이 인간 사회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자면, 저는 주변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좁게 보면 부모, 친구, 선생님과 집. 넓게 보면 길거리와 복지, 주변 인프라까지. 이 ‘주변’은 한 사람의 도덕적 결정 능력에 방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근묵자흑’, ‘맹모삼천지교’ 모두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끊임없이 사회에 적응하고 속하려 노력하는 인간이 속하고자 하는 주변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다른 동식물들과는 다르게,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도 없고, 배를 채울 능력도 없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조력자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하쿠와 가마할아범, 가오나시처럼, 위 만화의 간호사처럼. 불안정한 상황에서 조력자의 역할은 빛을 발합니다. 때로는 정상적이기 힘든 상황일지라도 조력자 덕에 오히려 성장하고 성숙해지기도 합니다. 특정한 사회의 선악, 도덕 기준에 대해 먼저 적응하고 통달한 자가 미숙한 사람들을 돕는 선순환이 유지된다면, 저는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입장을 정리하자면, 선악의 기준, 가치판단의 기준은 사회마다 모두 다르나 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조정, 적응하여 미성숙한 이들의 조력자 역할을 해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입장입니다. 행위의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환각범이나 범죄 미수에 그치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도 있는 것이고, 행위의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는 반대의 입장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도 실수에 관대한 사회가 있을 것이고, 예의에 엄격한 사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적응하고, 적응이 어려운 사람들의 조력자가 되어주는 것에 집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댓글 실정법에서 범죄의 성립은 구성요건해당성, 위법성, 책임(책임조각사유의 부존재)라고 하는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해당 행위가 법률이 금지하고 있는 행위유형과 일치되어야 하며, 위법성이 조각되는 사유가 없어야 하며, 책임이 조각되는 사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용한 사례의 경우는 범의를 결여하고 있으므로, 범죄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형법의 경우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서술하고 있는 악의와 악행의 문제와는 별개로 볼 수 있겠지요. 따라서 "범죄"가 아닌 악의와 악행에 대한 논의로 집중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철학에서는 선악의 문제가 오래도록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이원론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선만이 존재하는 것이며, 악이라고 하는 것은 선의 결여 상태로 정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는 이미 인간이 무엇이 선인지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칸트의 동기, 벤담과 밀 등의 공리주의에서도 이러한 전제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대로 접어들면서 개별 인간의 권리, 곧 인권의식이 높아지면서 인식과 판단, 그리고 실천의 주체자들 사이에서 성립되는 "합의"를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점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