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개혁에 목숨 바친 십자가의 성 요한
과거 수도원이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등 사회 전반적인 측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지방에서는 각 가정에서 똑똑한 자녀 한두 명은 수도원으로 보내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의 한 방편으로 수도원 문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문화유적으로 남아있는 대수도원에 가보면 언젠가 수백, 수천 명의 수많은 수도자들이 북적북적, 좌충우돌하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따라오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귀영화 등 뒤로 내던지고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하며 죽기 살기로 ‘올인’해도 늘 부족한 것이 수도자로서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런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측면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수도원 문을 두드린 사람들, 출세의 한 방편으로 수도원을 찾은 사람들, 공부하기 위해, 기술배우기 위해 수도원 들어온 사람들이 꽤나 많았습니다.
당연히 많은 수도원들이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어떤 수도원들은 복음정신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강이 해이해졌습니다. 자리와 권력에 연연하는 수도자들로 인해 수도자들의 영성의 질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등장한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1542년 스페인에서 태어났습니다. 세 살 되던 해 가정의 기둥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심으로 인해 남아있는 식구들은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요한은 삼촌 신부의 도움을 얻어 청소부 일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해나갔습니다.
요한은 가르멜 수도자로서 살아가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그런데 수도원 안에서 살아보니 아까 제가 말씀 부분이 요한의 마음에 계속 걸렸습니다.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기강, 영성의 결핍이 즉시 몸에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결심합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로구나.’ 평생 후회하며 사느니 더 늦게 전데 다른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사제서품은 1년 앞둔 요한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카르투시안회’로 말을 갈아타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요한에게 다가온 사람이 한명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아빌라의 데레사였습니다. 요한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데레사는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위한 구상을 펼쳐 보이며 요한을 설득했습니다. 그때 당시 요한은 25세 데레사는 52세였습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남자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 데레사는 여자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에 몸 바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개혁’ 말은 쉬운데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 보니 수많은 장애물들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습니다. 그들의 하루하루는 고통의 가시밭길,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십자가의 길,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습니다.
요한이 동료수도자들에게 개혁의 청사진을 펼쳐 보이며 쇄신작업에 동참을 요청하자 즉시 와 닿은 것이 기득권자들의 극렬한 반대였습니다. 이미 나태해진 수도자들의 펄펄 끓는 분노였습니다.
요한을 향한 동료 수도자들의 박해는 끝이 없었습니다. 유괴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동료들은 요한의 눈을 가린 채 햇빛도 들지 않는 수도원 독방에 감금시키기도 했습니다. 몇 달 동안 죽음이 공포를 느끼며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짐승 같은 세월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수시로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개혁 반대파 수사들 앞으로 끌려 나가 무릎 꿇린 채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끝까지 개혁을 향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한 요한의 노력 때문인지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당대 교황은 자치권이 있는 지부를 형성하도록 ‘개혁 가르멜 수도회’(‘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를 승인하였습니다. 그 후 요한은 가르멜 수도회 중앙 지도부에 머물면서 수많은 수도회들이 쇄신되고 개혁되는데 큰 힘을 보탰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한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칭송하고 있습니다.
“오!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영혼인 그대여, 그대는 신랑을 찾고 그와 일치하고 그가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는군요. 내가 이미 말했듯이 그대 자신이 바로 그분께서 머무시는 방입니다. 네 존재 자체가 그분께서 숨어계시는 궁방입니다. 그대의 모든 선과 희망이 그대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 아니 그대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대가 그분 없이 살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처럼 큰 기쁨과 만족이 다시 또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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