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손이 태어나는 경사가 이뤄짐에 燕禖弓韣早呈祥
기뻐하는 분위기 궁궐을 싸고 도네 喜氣葱葱繞未央
강보(襁褓)에 쌓인 준수한 기상 珠褓爭看壯髮秀
옥궤(玉櫃)에 성태를 깊이 보관하였어라 玉函深濩聖胎藏
백세토록 자손 번성하고 本支百世綿瓜盛
종사도 대대로 창성하리 宗社三靈奕葉昌
-「안태사 이 시랑 천장을 전송하며(送安胎使李侍郞天章)」 중-
생명존중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태실
태(胎)는 태아의 탯줄과 태반으로 예로부터 생명의 근원이라 보아 출생 후에도 소중히 보관했다. 조선 왕실에서 태어난 아기 태는 의례에 따라 태실(胎室)을 만들어 봉안했다. 태실은 길지(吉地)를 선정하여 태항아리에 봉한 태를 땅에 묻고 석조물을 세워 완성한다. 생명의 시작이 풍수가 좋은 땅에 묻혀 태 주인이 평생 복 받기를 바라는 동시에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한다. 처음 아기가 태어나 지은 태실은 ‘아기태실’이라고 부르며, 태실 주인이국왕으로즉위하면 화려한 석조물을 올려 ‘가봉(加封)’을 한다. 태실은 조선 왕실의 깊은 역사와 함께 전국에 많이 남아 있어야 하나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훼손되어 대부분이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 갔다.
일제 만행의 현장, 고양 서삼릉 집단 태실
고양 서삼릉 한편 외따로 떨어진 곳에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태실 54기가 표석만 나열하여 안치되어 있다. 좌측에는 왕과 황제, 황태자의 태실 22기가 검은 비석들로 세워져 있고, 우측에는 왕실과 황실 가족들의 태실 32기가 화강암 비석들로 세워져 있다. 어쩌다 54기나 되는 조선 왕실 태실들이 모여 있게 되었을까. 이곳의 태실들은 일제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왕실 태실 파괴와 손실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1928~1929년 옮겨놓은 것이다. 1928년9월10일 《매일신보》를 보면, 태실 29기를 경성으로 옮겨 왔고, 1929년 3월 1일 《동아일보》에는 태항아리 39개를 종로구 내수동에 임시 보관 후 추위가 풀리면 서삼릉으로 옮길 것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 태실들은 온전히 안치되지 않았다. 옮기는 과정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유리건판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보면, 사진에 검은색 동그라미 표식이 있는 태항아리는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서삼릉 태실에서 발굴한 태항아리에서 찾아볼 수 없다. 연구자들은 표식한 태항아리를 일제가 따로 관리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표식한 태항아리 대부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일부는 다른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확인되지 않은 것은 국외로반출되었을가능성도 크다. 태항아리와 지석을 제외한 태실 석조물들은 현장에 방치되다가 흩어져 버렸다. 1996년 서삼릉 태실 발굴조사 시 출토된 유물들은 모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빈 땅에 태실인지 무덤인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비석만 남아 있는 이곳은 주권을 잃은 나라의 비참함을 느낄 수 있다.
궁궐 속 외로이 남아 있는 성종대왕 태실과 비
창경궁 전각들과 춘당지 사이 구릉 위에는 조선 9대 왕 성종의 태실과 비석이 있다. 본래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1928년 일제가 옮겨 왔다. 사각형 기단석 위에 종 모양 태실이 있고 앞에 거북 모양 태실비가 서 있는 것이 거의 완전한 태실 모습이다. 다른 태실이 서삼릉으로 옮겨 간 반면 성종 태실만이 궁 안으로 옮겨진 이유도, 가장 상태가 좋아 서삼릉에 조성할 태실 표본으로 삼고 연구자료로 활용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新設할 標本은 成宗의胎室」,《매일신보》, 1928.9.10.). 그러나 서삼릉에 조성된 집단 태실에는 단순한 표석만 나열하여 세운 것으로 보아 당초 내세운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귀한 왕실 유산만 훼손하게 되었다.
가장 온전한 태실 유산, 서산 명종대왕 태실과 비
충남 서산에는 조선 13대 왕 명종의 태실과 비석이 있다. 건립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등에 상세히 전해지고, 주변 환경을 포함한 본래 모습이 현존하는 태실 중 가장 온전히 남아 있어 2018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형을 보면 상왕산 동북쪽 평야에 따로 떨어져 우뚝 솟은 봉우리 위에 있어 태실로서 명당에 위치한다. 팔각 기단석 위에 종 모양 석물이 서 있고 그 주위에는 팔각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태실 앞에는 총 3개의 비석[중종 33년(1538)태실건립 시 세운 비석, 명종이 국왕에 즉위한 후 가봉하면서 명종1년(1546)에 세운 비석, 종전에 세운 비석이 훼손되어 숙종 37년(1711)에 다시 세운 비석]이 있다. 지금의 모습은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우리가 보존ㆍ복원할 태실 문화
국가의 안위를 품은 태실을 파헤쳐 나라의 앞날을 그릴 소망조차 할 수 없게 하다니 식민(植民)은 그 이름만큼이나 잔인하다. 해방이후 혼란한 가운데 태실 관리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아직까지 소재 파악이 힘든 태실이 많지만 보존과 복원을 위한 연구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뿐만 아니라 경북, 경기, 충남 지자체에서도 태실을 보존, 보호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힘쓰고 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태마저도 소중히 여겨 풍수좋은땅에 묻는 우리 출산문화는 생명존중과 자연친화 사상을 담고 있다. 우리의 정신적 유형유산 가치를 찾아 앞으로도 역사학, 고고학, 문화콘텐츠학 등 다학제적 학술 활동이 태실 연구에 지평을 넓히길 바란다.
글. 강정인(궁능유적본부 궁능서비스기획과 전시큐레이터) 사진. 서헌강(사진작가)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23-2월 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