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가다(수정)
“형제님은 참 정착을 잘하셨네요.”
점심을 먹는데 신임 그룹장이 내게와서 말한다. 내 말투가 서울사람이 다 되었다고, 어쩜 이리 말을 완벽하게 바꿨냐고, 칭찬하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한다.
2023년 새해를 맞아 북한이탈주민과 교회를 찾았다. 2019년 처음 정착도우미를 활동을 하며 만난 00이형. 지금까지 울고 웃으며, 호형호제하며 지내고 있다. 새해 첫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잘되었다. 안그래도 명절날 어디 갈데가 없는 사람들. 홀로 내려온 사람들에게 명절날, 교회만큼 좋은곳은 없는듯 하다.
풍요속의 빈곤이라 했던가? 명절날이면 그렇게 가족들과 친지들, 이웃들을 만나기 싫어하던 때가 있었다. 공부는 잘했는지, 어느 대학에 갔는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결혼은 언제 할 것인지. 여러 질문에 대해 매번 패배감을 느낄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의문의 일패를 당한채 새해를 맞는것이 싫어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던 시절이 있었는데, 북한이탈주민들과 함께 새해를 맞자니 괜히 미안해 지는 마음이다. 오늘은 내가 이들의 가족이 되어주기로 하고 새해를 같이 보낸다.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우님. 새해를 축복합니다.” 설날 명절, 항상 들었던 새해인사의 화답이 아니다. 명절 인사는 서로 복을 빌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들은 새해를 축하하고, 축복한다. 아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생각에서 일것이다. 이들은 유물론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니까. 어느 보이지 않은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다는 인사는 용납이 안되는 것이다.
남한과 북한의 설인사는 다르게 표현되어도 의미와 목적은 같다. 상대방의 앞길을 축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북한에서 ‘축복합니다’라는 텔레비죤극 하나가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북한의 청춘남녀가 새로운 짝을 만나는 로멘틱코믹물이다. 북한의 설은 양력설을 지킨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청춘남녀가 새해 하루동안에 짝을 소개하고, 오해하고, 극적으로 다시 만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새해 첫날 하루동안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자연스레 극중 나오는 인물은 연신 ‘새해를 축복합니다.’, ‘새해를 축하합니다’라고 인사를 한
다. 북한의 모든 영화는 ‘프로파간다’, 선전물이라할 수 있다. 이 영화도 분명한 목적을 담고 만들어 졌다. 영화는 북한의 인민들이 새세기에 어떠한 남성상과 여성상을 가져야 하는지, 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의 제목과 같이 그들은 우리의 MZ세대라고 할 수 있는 새세대들을 축복한다는 것이다.
“이젠 남한에 왔으니, 이렇게 인사해야 한? 아우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러한 인사를 받고 이들과 새해 아침에 교회를 가는것이 참 이질적이다. 평생을 ‘보이지 않는 신은 없다’고 하며 살아왔을 이들인데, 지금 교회에서 그 보이지 않는 신에게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안녕을 빌고 있다. 하지만 교회에서 이들의 모습은 내 눈에 이질적으로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알던 사람들과는 사뭇달랐기 때문이다. 앞에 앉은 교회의 신임그룹장이 많이 부담스러운가 보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는 통일준비위원회이라는 모임이 있다. 이 모임은 새터민이라고도 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착을 돕고 향후 통일을 준비하는 모임이다. 교회가 사회복지 차원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처음 남한 정착이 어려운 북한이탈주민에게 여간 유익한 모임이 아닐 수 없다.
이 교회에 오면 동향사람들을 만날수 있는가하면 생필품같은 지원까지 나오니, 새롭게 이주한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추천을 해 주고픈 모임이다. 이들의 10중 8,9는 직장이 없어 갈데가 없고, 기초수급자로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교회의 역할이 크다.
해가 바뀌며 새로운 그룹장이 이 모임을 이끌게 되었다. 여기의 구성원들은 인도자를 빼고 모두 북한이탈주민들이다. 이들이 교회에 출석한지 벌써 3년 이상된 사람들인데도, 아직 그룹장이 이 모임에서 나오지는 못한 모양이다. 북한이탈주민중 그룹장이 되면 위화감도 없고 좋으련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과거 하나센터의 0국장의 말이 떠오른다. “목사님, 북한이탈주민들 중 누구 한 사람에게 완장을 채워주면 안됩니다. 그들 중 누구 하나가 권력을 쥐면, 그 힘을 악용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역할을 주지 않습니다.”
동의는 할 수 없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에서도 북한이탈주민에게 그룹장을 시키지 않는것일까? 아니면 이들이 삶의 무게로 인해 여력이 없는 것일까? 해답을 찾지는 못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남한 사회는 이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기를 꺼리고, 북한이탈주민도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확실하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모임에서“0사장. 보란듯이 노래 한번 불러 보라.”호기 있게 노래를 권면하던 00이형의 모습도, 이 새끼, 저 새끼하며 뭇 남성들을 이끄는 여장부, 0사장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마을 모임할 때 그 배짱있게 말하던 사람들이 무엇이 조심스러운지 말을 아끼고 있다.
왠지 이러한 모습이 안타까워 분위기를 바꾸고자, 처음 본 사람들에게 내가 말을 많이 걸었었나? 가만히 나를 처다보던 신임 그룹장이 한 마디 한다. “형제님은 참 정착을 잘 하셨네요.” 내가 중간에서 말을 건넨것이 도움이 되었나보다. 내게 고마움의 표시로 칭찬을 해 준다. 이 말과 동시에 모든 사람들. 아니 북한이탈사람들이 깔깔깔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따라온 사람들. 00이형과 0사장이 신나서 얘기한다. “그렇디요? 정착을 참 잘했디요? 내가 정착시켰시요!”, “야이 니가 몬데 정착시켰니? 주둥아리 닥치고 가만있으라!” 한참을 재밌게 웃고 떠드는데, 그룹장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다. “집사님! 제가 사실 목사입니다. 지난해 교회를 사임하고 제가 정착도우미 했던 형님이 교회를 잘 다니는지 보고싶어 같이 왔습니다.”, “아! 목사님이셨군요!”
명절날 외롭지 않다는게 얼마나 큰 위로인가? 비록 윗동네 사람들이 가짜설이라 부르는 음력설에 ‘새해를 축복합니다’라는 말대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하지만 서로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은 탈북민들에게 큰 위안일 것이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마음의 빗장을 풀기위해서는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같은 동네 사람으로 나의 좋은 것을 나누려 한다면 먼저 우리의 기준을 풀어야 할 것이다. 마치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이주한 이웃들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말이다. 윗동네에서 온 사람들이 ‘북한이탈주민’이 아닌 우리 가운데 찾아온 또 하나의 이웃이라 생각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