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 수요 시마당> 372
▢ 카프카즈 일기 19 / 시그나기Sighnaghi
전몰희생자의 명단이 새겨진 ‘전사자의 벽’
와인 경전에 자주 취한 그대 오늘은 한 잔의 술에 취하라 그리움이 많은 자는 청포도에 취하고 서러움이 흔한 자는 와인에 몸을 맡겨라 될 수만 있다면 포도주에 몸을 적셔 그대 몸에 묻은 죄를 씻으라 술잔을 든 자는 신도 간섭하지 않는다 한 알의 청포도를 따라 시그나기의 여름날도 되고 카프카즈의 눈보라가 되라 그리하여 청포도를 대하거든 사랑을 발견하고 와인이 말하거든 그대는 침묵하라 |
19. 시그나기Sighnaghi
인간을 위해 불을 훔친 죄로
카프카즈의 산중에서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며
죽는 날까지 형벌을 받아야 했던
저 신화의 땅 그루지아로 이동하는 시간
그루지아는 와인의 발상지이자
최대 생산국으로도 소문난 국가
국립공원인 라고데키에서 시그나기Sighnaghi까지는
두 시간가량이 소요되는 이동거리
우리 일행에게 주어진 이 두 시간은
이를테면 ‘백만송이 장미’로 이동하는 시간
이동하는 차량의 실내에 조용히 음악이 흐른다
‘Sighnaghi’는 ‘피난처’라는 뜻
‘피난처’는 동시에 ‘사랑의 도시’
그러니까 ‘피난처’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사랑의 노래를 듣는다
우리 일행이 듣는 노래는 ‘백만 송이 장미’
러시아 국민가수 알라 푸가체바Alla Pugacheva가
1982년에 발매한 음반인 '백만송이 장미'는
조지아의 시그나기 출신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가
프랑스 출신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바탕으로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Andrey Voznesensky가
시로 쓴 것
우리나라에서는 심수봉에 의해
동일곡명으로 불려지기도 한 노래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피난처’인 ‘Sighnaghi’
옛적에는 전쟁으로부터의 피난처였으나
오늘날에는 와인의 도시로 더 유명하다
시그나기는 해발 구백 미터에 위치한 작은 마을
그러나 잊혀질 줄 모르는 마을이다
포도밭의 풍광이 수려하고
와인의 소문이 세상 끝까지 파다하고
철학자 솔로몬 도다쉬빌리의Solomon Dodashvili 동상이 근엄하고
알리아가 바히드Aliaga Vahid의 명성이 자자한 곳
알리아가 바히드의 두상은
번다한 저자거리의 한복판에 세워져 행인의 이목을 끈다
두상은 조각가 라히브 하사노브가Rahib Hasanov가 조각한 것
알리아가 바히드는
가젤gazelle과 숲의 신인 사티로스Saturos적
고풍스런 시 세계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19세기 그루지아 시단의 거장
독창적인 그의 시풍이 당대를 풍미했었다
바히드의 두상에 새겨진
그의 시세계를 상징하는 수많은 인물들
알리아가 바히드Aliaga Vahid의 두상이 세워져 있는
주위에는 저자거리가 형성되어 있어
항시 여행자들로 북적댄다
알리아가 바히드Aliaga Vahid의 두상이 있는
맞은편 돌담의 벽면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에 강제징집 돼
사망한 병사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이른바 ‘전사戰士의 벽’이 있다
정교하게 새겨진 목각의
영웅적인 전몰희생자의 명단과
그루지아를 보호하는 거대 세계수世界樹와 그 수호신
그리고 신의 가호 아래 평화로운
그루지아 시민들의 집과 안락한 창문들과
세계수의 성스러운 나뭇잎들이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벽면의 바로 앞은 번다한 시장
인형들과 아이스크림과 목각의 세공품들
다종의 잡동사니들의 풍경 사이로
맥바디Mcvadi의 풍경이 군침을 돌게 한다
맥바디는 일종의 그루지아식 숯불꼬치구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전통음식이자
그루지아의 명물 먹을거리
흥청댄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
레스토랑과 게스트하우스가 많다는 건
이곳이 관광도시임을 드러내는 것
시그나기를 두고 그루지아 정부가
왜 ‘사랑의 도시’라고 하는지를 알 만하다
시그나기의 당나귀를 탄 의사 상
우리는 시그나기로 이동하는 동안
전원을 한가로이 누비는
얼마나 많은 양 떼와 목동들과
무심히 흐르는 강물들과
침묵에 잠긴 산하들을 목격했던가
풀잎은 평화롭고
허름한 집들의 행렬과
번다함을 잊은 주택들은 얼마나 조용하던가
국경을 넘어도 산맥은 분리되지 않는다
카프카즈는 아무리 달아나도 우리 뒤를 따라온다
인간의 변방을 지우며
설산의 눈이 녹은 강물은 뻘물이 되어 흐르고
풀잎과 수목들은 누구에게도
어디서 온 이방인이냐고 묻지 않는다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가난이 바쁘지 않다는 것은.
허름한 삶이 더없는 소박으로 비친다는 것은.
대처에 가까워지고 인구가 늘어날수록
삶의 각박함이 눈에 보인다는 것은 무슨 역설인가
그루지아는 조용하다
우리 가이드 마가Maga는 중년의 조용한 여자
그녀는 우리에게
그루지아가 세계최초의 와인 생산국임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루지아 와인 생산의 역사는
팔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고 했다
화석에서 포도 씨가 발견된 것이 그 증거라 했다
놀라워라
한적한 시골이
세계 와인시장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와인이 좋으냐고 그대 묻지 마라
좋은 와인도 없고
나쁜 와인도 없다
마시는 자의 마음을 따라 맛은 달라진다
사람이 술을 알기 전에
술이 먼저 사람을 안다
자신이 마시고 싶은 와인을 마셔라
그것이 좋은 와인이다
시그나기가 속한 카케티Kakheti 주는
그루지아 와인의 칠십 퍼센트를 생산하는 땅
소노르Sonore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나는 시그나기에서 와인 한 병을 샀다
술은 나에게 별보다 멀다
그러나 별보다 더 먼 와인을 나는 샀다
48도가 넘는 독한 자자와인Chacha Wine
그 빛깔이 너무도 투명하다
나는 그 투명한 술의 빛깔에
나의 하늘을 비추어보고 싶었다
술에 녹아 있는 그루지아의 가을하늘을 맛보고 싶었다
카프카즈의 눈바람을 음미해보고 싶었다
시음용試飮用으로 한 잔 주는 와인은
나의 식도를 뜨겁게 달구었다
내가 맛본 그루지아의 여름날은 매서웠다
지금도 나는 그루지아가 생각나면
카프카즈의 하늘빛을 술잔에 담아 마신다
겸허한 가난과
소박한 산야와
굴곡 많은 이국의 계절을 마신다
(이어짐)
첫댓글 자연 곳곳에 숨어 있는 전쟁의 역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가는 현시대가 고마울 뿐입니다. 당시 전쟁속에서 숨져가야했던 젊은이들의 피가 오늘날을 마늗ㄹ고 있다고 보여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