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왼편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면서 끄덕인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다시 한 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다행이다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한백양 시인 약력
전남 여주시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2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심사평] 일상적인 장면을 사유화 이미지로 벼리는 솜씨 탁월
-심사위원: 정호승 시인, 조강석 문학평론가
전반적으로 올해 신춘문예 투고 편 수가 늘었다는 말이 들린다. 최근 들어 시집 가판대가 부활하고 각급 단위에서 시를 읽고 쓰는 모임이 다시 활성화됐다고도 한다. 물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시 읽기를 즐기고 시를 쓰는 것에서 어떤 보람을 느끼는 것 역시 노력과 수고를 요청하는 어떤 밀도와 깊이에 기반할 때 좀 더 매혹적으로 삶을 끌어당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심사위원들은 이번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밀도가 고르지 않다는 것에 공감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현상을 꼽을 수 있겠다. 소소한 일상을 담담한 어조로 스케치하는 경쾌함은 있지만 부박함과 구분되지 않는 경우, 그럴듯한 분위기는 조성하고 있지만 알맹이가 없고 장황한 경우, 문장을 만들고 행과 연을 꾸미는 기술은 있지만 단 한 줄에도 시적 진술의 맛과 힘이 담기지 않은 경우들이 그것이다.
이런 난맥 가운데서도 심사위원들이 최종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네 편이었다. ‘그 이후’의 일부 문장들은 흥미롭게 읽히지만 전체적으로 시가 유기적으로 구성됐다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컨베이어 벨트와 개’는 일상의 고단함 속에서 언뜻 발견하는 휴지와 파국을 실감 있게 그려냈지만 전체적으로 묘사에 치중한 소품으로 보인다. 최종 경쟁작 중 하나였던 ‘수몰’은 삶과 죽음, 시와 현실을 얽는 솜씨가 돋보였고 이미지 구사도 견실했지만 주제를 장악하는 사유의 힘이 아쉬웠다.
심사위원들이 ‘왼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한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사유와 이미지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문제적 현장으로 벼리어 내미는 솜씨 때문이었다. 이미지를 통해 핍진하게 전개되는 사려 깊은 성찰이 마지막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더욱이 투고된 다른 시편들도 편차가 적어 신뢰를 더한다. 당선자에게 축하와 격려의 악수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