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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Ⅰ. 서론
예배란, 하늘 보좌로 묘사되는 영광과 위엄을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입니다.1)
이런 광대한 주제를 여기에 계신 분들보다 신앙 연륜도 부족하고 지식도 부족한 제가 다루게 되었습니다. 젊은 혈기 하나 의지해 이 자리에 섰으니 부족하더라도 부디 헤아리고 이해해주셔서 거룩한 도리를 세워나갈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도록 이끌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교회헌법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는 사도 바울의 명령을 부지런히 쫓아가야 하는 것이다. ... 연합의 끈을 이루는 그 법들을 준수함으로써 질서와 예의가 확립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사도의 당부의 말씀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2)
즉, 교회헌법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갖출 수 있게 해주는 여러 가지 성경적인 원리들로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교단헌법을 제일의 참고로 예배개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풀어 가겠습니다.
교단헌법에 의하면 교회의 최우선적 존재목적은 ‘예배’입니다.3)그러므로 교회가 예배에 최우선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아무리 선행과 선교가 왕성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기준으로서는 자격미달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목적과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 이십니다.4)이것이 앞으로 다루어질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전제입니다.
Ⅱ. 본론
교단헌법에 의하면 예배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찬송, 기도와 신앙고백, 성경봉독, 성경해석과 설교, 세례, 성찬, 헌금, 권징, 축복입니다.5)짧은 시간에 이 모든 것들을 다룰 수는 없기에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과 지금 행해지고 있는 예배 형태에 대한 검토 그리고 찬송의 순서로 내용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또한 본 교단은 칼빈주의를 표방합니다.6)따라서 저는 교단헌법을 비롯해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내용을 풀어가겠습니다.
1. 예배의 인식
본 교단이 신조로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하면 예배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해야 합니다.7)하나님 외의 그 어떤 대상도 예배 때 주목 받아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예배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이어야만 합니다. 그 어떤 구실과 핑계도 이 명백한 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의지하고 섬기는 자세로 예배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8)그리고 총회헌법은 이에 대한 구체적 실천사항들을 몇 가지 열거해 놓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목사가 낭독하거나 인증하는 성경 외에 다른 것을 읽지 말 것이다. 귓속말이나 출입하는 자에게 인사나, 곁눈질이나, 졸음이나, 웃거나, 그밖에 모든 합당치 못한 행동을 일체 금한다.9)
이런 실천 사항들은 예배(禮拜)를 한문으로 풀었을 때의 의미인 ‘예도 예(禮)’, ‘절 배(排)’ 즉, ‘예를 갖추어 절 한다’라는 의미를 잘 반영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께 함에 있어서 철저한 조심스러움과 엄숙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중요한 가르침이 성도들에게 잘 흘러가지 않는다고 느끼곤 합니다.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2. 예배모습에 대한 검토
첫째로 8월 23일 2부 예배 때 행해졌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한 묵념이 있었습니다. 강사 목사님께서 말씀선포 전에 회중에게 다함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해 묵념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셨습니다.
순간 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에 근거하여 분명히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0)하나님만을 위한 시간에명백히 성경에서금하는 일이 행해진다는 것이 제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쨌든 묵념은 행해졌고저는 주위를 둘러보며 대부분의 성도들이 묵념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고는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일은 참으로 특수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장로님께서 강사 목사님께 3부 예배 때는 묵념을 하지 말아주실 것을 부탁하셔서 이러한 일이 2부 예배로 국한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예배에 대해 바람직한 인식을 하고 있었고, 장로교가 정통적으로 고백해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육받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둘째는 성도들이 성가대나 특송을 부른 지체를 향해 거침없이 손뼉을 치는 것에 대해서 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리는 것이라고 말씀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 3가지 이유로 인해 이는 합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1. 성경에는 성도가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린 예가 없습니다.
2. 성가대를 비롯해 특송을 했던 지체들은 박수를 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만을 향한 박수가 아니라 명백히 성도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3. 손뼉 치는 불협화음이 예배 분위기를 소란하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박수를 금하거나 박수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 찬송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는 식으로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절기마다 예배 때 말씀시간을 줄이고 뮤지컬이나 연극을 하는 것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부활절이나 성탄절에는 예배 때 말씀시간을 대폭 줄이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합니다. 예배의 순서에 연극 또는 뮤지컬을 넣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분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뮤지컬은 연극과 유사한 것이므로 연극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연극이란 ‘배우가 연희(演戱) 장소에서 희곡 속의 인물로 분장하여 관객 앞에서 몸짓과 대사로써 만들어내는 예술’입니다. ‘관객 앞에서’ 라는 표현을 주목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배에 연극이나 뮤지컬을 순서로 넣기 시작한건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부터 입니다.11)윌로우크릭 교회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벨스는 불신자를 기쁘게 하는 전도 목적의 예배를 구상하는 중에 예배에 연극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12)
따라서 애시 당초 관객 앞에서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극은 예배에서도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도입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장로교의 예배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로마 카톨릭의 연극식 예배를 비판합니다.13)연극식 예배란 분위기와 의식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음악과 설교는 장엄한 듯이 보이지만, 인도자는 연극배우와 같은 연기에 치중하여 신의식과 외경심이 결여되어, 순전히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 멋있는 예배입니다.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예배이지만,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회에 참석하거나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14)칼빈이 ‘연극’ 그 자체를 비판한 건 아니지만 이런 비판의 핵심은 예배 시에 행해지는 연극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 몸부림 쳤던 칼빈의 이러한 비판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소요리 문답에 의하면 일상적인 은혜의 방편15)은 오로지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지 분위기를 통한 감성자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6)
칼빈주의 신학자인 벌콥과 레이몬드도 이와 견해를 같이합니다.17)따라서 연극은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찬송의 수단도 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예배 때 행해지는 연극은 예배의 본질과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주의 7개문서 중18)하나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견해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쐐기를 박습니다.
98문. 그렇다면 형상들을 평신도들을 위한 책처럼 여겨서 교회에서 허용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말 못하는 형상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씀의 살아 있는 선포를 통해서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형상들조차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연극에 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또한 우르시누스는 제2계명이 예배의 순결성을 보존하기 위함이 라고 봅니다.19)
이뿐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에 정해지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20)A.A 하지는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취미나 유행이나 편의를 이유로, 성경의 분명한 보증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21)이는 루터가 로마서 8장 26절을 주석한 내용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22)우리의 즐거움을 하나님께 투사하여 하나님도 기뻐하시리라고 오판하는 오류를 범치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예배에서의 연극은 성경의 분명한 보증을 넘어서는 행위로서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이상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과 우리에게 적용해야 할 바들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다음으로 찬송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3. 찬송
찬송(讚頌)의 낱말을 그대로 풀어보자면 ‘기릴 찬(讚)’, ‘기릴 송(頌)’ 으로서 음악적인 요소를 담아 시적인 표현으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기리는 것이 바로 찬송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리는 가사나 곡이 아니라면 결코 예배 때 사용하면 안됩니다.
많은 청년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찬송을 은혜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 느껴지는 일시적 감정상승과 은혜는 구별되어야 합니다.23)‘은혜 받음’ 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은 기술로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죄를 깨닫고 낮아지며,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끌림을 받고, 그의 형상을 본받게 되며, 그분의 뜻에 복종케 되고, 강건케 되어 시험과 부패에 빠지지 않게 되고, 은혜 안에서 세움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하여 죄인들의 마음이 거룩함과 위로로 굳게 세워지는 것이다.24)
교회가 정통적으로 고백해온 은혜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교회가 가르쳐 온 은혜에 따르면 ‘긍정의 힘’만을 말하는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참 신앙과는 무관한 맹목적 긍정과 형통한 인생만을 말하는 그의 메시지는 참으로 사람을 신나게 하며 은혜받은 착각에 빠지게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메시지에는 죄와 자기부인과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25)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주지 못합니다. 이런 조엘 오스틴을두고 이단만큼이나 기독교에 해를 끼치는 인물이라고 비판한 옥한흠 목사님의 발언은26)충분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마이클 호튼은 조엘 오스틴을 어거스틴주의27)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당한 펠라기우스주의28)계통으로 봅니다.29)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 B.B 워필드와 함께 3대 칼빈주의 신학자로 불리우는 헤르만 바빙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자를 허락하심이 진리를 보존하고 선포되도록 하기 위함 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이 진리가 직분자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30)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이러한 뜻에 일치하여 성경교사인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참된 진리들을 잘 분별하고 깨달아야 할 의무가 있겠습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참된 은혜는 성령님의 조명하심에 따른 진리의 깨우침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 근거하여 신학자들은 은혜의 방편을 말씀, 기도, 성례 등 이 세 가지로만 제한하였습니다. 이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백히 은혜가 임했기에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찬송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한 예가 없습니다. 오직 찬송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으로서 표현되었습니다.
교단헌법은 찬송의 자세에 대해서도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31)찬송의 자세들 중 현재 우리에게 간과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뜻을 깨달으며 찬송을 부르는 자세입니다. 제가 보아온 청년들은 곡을 올바로 이해하는 과정 없이 감성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리고는 은혜 받았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점에 있어서 마치 제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씀 드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라는 곡이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이곡을 좋아하고 자주 부릅니다. 이 곡의 가사 중에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이제는 하나님 우편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왜 고통 가운데 계시다고 표현할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표현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청년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의미를 모릅니다. 이곡은 하나의 예일 뿐이고 다른 곡들에 대해서도 애매한 표현들에 대해 물어보면 제대로 답변을 못해줍니다. 부를 때는 그토록 거침없이 열심을 내어 부르던 청년들이 말이지요.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은 뜻을 깨닫는 건 배제 한 체 감성적인 선율과 가사에만 의지해 감정만 앞세워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뜻만 이해되면 찬송으로 적합하다고 말씀 드리는 건 아닙니다.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고백 없이 찬송을 부른 꼴이 된 것입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이러한 면에 있어서 크게 자유롭지는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어거스틴의 다음의 말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가슴은 지성을 요구하며 인간의 노래와 새들의 노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인간의 고유한 재능은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다. 지성은 반드시 마음의 감동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며 우리가 노래 부르는 것을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우리들 기억에 새겨 두지 않고는 불가능 하다."32)
특히 찬송을 감정의 움직임이 아닌 신앙고백의 기도로 보았던 칼빈은33)예배시의 찬송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조심스러운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34)이런 맥락에서 CCM을 예배에 끌고 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CCM의 예배에서의 사용에는 다음과 같은 불안한 요소가 있습니다.
1. 가사에 대한 신학적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 작곡가, 작사자의 신학사상이나 신앙이 불투명하다.
3. 예배의 정서와 맞지 않는 곡들도 다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위험한 요소는 상업성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분별하여 듣는 것은 무방하겠으나 여러 가지 위험요소로 인해 CCM을 예배의 자리로 가져오는 건 심사숙고해야할 사항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곡에 대한 이런 위험한 요소 때문에 교단헌법으로 규정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예배에서는 반드시 시편을 노래할 것을 요구합니다.35)칼빈도 예배를 위한 찬송을 많이 고민하였고 시편보다 완벽한 찬송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36)이는 당연한 결론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어떤 곡도 시편보다 완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백에 걸 맞는 멜로디와 고백에서 비롯되는 감정을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인격적 고백을 요구하십니다. 깨달음 없이는 고백도 없습니다. 마음은 지각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반응하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신령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칼빈은 이러한 과정 없이 단순히 감정으로만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드는 모습이라고 경고 하였습니다.37)그렇기에 김홍전 박사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도 하나님의 법칙에서 어긋나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신다고 지적하였습니다.38)
김홍전 박사는 히브리서 13:15에 근거하여,39)찬송을 제사로 표현합니다. 바른 찬송이란 각 제사들의 의미가 담고 있는 정신을 따라 예수님의 속죄 사실과 함께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다는 정신으로 부르되 성령님을 의지하여 부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40)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찬송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배에 생소한 곡을 도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겠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새 노래’라는 단어는 찬송을 일컫는 것이지 결코 최신곡이 아닙니다.41)만약 새로운 곡을 사용한다면 예배는 찬송을 고백하는 시간이 아니라 찬송을 배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는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명백한 잘못입니다.
마지막으로 찬송에 대해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예배 때 ‘찬송가’를 ‘격려가’ 또는 ‘찬송이 아닌 곡’들과 구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42)가령 찬송이 아닌 곡들로서 찬송가에 있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CCM 중에서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등을 예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목적에서 벗어난 이런 곡들은 예배엔 부적합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제 생각을 간단히 말씀 드리자면 찬송으로서는 교단헌법에서 정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라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 제일 좋겠으나 그것이 어렵다면 찬송가를 사용하되 예배의 목적에 맞는 곡을 신중히 선별해야 하겠습니다.
Ⅲ. 마치는 글
글을 준비하면서 느낀바가 있습니다. 예배의 개혁은 지엽적인 문제점과 형식들을 고쳐나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에 주목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주목한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몇 구절 읽고 오늘의 적용거리들을 찾는 Q.T 생활 이라기보다는 성경 66권이 일관되게 선포하는 하나님 중심 사상, 즉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터 마스터스는 1950년도부터 복음주의자들이 지도급 설교자들을 통해 로마 카톨릭에게 영향을 받아 바른 구원관이 위협받게 되었다고 진단합니다.43)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실 속에서 복음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고, 또 가르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44)하지만 사도 바울에게서 어거스틴으로, 어거스틴에서 칼빈으로, 칼빈에서 오늘 장로교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지켜온 진리를 가르치고 깨닫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본분이자,45)성도가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길이고 이것이 예배의 개혁으로 이어지는 바른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야 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주께 피조물 된 도리를 다하게 함으로써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해줍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가난하거나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상 예배개혁에 대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부족한 의견을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 예배 - (『영』 Worship; 『히』hdb][;명사 ‘아보다’ ;『헬』 proskunevw ‘프로스퀴네오’) “존경을 나타내다” 또는 문자적으로 “가치를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돌리다"라는 뜻이다. 헬라어로는 ‘경의의 표시로 부복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2) 칼빈, 기독교강요 4권 10장 27절
3)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대신)
1장 교회와 예배 - 제 1 조 교회
1.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은 신자들이 모이는 공동체이다. 이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예배와 그 외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데 그 존재 목적을 두어야 한다.
4) 제 3 장 예배 - 제 7 조 예배의 대상
신자들이 드리는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의 목적과 내용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드리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5) 제 11 조 예배의 요소
교회의 예배순서는 지교회의 권위로 작정하는 것이나 기본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이 한다. 1. 시와 찬송(골 3:16, 시 9:11, 엡 5:19) 2. 기도와 신앙고백(행 6:4, 딤전 2:1) 3. 성경봉독(행 15:21, 눅 4:16~17) 4. 성경해석과 설교 (딛 1:9, 행 9:20, 10:42, 눈 24:47, 딤후 4:2) 5. 세례(마 28:19∼20, 막 16:15∼16) 6. 성찬(고전 11:23∼28) 7. 헌금(행 11:27∼30, 고전 16:1∼4, 갈 2:10, 6:6) 8. 권징(히 13:7, 살전 15:12∼13, 고전 5:4∼5, 딤전1:20, 5:12) 9. 축복(고후 13:13, 엡 1:20)
6) 1. 본 교단의 노선 - 1. 신학적 교리적 입장
4) 우리의 신학은 개인신앙의 주관적 학적 표명(表明)이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회의 교회성을 본질로 하 는 교회신조 (敎會信條)에 의한 개관적 학적 석명(釋明)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칼빈주의를 표방 (標榜) 한다. 이는 우리의 신학이 칼빈 한 사람의 개인의 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의 신학적 입장 이 성경의 계시진리를 역사적 기독교회가 신조 또는 교회의 신학자들의 저술형태로 고백해 온 체계적 진 리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학은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동신조(共同信條)를 비롯하여 어거스 틴, 루터, 칼빈, 베자,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 17세기 개혁파교회의 신조들, 19세기와 20세기의 개혁파 교 회 신학자들에 의해 변증, 변호, 보존되어 온 역사적 기독교회의 정통적 입장이다.
7) 제 21 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2. 종교적 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오직 그에게만 드려야 한다.(1) 천사, 신자, 그밖에 어떤 피조물에게도 예배해서는 안 된다. (2) 사람이 타락한 후에는, 중보자 없이 또는 어떤 다른 중보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예배해야 한다.(3)
(1) 마 4:10; 요 5:23; 고후 13:13; 계 5:11∼14 (2) 골 2:18; 계 19:10; 롬 1:25 (3) 요 14:6; 딤전 2:5; 엡 2:18; 골 3:17.
8) 제 21 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1. 자연의 빛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하나님은 만물에 대한 주권과 통치권을 가지시고, 선하시며 만물에 대해 선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의지하고 섬겨야 한다.(1)
(1) 롬 1:20; 행 17:24; 시 119:68; 렘 10:7; 시 31:23; 18:3; 롬 10:12; 시 62:8; 수 24:14; 막 12:33
9) 제 3 장 예배 - 제 9 조 예배의 참석자
예배 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목사가 낭독하거나 인증하는 성경 밖에 다른 것을 읽지 말 것이다. 귓속말이나 출입하는 자에게 인사나, 곁눈질이나, 졸음이나, 웃거나, 그밖에 모든 합당치 못한 행동을 일 체하지 말 것이요, 어린이들은 각기 부모가 데리고 있는 것이 좋으니, 한 가족이 하나님의 집에 같이 모 여 앉는 것이 가장 마땅하며, 유년 예배회로 따로 모일 때는 당회의 지도대로 해야 한다.
10) 4. 기도는 합법적인 것과(1)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자나 이후에 생존할 사람들을 위해서 하여야 하는데,(2) 죽은 사람(3) 또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이 알려진 사람을 위해서 할 것이 아니다.(4)
(1) 요일 5:14 (2) 딤전 2:1,2; 요 17:20; 삼하 7:29; 룻 4:12 (3) 삼하 12:21∼23; 눅 16:25,26; 계 14:13 (4) 요일 5:16.
11) 박승범, “열린예배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비판”(미간행 신학석사학위논문,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2002), p32
12) 옥성호,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부흥과 개혁사 2008) pp220~222
13) 칼빈, 기독교강요 4권 10장 29절
14) 필립 샤프 “제네바 교회”(장수민 역 및 해설, 칼빈아카데미 2006) p162
15)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믿는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나야 마땅하다. 육체적 몸이 육체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양분 있는 음식을 필요로 하듯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령한 음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은혜로 성장하도록 하나님이 제공하신 신령한 “음식”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은혜의 방편”이라 칭한다. 로버트 L. 레이몬드, “최신조직신학”(CLC 2004) p1149
16) 문 88.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유익을 전하시려고 나타내시는 보통 방법이 무엇인가?
답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유익을 전하시려고 나타내시는 보통 방법은 그의 규례인데 특별히 하나님 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이것이 모두 그 택하신 자에게 효력이 되어 구원을 얻게 한다.(마28 : 19∼20, 행2 : 41∼42)
17) 로버트 L. 레이몬드 “최신조직신학”(나용화, 손주철, 안명준, 조영천 역, CLC, 2004) p1150~1151
루이스 벌코프 “벌코프 조직신학 개론”(박희석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p273~290 벌코프는 말씀과 성례만을 은혜의 방편으로 간주했지만 글 내용 전개상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
18) A. A 하지에 의하면 개혁주의 최고의 문서로 인정받는 것은 제2스위스 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영국교회의 39개조, 도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 문답, 소요리 문답 등 총 7개 문서이다.
19)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해설”(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p828
20) 제 21 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1. 자연의 빛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하나님은 만물에 대한 주권과 통치권을 가지시고, 선하시며 만물에 대해 선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의지하고 섬겨야 한다.(1) 그러나,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셨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 제한 하셨으므로, 하나님을 사람의 어떤 상상과 의향과 사단의 시사에 따라서, 어떤 볼 수 있는 표현이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2) 어떤 방법을 통해 예배해서는 안 된다.
21) A.A 하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해설”(김종흡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p357
22) 마르틴 루터 “루터의 로마서 주석”(박문재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p162
23)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서문 강 역, 지평서원 2004) pp139-140
24) 문155. 말씀이 어떻게 구원에 유효하게 되는가?
하나님의 영이 말씀을 읽는 것을,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것을 방편으로 하여 죄인들을 계몽시키시 고 확신시키시고 낮아지게 하시며, 그들을 자기 자신들로부터 몰아내어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 끄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며, 그의 뜻에 복종케 하시며, 그들을 강건케 하시 어 시험과 부패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은 은혜로 쌓아 올리시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하 여 그들의 마음을 거룩함과 위로로 굳게 세우시는 것이다.
(느 8:8, 행 26:18, 시 19:8, 고전 14:24∼25, 대하 34:18∼19, 26∼28, 행 2:37, 41, 8:27∼39, 고후 3:18, 10:4∼6, 롬 6:17, 마 4:4, 7, 10, 엡 6:16∼17, 시 19:11, 고전 10:11, 행 20:32, 딤후 3:11∼17, 롬 16:25, 살전 3:2, 10, 11, 13, 롬 15:4, 10:13∼17, 1:16)
25) 뉴스앤조이, 2008년 03월 20일 (목) "조엘 오스틴에게는 십자가와 고난이 없다"
26) 뉴스앤조이, 2008년 02월 04일 (월) “옥한흠 목사, '긍정의 힘'에 속지말자”
27) 어거스틴(354-430) :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신학적 종합자요 해석자라 할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보면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진리를 체계화 시키기 위해 칼빈이 어거스틴으로부터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칼빈주의의 바탕이라 할 수 있다.
28) 펠라기우스(354-420) :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인하고 자력구원을 주장하는 등 이단적 가르침을 전파하다가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당하여 파문됨. 412-430까지 어거스틴과 논쟁을 벌였음.
29)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김성웅 역, 부흥과 개혁사 2009) p319
30)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개요”(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p674
31) 제3장 예배 - 제 13 조 찬송하는 자세
하나님을 찬송할 때는 정성으로 하며, 그 뜻을 깨달으며, 곡조를 맞추어 주께 우리 마음을 다해야 할지니,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시에 또한 우리 음성으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옳고, 신자는 반 드시 찬송책을 준비하여 함께 찬송하도록 해야 한다.
32) 최시원, “교회음악에 관한 칼빈의 신학. 가을호”(서울: 교회음악사, 1983) p23
33) 칼빈, “고린도전서 주석” 14장 15절
34) 칼빈, “창세기 주석” 4정 21절
35) 제 21 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5.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 예배의 모든 부분들은 경건한 두려움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1) 건전한 설교,(2)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해 신앙, 존경을 가지고 말씀을 양심적으로 듣는 것,(3) 마음에 있는 은혜로 시편을 찬송하는 것,(4)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바로 실시하고 합당하게 받는 것이다.(5) 이 밖에 종교적 맹세,(6) 서원,(7)엄숙한 금식,(8)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9) 드리는 감사기도가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은 여러 시기와 여러 절기를 따라 거룩하고 종교적인 태도로 사용되어야 한다.(10)
(1) 행 15:21; 계 1:3 (2) 딤후 4:2 (3) 약 1:22; 행 10:33; 마 13:19; 히 4:2; 사 66:2 (4) 골 3:16; 엡 5:19; 약 5:13 (5) 마 28:19; 고전 11:23-29; 행 2:42 (6) 신 6:13; 느 10:29 (7) 사 19:21; 전 5:4,5; 행 18:18 (8) 욜 2:12; 에 4:16; 마 9:15; 고전 7:5 (9) 시 107:1∼43; 에 9:22 (10) 히 12:28.
36) Calvin, Theological Treatieses, Library of Christian Classic p53
37) 칼빈, 기독교강요 3권 20장 32절
38) 김홍전, “중생자의 생활”(성약 2007) p165
39)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40) 김홍전, op. cit pp166-169
41)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의 즐거움 때문에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말한다(시 33:3; 40:3; 96:1; 98:1). 이것은 보통 노래와 질적으로 다른 노래로 거듭난 사람만 부를 수 있다(계 14:3).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의 역사를 갈망할 때 부르기도 했고 하나님은 노래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다(시 50:23; 144:10; 대하 5:13-14; 20:21-22; 사 42:10). 새 노래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이유로 구원받은 성도가 침대에서도 부를 정도로 일상적인 것이어야 하며(시 149:4-5) 성도에게 주어진 능력과 영광이다(시 149:4-9). 새 노래의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시 96:2), 구원의 사실(시 96:2),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행적, 광대하심(시 96:3), 어린양의 구속(계 5:9-10)과 같은 것이다. <출처: 비전성경사전>
42) 기독교개혁신보, 2009년 09월 17일자 사설
43) 피터 마스터스, “하나님의 인도하심”(손성은 역, 부흥과개혁사, 2005) p217 피터 마스터스는 삶 가운데 거듭남의 표징이 없어도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등의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면 구원받은 참 크리스챤 이라는 거짓된 가르침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거짓 가르침들은 믿음에 대한 맹신과 함께 참된 믿음을 열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데 이는 교회 공동체의 순결성에 해가 되고 곧바로 예배의 순결성에 영향을 미친다.
44)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진단을 원하시는 분은 옥성호의 저서(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와 마이클 호튼의 저서(세상의 포로된 교회,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와 데이비드 웰스의 4부작(신학실종, 윤리실종, 위대하신 그리스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존 맥아더의 저서(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교회, 값비싼 기독교,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 양심실종, 구원이란 무엇인가) 등을 읽어 보시길.
45) 칼빈, 기독교강요 4권 1장 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