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5 나해 사순2주일
창세 17:1-7, 15-16 / 로마 4:13-25 / 마르 8:31-38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을 알 때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470~399년)는 서양철학의 원류인 고대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성모독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소 당해서 71세의 나이로 사약을 마시고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남긴 명언 중에 “너 자신을 알라”는 오늘날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연유(緣由)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젠가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크세노폰(Xenophon)이 델포이신전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에게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전의 여사제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크세노폰은 이것을 소크라테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지혜가 있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가지 방면에선 확실히 소크라테스보다 뛰어났지만, 다른 방면에서는 대부분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한 방면에서 성취한 것을 가지고 자신이 무소 불능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실망스러워하며 고심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약 내가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이 정확하다면 단지 한 가지 가능성 밖에 없다. 그것은 나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내 자신이 신 앞에 진정으로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의미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당시 온갖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화하고 이로 인해 개인도덕의 타락과 민주주의의 부패를 극복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는 당시 집권층과 거짓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전에 한 번도 언급 안 하신 사실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겪고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 손에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마르코 복음 16장 중에서 8장을 기점으로 예수님 말씀의 어휘가 확 바뀌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의 어휘들은 ‘알아듣다, 알아듣지 못하다, 깨닫다, 마음이 무디다’등인 반면에, 후반부의 어휘들은 ‘자기 목숨을 잃는 자만이 산다, 복음을 위하여 집과 형제와 친척과 자식을 버리다’ 등입니다. 다시 말해, 전반부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는 문제를 주로 다뤘다면, 후반부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아가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8장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로 바뀌는 전환점입니다. 그것은 오늘 들은 복음 앞부분에 있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그 결과로 나오는 오늘 복음의 내용인 인자(人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기점으로 제자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면서 당신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일반 군중처럼 하느님나라 신비를 비유를 통해 막연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계시된 말씀과 행동으로 듣고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이 순간부터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실, 마귀들은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추방할 때마다 ‘우리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다’고 폭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당신이 하실 구원의 계시를 드러내실 때, 하느님의 아들(天子)이라고 하질 않고 사람의 아들(人子)라고 당신을 밝히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모습과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은 처음부터 모든 인간들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만천하에 알도록 천사들의 호위와 장엄한 자연현상을 보이면서 지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목수와 산골 처녀의 아들로서 그리고 별볼일 없는 목동들과 유대인들이 깔보는 이방민족의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게 낮은 곳에서부터 점차 모든 사람을 품어 안으시려는 극단의 겸손과 헌신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왜곡된 진리 그리고 그러한 것을 기반으로 하는 악의 세력을 온전히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악마와 예수님의 방법이 갈리게 됩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추켜 세워서 세상의 기득권층과 연결시켜 이 세상의 부조리를 연장시키려고 했던 반면에,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거짓 진리에 기반한 기득권층의 위선을 드러내고 그러한 악의 권세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나라가 주는 온전함으로 초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를 겉으로만 알다가 그 진면모를 이해하는 단계로 넘어갈 때,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하여 버림을 받고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접하게 될 때, 제자들은 큰 낭패감과 당혹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마르8:31)”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반응은 다른 제자들의 반응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들의 반응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 폭로된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신비가 실제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날 때 이를 도저히 납득 못하는 그런 무지와 무능력 말입니다.
34절에서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강한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마르 8:34-35)” 아마도 제자들은 더욱 더 놀라고, 당황하고, 반발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던 일이 닥칠 것을 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길이 바로 자신들의 길이 될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초창기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부활 이후 영광된 예수님을 더 강조하였습니다. 사람의 아들보다는 하느님의 아들을 더 강조한 것이죠. 그 결과, 교회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질 못하고, 특정한 사람들만의 집단으로 점차 작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일부 신앙인들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고 각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것은 중대한 선택의 문제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신학과 이론을 초월하여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복음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예수께서 계시는 곳에 함께 있겠다는 근본선택을 내리지 않는 한, 쇄신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의 모든 성직자와 성도들은 마르코복음서 전반부에 묘사되어 있는 치유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훌륭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외적활동에만 ‘아멘’할 것이 아니라, 후반부에 서술되어 있는 십자가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함께 하기로 결단하지 않는 한, 한국교회의 개혁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은 올해 서울교구 주교선거를 앞두고 있는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와 우리의 지식, 경험, 관념 등을 십자가의 조명을 받아서 우리가 12제자들처럼 당신을 잘못 알고 있었으며, 사실 당신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과 함께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간구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부활의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로 죽으신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으켜 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