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권 鄭世權(1888~1966)】 "1928년 조선물산장려회 경성지회 이사"】
1888년 4월 10일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 하이면(下二面) 덕명리(德明里)에서 아버지 정필석(鄭必晳)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晋陽)이며, 호는 긍당(肯堂)·기농(基農)이다. 부인 철성 이씨(鐵城李氏)와 후처 천안 전씨(天安全氏)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다.
1894년부터 서당에 다녔고, 1899년 진주(晉州) 백일장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1906년 차함(借銜)으로 기자릉 참봉을 얻었다. 1908년 매형 김용기와 향리에 덕명학교를 세웠고, 1909년 경남 진주 사립 낙육고등학교(樂育高等學校) 사범과 및 측량과를 졸업하였다. 낙육학교는 반일 성향이 강했으며, 매형은 화서학파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민족의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1년 하이면 면장에 임명되어 농사 개량 등 면민을 위해 힘썼으나, 대대로 면장직을 해오던 최씨 일가가 질투심으로 상해(傷害) 사건을 일으키자 “이 좁은 바닥에서는 큰 뜻을 펼 수 없다”고 결심하고서 1919년 상경하였다. 서울에서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자 매형과 건축회사 건양사(建陽社)를 설립해 북촌 일대에 주택을 지어 건축가로서 부를 축적하였다.
1928년 1월 16일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 경성지회가 설립되고, 그해 3월 30일 개최된 제1회 정기총회에서 이사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12월 9일 조선물산장려회 부속 사업체 고려발명협회(高麗發明協會)의 이사에 선출되었다. 1929년 10월 조선물산장려회 본부 상무이사가 되어 경상비와 기관지 발행 등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하였다. 1930년 5월부터 전임상무이사를 맡아 일제 독점자본에 대항하여 민족경제를 보존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는 물산장려 사업을 총괄하였다.
1930년 4월 14일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7월 전조선수재구제회(全朝鮮水災救濟會)가 조직되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장산사(獎産社)를 설립해 조선물산장려회 사업 전반을 크게 활성화시켰다.
1931년 1월 기관지 『물산장려회보』 발행인으로 취임하여 제호를 『장산』으로 변경하였다가, 그해 7월 명제세에게 발행권을 넘겨주고, 같은해 8월 『실생활』을 창간하였다. 1931년부터 1940년까지 물산 장려·농촌 진흥·학생 교육에 대해 실천을 독려하는 「조선물산장려회에 대한 나의 감상」, 「학생복, 노동복의 제작부터 조선 무명으로 하자!」 등 50여 편의 글을 남겼다.
1935년 3월 15일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창설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사에 선출되었다. 조선교육협회 내에 있던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무소 확장 필요성을 듣고 1935년 7월 11일 시가 4천원에 해당하는 서울 화동(花洞)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기증함으로써 조선어학회의 어문운동과 사전편찬사업을 후원하였다.
1936년 6월 6일 과학지식보급회가 창설되자 재정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전국적으로 홍수가 나고, 1937년 평북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수재민이 발생하자 남녀 의복 수백 벌을 기탁하였다. 이극로(李克魯)가 민족독립사업에 유용한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1936년 1월 창설한 조선양사원에 1937년 이우식이 10만 원을 출자하고, 이은상·이인·안호상 등이 가담하자 이에 동참하는 뜻으로 가회동(嘉會洞)에 있던 큰 집 한 채를 내놓았다. 그러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1942년 10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에 조선어학회 건물 기부와 양사원 관련 혐의 등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일제 관변단체인 녹기연맹에서 신당동(新堂洞) 소유지 수만 평을 강제 수탈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광복 후 수탈되었던 신당동 땅을 되찾아 1948년 이인(李仁)이 법무부장관이 되자 국가에 헌납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