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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묵상글 ( 성령 강림 대축일. - 바뀐다면 무엇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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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 강림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바뀐다면 무엇이?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주님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성령 강림으로 믿게 되었고
믿게 되자 하느님 능력에 의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가장 큰 변화는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불신이란 다른 가능성에 대한 불신입니다.
내가 알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믿는 것 이외의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신이란 자기를 지극히 믿는 것이고,
자기만을 믿기에 타자는 하느님조차도 믿을 수 없고
자기가 강하기에 자기를 강요하지 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으니까 이렇게 하라고 오히려 요구합니다.
자기가 너무 강하여 성령께서도 뚫고 들어가시기 힘들 정도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내게 오심은 자기라는 껍질이 깨지고 성벽이 뚫리는 것이고
성벽을 사이에 두고 아군과 적군이 싸우듯 자기와 성령의 공방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깨지는 때가 곧 성령이 임하시는 때입니다.
자기가 깨지는 때가 뚫리는 때이기에 온갖 소통이 이뤄집니다.
먼저 성령께서 들어오시고
하느님의 능력이 들어오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오고
하느님의 사랑이 들어오고
하느님의 용서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인하여 다른 존재들이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다른 존재들이 내 눈에 들어오고
다른 사람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오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에 닿고
돌 같이 차던 마음이 따듯하게 반응합니다.
전에 내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은 침입이었으며
침입을 막느라 늘 전쟁이었고
평화를 깨뜨리는 침입자를 용서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다 괜찮습니다.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롭습니다.
전에는 도둑이 있어서 울타리가 있었는데
이제는 울타리가 없어서 도둑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듯
성령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입니다.
전에 담을 쌓고 살았던 이웃이 그리스도입니다.
전에 상처를 주었던 친구가 그리스도가 되고.
맨 날 싫은 소리만 하는 직장 상사가 그리스도입니다.
등 돌리고 자던 남편이 이젠 엠마오의 그리스도처럼 동반자입니다.
그리고 나의 입도 바뀝니다.
노상 잔소리만 퍼붓던 입이 칭찬도 하고,
독설을 토해내던 입이 성령의 언어를 쏟아냅니다.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 우리말이 있는데 맞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바뀌고 갑자기 바뀌면
그렇게 죽지 않으려던 내가 죽은 것인데
그것이 실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죽어도 좋으니 성령께서 내게 오시길 바라는 나입니까?
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모든 것이 다 바뀌지는 않더라도
한두 가지만이라도 바뀌길 원하는 나입니까?
그리고 바뀐다면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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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 강림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예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사도들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는 이동 축일입니다. 이로써 교회가 창립되었고, 선교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은 추수 감사절이었습니다(민수 28,26). 그런데 이 감사제가 후에 구원의 역사와 연결되어 시나이 산에서 이루어진 계약과 율법 수여를 기념하는 축제가 되었습니다(레위 23,15-21). 그래서 구약의 종교적 3대 축일은 유월절(파스카, 부활), 오순절(성령 강림), 초막절(추수 감사)입니다.
유다인들은 오순절 축제를 과월절 첫날부터 시작하여 7주(50일) 후인 시반 달(현재의 5월) 6일에 지냈습니다. 이 오순절은 초봄의 과월절과 늦가을의 초막절과 함께 순례 축제여서, 13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누구나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사도 행전은 오순절 축제 때 성령이 강림하였다고 전합니다(사도 2장). 이처럼 구약의 축일 오순절(Pentecost)은 성령 강림 축일과 필연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제 1독서 사도행전에서는 예수의 거듭된 약속과 예언이 실현되어,사도들과 유다인들은 성령 곧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받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데 이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이 재건됩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고 이 율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성했다면,승천 하신 예수께서는 율법 수여를 기념하는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어 성령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재건하십니다. 성령 강림을 묘사하는 데 나타나는 소리와 불의 이미지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나타나 드러나실 때 동반된 소리와 불의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이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영적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 이 두 이미지가 사도행전에 나타납니다.
오순절 사건에서 사도들은 성령에게서 권한을 받습니다. 사도행전의 성령 강림 이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원초적인 부활체험을 설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부활이라는 새로운 현실이 제자들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 변화는 제자들이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받고 하느님의 놀라운 행동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뒷받침되고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 이전에 있었던 모든 약속과 희망을 실현하는 예언자십니다. 이제 성령에 의해 봉인된 약속과 희망이 예수의 사도직 계승자들을 통해 세계의 모든 나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주님의 성찬에 관한 주제를 다룬 후에 영의 은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코린토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 즉 가르치는 은사,치유하는 은사,예언하는 은사,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등이 베풀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최고의 선물로 생각했고,다른 은사들은 그보다 못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오로는 이를 지적하면서 다양한 은사들은 모두가 같은 영,같은 주님,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어떤 은사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은사들이 서로의 유익을 위해 사용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성령 강림 대축일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와 평화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평화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용서하는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바라는 것이며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발뒤른에서의 성혈기적
독일 -1330년
이 성스러운 피의 기적이 이대로 숨겨진다면 주님께서는 이러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바로 이 피의 기적을 목격한 사제는 병이 들었고 마음 어느 구석에도 평온이 깃들지 못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자신이 숨긴 천에 나타나신,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하였다.
마음의 양심은 이 기적을 숨기지 말고 피를 흘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제는 더욱 더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고통이 점점 심해져서 마침내 죽음에 임박하게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해신부를 찾아가 변화된 지극히 거룩한 피와 천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를 모두 고해하였다. 그리고는 통회하고 개심하여 고해신부에게 자기가 죽거든 그 숨겨진 장소에서 피로 얼룩진 천을 꺼내어 사람들이 그것을 경배할 수 있게 해 주기를 부탁했다. 또 신자들이 천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미사 때마다 그리스도의 삶을 새롭게 하고, 열심히 우리 구세주의 피를 홈숭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 신부가 이렇게 모든 것을 고해하자 곧 마음의 평온을 느꼈으며 주님의 평화 속에서 임종하였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가 제단의 돌 아래에 숨겨 놓았던 천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아직도 피로 물들어 있었으며, 그 얼룩 한가운데에 여전히 11명의 가시관을 쓴 제자들에 의해 둘러싸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있었다. 신부가 체험하고 말했던 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었다!(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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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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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 강림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요한 20,22-23)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게서는 오늘도 갖가지 모습으로 저희에게 오시고 함께 현존하시며 동해하시지만, 특별히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성령께서 오시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놀라운 모습’, 곧 하늘에서 세찬 바람의 소리와 불과 혀의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고요한 모습’, 곧 닫혀 진 문을 뚫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숨결의 모양으로 들어오십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늘 문을 열거나, 땅의 문을 열거나 모두 ‘닫힌 문’을 열면서 벌어집니다. 곧 성령의 활동은 ‘문을 여는 일’을 통해 드러납니다. 곧 성령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닫혀 진 문을 부수고, 가려진 장막의 휘장을 찢고, 죽음에 갇힌 무덤을 풀며, 우리의 굳은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열리고, 닫힌 문은 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열리는 자리는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그러기에 다른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이 베풀어졌고, 우리는 이미 그분 신비체의 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신비체’는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몸은 바로 성령에 의해 지탱되고 존속됩니다. 그 지체를 서로 결합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평화”를 주시는 장면과 성령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협력자’이시오 우리의 ‘협력자’이신 ‘성령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새 백성이 탄생되고, 새 시대가 열리고,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닫혀 진 문’을 열고 들어 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닫혀 진 문’ 뒤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문을 잠가 놓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닫혀 진 문’을 뚫고 들어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보통으로 표현하던 이 인사는 이제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인사가 됩니다. 이제 이 평화는 주님의 축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방황이요 두려움이라면, 예수님의 현존이 곧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으로 이제 공포는 기쁨으로 바뀌고, 혼란스러운 무질서는 질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공포와 두려움에 ‘닫혀 진 마음의 문’을 열고서,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평화의 전령’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요한 20,21-22)
이제 제자들은 평화의 도구,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이 주신 이 평화를 서로 나누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 이 평화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그런데 이 ‘평화’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우리가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이루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협조자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실 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원어의 번역은 ‘숨을 건네주었다’는 뜻입니다. 곧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모두 용서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를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주며, 그러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용서’를 통해,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할 때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먼저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감격스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승복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푹 젖는 성령강림절이 되길 바랍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와 평화의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이시여!
제 안에 흐르소서!
흐르는 골골에 찌든 떼를 벗기시고, 반역과 죄를 몰아내소서!
아픔과 상처 어루만지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소서!
멍들고 굳어진 마음 문지르시고, 접히고 구겨진 마음 펼치소서!
막히고 닫힌 마음 열치시어, 당신 숨결 흐르게 하소서!
새로워지고, 새롭게 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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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 강림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약속대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가져온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세미나를 하는 중에 또는 기도회를 하다 보면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알게 됩니다. 물론 성경을 읽는다든지, 성체조배 중에, 기도하는 가운데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을 느끼고 받아들이려면 영적인 삶이 꼭 필요합니다. 영은 영을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웃음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뜨거운 열기를, 어떤 사람은 시원한 바람으로, 어떤 사람은 온몸에 기운이 빠져 안식을 갖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의 어두움을 씻어내어 평화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어떤 이는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채워 주심으로, 어떤 이는 용서의 마음으로, 그렇게 미웠던 배우자가 사랑스럽고 더 잘해주지 못했던 동안의 부족함을 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무뎌진 마음을 일깨워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허물이 무엇인지를알게 해 주시고 마음의 정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채워 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성령의 역사는 오만가지 방법의 맞춤형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자매와 상담을 하였는데 그는 일찍 부모를 잃고 두 동생을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삶의 고달픔으로 웃음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벌을 내린 탓이라고 생각하였고, 마음에 자리한 하느님은 무서운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벌을 주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그리웠고 그 사랑을 느끼고 싶었고, 제발 한 번만이라도 사랑의 하느님으로 만나고 싶고, 기쁨을 회복하여 웃어보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는 중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너무도 평화롭게 한없이 소리 내어 웃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울고불고하는데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그 자매의 웃는 얼굴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맑고 밝은 웃음을 회복한 그가 얼마 후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혼인 청첩장을 보내왔습니다.
세미나를 받고 어떤 사람은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고 하는 분도 계시고……‘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러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미사참례를 그저 의무로만 했고, 짧은 미사를 가느라 어린이 미사에만 갔는데 이제는 미사에 맛 들여 매일 미사참례를 하고 영성체가 기다려지고, 말씀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욱이 성체를 모시는 기쁨이 너무도 커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사의 눈물도 흘립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세상 것을 우선시하던 마음을 천상의 삶을 그리워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불로 표상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우리 성당의 장점은 사도들의 후계자이신 주교님께서 자주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열정이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곰곰이 되새기시는 성모님을 통해서 다가오시기도 합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늘 “오소서 성령님, 새로나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역사를 이루시지만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만큼 그에 걸맞은 영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성령의 힘과 능력을 체험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갈라티아서에는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갈라5,22-23)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 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클레토스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리하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 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더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시지 못하십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미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시도록 그 장을 만들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함을 회복하십시오.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성령께서는 당신 은총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고 모든 부분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새로나게 하소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 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하소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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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 강림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기뻤습니다. 10년이고 20년이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주는 젖을 먹으면서 자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을 먹지 않습니다. 엄마도 아이에게 더 이상 젖을 물리지 않습니다. 아이는 이제 스스로 밥을 먹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독립된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승천’하셨을까? 만일 예수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은 엄마의 젖을 찾는 아이처럼 계속 예수님께 매달렸을 것입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예수님을 찾고, 기쁜 일이 있으면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승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느냐? 사람의 아들은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은 이제부터 젖을 뗀 아이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승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강림 대축일은 교회의 생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오순절 날,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이 되는 날입니다. 성령께서 불혀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내려왔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성령의 은사를 받아 저마다 소리 높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들의 말로 제자들의 기도를 알아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교회의 시대, 성령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 ‘숨’을 넣어 주셨습니다. 숨은 하느님의 영입니다. 숨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굳이 찾으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은 느끼는 것이고,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을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을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성령을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 불쌍한 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사람은 성령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는 율법을 많이 알았어도 성령과 함께 살지 못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사제는 제사는 지낼 수 있어도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갔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성령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성령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도를 많이 했어도 성령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교만과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들의 행위를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던 세리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뉘우쳤지만 절망에 스스로 목숨을 버렸던 유다는 성령과 함께 살지 못했습니다. 닭이 울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면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은 은사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구체적으로 7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는 우리가 받아들일 때,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성령이 주시는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따뜻함을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줍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풍성하게 열립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성령의 은사를 받아, 삶을 통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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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 강림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 중에 “머리핀 하나를 줍더라도 사랑으로 행한다면 한 영혼을 회개시킬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머리핀 하나 줍기가 어려운 일일까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담는다는 것은 꽤 어려워 보입니다.
길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줍는 분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고, 환경미화원이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모른 척 지나가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당 안에서는 종종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분을 보게 됩니다. ‘우리’ 성당이라는 생각에 사랑을 담아 쓰레기를 줍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당이 늘 깨끗합니다. 이것으로 끝일까요? 우리 성당을 처음 찾으신 분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성당이 너무 깨끗해서 좋아요.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분은 오랜 냉담을 하다가 성당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려고 성당에 들어갔는데, 너무 깨끗해서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쓰레기를 주우신 누군가로 인해서 한 영혼이 회개하실 수 있었습니다. 쓰레기 하나 줍는 것에 사랑을 담으면 많은 이가 회개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쓰레기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줍는다면 어떨까요?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을 담은 우리의 행동이 일상 안에서 펼쳐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동 역시 세상 끝까지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라고 길에 나가 선교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담기가 참 어렵습니다. 나의 편함만을 또 나의 이득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니 사랑은 항상 받는 것에만 집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다락방에 숨는 것이 아니지요. 세상에 나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다락방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그리고 용기를 주시는 협조자인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협조자 성령을 통해 용기 있게 세상에 나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사랑을 담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세례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우리는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말과 행동에 늘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이 아닌, 모든 영혼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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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오노레 드 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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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 강림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성령은 깨달음의 불꽃입니다.
성령은 정화의 불꽃입니다
뜨거운 용광로에 온갖 잡철을 넣어 정화된 철을 만들듯이 성령의 불꽃은 제자들의 부끄러운 과거와 영혼을 정화시켜 주었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 높은 자리를 다투고 배반과 두려움에 숨어 지내던 이기적이고 나약한 사람들이 성령의 은총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감싸안는 포용력을 지닌 사람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모두 한마음으로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서로 의심하고 세상에 동요되었던 그들은 성령의 은총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정의롭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상처를 감싸주는 붕대와도 같습니다. 병약한 영혼과 육체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죄를 씻어주심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깨달음의 불꽃입니다.
밝은 세상을 살다보니 빛의 고마움을 잊고 살아갑니다. 요즘에는 잠시 정전이되어도 너무나 불편한데 동굴 안에서 전구가 나간다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바위와 돌들, 알지 못하는 동물이 튀어 나올지도 모릅니다. 두려움에 떨다보면 그제서야 앞 못보는 사람의 어려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스승을 잃은 제자들은 어두운 밤을 걷는 눈먼 사람들처럼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비틀거렸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성령의 불꽃은 새로운 생명의 길을 밝혀주었습니다. 우매했던 어부들에게 성령의 불꽃이 밝혀지자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둥지를 잃은 꿀벌떼처럼 갈길을 몰라 절망하고 있는 그들에게 성령의 불꽃이 내려와 하늘나라로 이끄는 사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어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도망쳤고 유다사람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숨어지내야 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으로 마치 영혼이 없는 주검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성령의 은총은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습니다. 다시 힘차고 열정적인 생명을 지니게 된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숨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어둠을 박차고 나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생명력은 놀랄만큼 빠르게 그들을 발전시켰습니다. 성령의 불꽃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전해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성령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불꽃이 존재할 때만이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둠으로 가득찬 세상에 성령으로 길을 밝혀 주실 때만이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방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은 적이라는 이기심때문에 서로를 비난하고 파괴합니다. 성령의 불꽃만이 파괴적인 마음을 순수한 영혼으로 회복시켜줄 수 있습니다. 순수한 영혼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시여, 저희의 내면과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순수하게 고칠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사도들을 변화시킨 성령의 불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나에게도 성령의 은총을 주신다면 나의 무엇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3. 내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키고 나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바른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의 나눔
1. 어둠은 물리적인 어둠과 심리적, 정신적인 어둠이 있습니다. 지금 나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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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 강림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 충만한 삶
-평화, 전례, 친교, 선교-
어제는 석가탄생일이었고 오늘은 교회탄생일인 성령강림대축일이자 청소년 주일입니다.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참으로 희망차게 하느님을 꿈꾸며 성령충만한 아름다운 시기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어제 읽으며 공감했던 대목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꿈은 나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꿈은 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가는 것이기에, 노년이 되어도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박진리 베리타스 수녀)
이어 지난 25일 있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인터뷰 대목입니다. 왜 교황은 어느 인터뷰등 마지막에 자신을 위해 기도를 청하는지 물었을 때의 답변입니다.
“신자들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목자들을 보호하십시오. 교구 사제든, 주교든, 어느 목자든 보호되어야하고 갑옷으로, 신자들의 기도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해, 나는 여전히 해야 할 많은 것들이 남아있음을 느낍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갈 때 여전히 해야 할 많은 것이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하나의 목표는 확실한데, 탈-성직주의입니다. 만일 당신이 ‘성직자(cleric)’라면 당신은 ‘목자(pastor)’가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주교들에게, 사제들에게, 내 자신에게 목자들이 되라고 말합니다.”
이 모두에 대한 답이 사랑의 성령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에서 꿈꾸는 삶이요 기도의 삶이요 착한 목자의 삶입니다. 참으로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단 하나 청하라 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저는 성령의 선물을 청하겠습니다. 성령안에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석가탄생일중 온종일 내린 봄비가 성령강림대축일 오전 한밤중에도 계속 내리니 메말랐던 대지가 촉촉이 젖고 있습니다. 완전 가뭄의 해소입니다. 그대로 양대 대축일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인 단비같습니다. 우리 메말랐던 마음들도 성령의 단비로 촉촉이 젖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토요일 저녁성무일도후 성가연습은 유난히 길었지만 참 흥겨웠습니다. 성령강림대축일의 전례는 얼마나 풍성한지 너무 은혜로운 내용들이 많아 성가지도하던 원장수사와 덕담도 나눴습니다.
“내일 전례가 너무 풍성하여 강론은 없어도 되겠습니다.”
“아뇨, 풍성한 전례에 강론은 30분 정도 하고 싶습니다.”
일주일 내내 성령을 청하며 불렀던 저녁성무일도 찬미가와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그리고 성령부속가는 얼마나 아름답고 감미로웠던지요! 인생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 대한 유일한 답도 성령의 은총, 성령의 빛뿐임을 깨닫습니다.
“1.창조자신 성령이여, 우리 맘에 임하소서,
고귀하온 은총으로, 모든 조물돌보소서.
2.우리들의 위로자며, 천주주신 선물이라,
온갖샘의 근원이며, 타는 사랑 주시도다.”
성령강림 대축일 저녁성무일도 찬미가 두절에 이은 화답송 후렴과 성령부속가 앞부분 일부를 나눕니다.
“하느님 당신 얼을 보내시고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오소서 성령이여,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없는이의 아버지, 은혜를 주시는이, 마음들의 빛이여,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흐뭇한 안식이여,
고된일에 쉼이여, 더위에 그늘이여, 울음에 위안이여,
지복의 빛이시며, 당신 신자들의 마음속 채우소서.”
얼마나 감미롭고 아름답고 사랑스런 성령의 선물인지 강론이 없어도 영혼 가득 채우는 성령의 은총 선물 같습니다. 강론 서론이 길었습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위한 성령의 선물을 소개합니다. 한결같이 공동체와 관련됨을 주목해야 합니다. 혼자의 성령 선물이 아니라 더불어의 성령 선물입니다.
첫째, 평화입니다.
무엇보다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 예수님의 성령이 공동체에 임하실 때, 두려움의 벽은 변하여 평화의 문이 되고, 마음의 태풍은 고요한 미풍으로 바뀝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제자들은 기쁨으로 충만해지니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세상 누구도 줄 수 없고, 빼앗아 갈 수 없는 성령의 선물인 평화와 기쁨을 지닌자가 영적부자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온갖 것 소유했어도 그 마음, 그 공동체에 평화와 기쁨이 없다면 불행합니다.
둘째, 전례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영성은 파스카 영성,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 그리고 전례영성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은총을 그대로 반영하는 전례의 풍요로움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그리스도를,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은 전례를 사랑합니다. 보십시오. 오순절 공동전례에 사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놀라운 성령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정말 신바람 나는 전례공동체입니다. 여기에 세상 곳곳에서 참여한 이들은 놀라운 사실을 고백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말로 듣고 있으니 어찐 된 일인가?”
마침내 그 옛날 바벨탑의 벌로 인한 불통으로 헤어졌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소통과 일치의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됐으니 놀라운 기적입니다. 참으로 공동전례 은총이 성령충만한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 치유와 평화, 찬미와 감사의 공동체를 만들어 줍니다.
셋째, 친교입니다.
성령의 친교, 성령의 일치입니다. 성령의 은총 선물이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어줍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고백할 수 있음도 성령의 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을 그대로 드러내는 친교의 공동체요, 성령의 은사가 단연 돋보입니다. 공동선을 위한 성령의 은사요, 이 성령의 은사가 친교의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다음 말씀도 성령의 일치 공동체임을 분명히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공동전례를 통해 새롭게 확인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넷째, 선교입니다.
성령과 선교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성령없는 선교, 선교없는 성령은 애당초 성립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선물과 동시에 성령의 사도, 평화의 사도, 용서의 사도로 파견되는 예수님 당대의 제자들이요 오늘의 제자들인 우리들입니다. 미사 끝나고 파견될 때마다 늘 되새겨야 할 다음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파스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창조자 성령이요 위로자 성령이요 치유자 성령입니다. 성령은총으로 위로와 치유받아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평화 공동체, 전례 공동체, 친교 공동체, 선교 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 모두 성령의 사도, 평화의 사도, 용서의 사도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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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 강림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자들이 소리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복음은 제자들이 숨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다 인들이 무서워서 말입니다. 그들이 숨을 죽이고 있던 이유는 죽기 싫어서였습니다. 사실 이해가 갑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신을 죽인다고 하면 겁을 먹고 도망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숨죽이고 제대로 소리도 못 내고 어두운 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렇게 단단히 걸어 잠근 문을 지나 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서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하시며 숨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숨을 못 쉬면 죽습니다. 길게 살아도 10분을 넘기지 못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죽어가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성경에 숨을 불어 넣어 주시는 장면이 또 있는데 어디에 있을까요? 창세기에 있습니다. 인간을 만들 때 마지막으로 하신 것이 바로 숨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바람을 불어 넣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신 행위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숨을 오늘 죽음의 공포에서 덜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렇게 성령을 받자마자 그들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새로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성령의 힘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구세주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제 자신들을 죽이려는 유다인들 앞에 나아갑니다. 그럼 그들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일까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두렵고 떨리지만, 그들은 의지로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아들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순간 주님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제 성령이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길 그래서 세상의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길 기도하겠습니다.
바람아, 멈추어다오.
바람아, 멈추어 다오
난 몰라 아아아
바람아 아아아아아
멈추어다오 바람아...
가수 이지연 님의 ‘바람아, 멈추어다오’의 일부분입니다.
얼마 전 밤에 산책하는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 때문에 눈에서 계속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 들었던 심정이 바로 ‘바람아, 멈추어다오.’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 걸음을 방해하는 바람도 멈추기를 기도합니다. 바람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기도합니다. 이 바람이 멈추거나 빨리 지나가기를 말입니다.
우리 삶 속에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가끔 바람이 불어 우리가 주님께 의탁하는 겸손함도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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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 강림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숨>
나의 숨을
뱉어내고
당신의 숨을
마심으로써
더 이상
나로 말미암아
내가 살지 않고
이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내가 삽니다
나의 숨을
뱉어내고
당신의 숨을
마심으로써
더 이상
나의 뜻을 이루려
내가 있지 않고
이제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내가 있습니다
나의 숨을
뱉어내고
당신의 숨을
마심으로써
더 이상
나는 없고
당신만 계시며
이처럼
당신만 계시기에
나마저 참으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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