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66
1월10일[연중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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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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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HGOrMHd8xg (유상철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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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따뜻한 시선>
물 건너오신 명강사를 모시고 피정강의를 잘 듣고 있습니다. 매일 당일 복음으로 렉시오 디비나(聖讀)을 지도받고 있는데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강사 신부님께서는 매일 렉시오 디비나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노력을 해보라고 초대하셨습니다.
①복음 구절 안에서 예수님을 찾으십니다.
②발견한 예수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③예수님 안에 거룩한 휴식(sacred sleep)을 취하십시오.
④예수님이 되십시오.
⑤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이어서 두 가지 성찰작업을 추가로 부탁하셨습니다.
①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 표정이 어떤 것인지 묵상하십시오.
②예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내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내려주신 지침에 따라 복음을 묵상하니 결실이 참으로 풍요롭고 새롭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마침 회당 안에는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은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악령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악령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코복음 1장 24절) 악령 들린 가련한 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눈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봐야겠습니다.
2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바로 그 시선으로 오늘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옛날 회당 안 악령 들린 사람마냥 ‘뭔가’에 단단히 홀린 나, 하느님 아닌 엉뚱한 대상에 단단히 빠져든 나, 한 순간 자신을 통제 못해 언제나 돌아서서 크게 가슴 치는 나를 예수님께서 자비심 가득한 눈길로 내려다보십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악령에 사로잡힌 나, 죽음의 문화에 깊이 빠져든 나, 극단적 세속주의와 편리주의에 사로잡힌 나, 배금주의와 소비향락주의에 젖어든 나,
여러 가지 중독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옛날 악령에게 외치셨듯이 오늘 나에게 외치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복음 1장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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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d1__lYDH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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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징 없는 가르침은 진리일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 권위란 세속적인 자격증을 의미하지 않고 성령의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렇게 성령으로 이루는 일을 ‘표징’이라 칭합니다. 표징이 따르는 가르침이라야 진리입니다. 표징이 가르침을 진리로 만드는 권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은 그러면 진리가 아닐까요? 십계명은 진리일까요, 아닐까요? 누구에게는 진리가 되고 누구에게는 율법으로 머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7)
이 말씀을 따르자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아직은 진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오시는 은총으로 표징이 따라야 그 같은 가르침이 진리가 됩니다. 율법은 아직 밀과 같아서 물과 불, 그리고 소금으로 빵이 되지 않으면 진리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아무리 율법을 가르쳐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진리로 만드시는 그리스도를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표징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꼭 기적을 행해야만 표징이 아닙니다. 가장 큰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만큼 큰 표징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표징이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일인데 요한의 삶은 ‘인간이라면 저럴 수 있을까?’라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요한이 마귀가 들렸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런 면에서 누구에게나 표징을 베푸는 가장 큰 스승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공통된 ‘어머니’란 스승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항상 세례자 요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가르침은 가슴에 새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했을 때 영국의 한 신문사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친 교사들을 전수 조사해서 ‘위대한 스승들’이란 제목으로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은 처칠은 신문사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짤막한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귀 신문사에서는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는 제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학기인데도 선생님이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무료한지 여럿이 모여 모래 쌓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노인이 안타까운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선생님이 어디에 계신 줄 아느냐? 지금 곧장 집으로 돌아들 가거라. 그대들을 맞으러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사람이 자네들을 가르쳐줄 선생님이야.”
만약 저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의 표징이 없다면 저는 그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구약의 율법을 되풀이해서 신자들에게 들려주는 사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제 가르침에는 진리가 없을 것입니다. 권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가르침이 구원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내가 변하고 이웃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성령께서 함께하셔야 그 가르침이 자녀에게 진리로 스며듭니다.
나 자신이 성령의 은총으로 변화되고 표징을 일으킬 수 있을 때 가르침의 내용도 조금은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그러니까 분명 구약의 율법과 같은 가르침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권위를 뒷받침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라고 놀라는 것입니다. 권위는 표징을 말하고 그 표징은 자기가 가르치는 것에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 나오는 존 키팅 선생님은 가르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내용이 달랐다기보다는 무언가 달랐습니다. 성적을 올리려는 가르침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켜줄 수 있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현재를 즐기라 하고 변화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어쨌건 아이들에게는 참된 선생님이었습니다. 표징은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가르침을 주었기에 하느님 눈에는 하느님 나라 율법 학자입니다.
예전에 EBS에서 ‘선생님이 달라졌어요’란 프로그램을 하였습니다. 한 여 선생님은 아이들도 싫고 학교 오기도 싫습니다. 결국 자신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선생님으로 사는 것조차 맛을 잃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보다 먼저 출근해서 오는 아이들을 안아줍니다. 이러한 표징을 통해 같은 가르침이지만 아이들이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전에는 선생님이 도깨비 같다고 하고 악마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먼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면 가르침도 바뀝니다. 새로워집니다. 사람을 바꾸는 가르침이 됩니다.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로 무장하여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며 가르침에 합당한 표징도 일으키는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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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아바타 물의 길’을 보았습니다. 3D로 구현되는 화려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13년 전에 개봉되었던 전편의 주제가 ‘교감’이라면 이번에 나온 ‘물의 길’의 주제는 ‘순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생명들은 서로 교감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생명들은 삶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온 인간은 교감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서 행성을 파괴하고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지구에서 온 인간은 순환의 이치를 따르기 보다는 생태계를 파괴하고, 다른 생명을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바타 물의 길에서 원주민들은 서로를 환영하고 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대사가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교감한다면 우리는 멀리 있어도 서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교감하지 못한다면 가까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결코 자연을 파괴하거나 이웃을 파괴하거나 죽이지 못합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이웃을 죽이는 것은 곧 나를 파괴하고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바타는 화려한 영상으로 먼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서로 순환하는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서로 교감하면서 존중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신앙의 길 또한 우리가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길 또한 우리가 서로 교감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인류의 여정은 서로 교감하지 못하고, 스스로 연결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진보하는데 인류의 지성은 진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국주의는 판도라 행성에서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원주민들의 자원을 착취하였고,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았고, 노예로 팔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 같았지만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문화유산을 파괴하였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불평등의 사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내전과 독재로 많은 난민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작년에 시작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문헌 ‘복음의 기쁨, 찬미 받으소서. 모든 형제’는 교감과 순환의 질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감을 넘어 연민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걷게 해 주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5000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연민의 삶이었습니다. 그 연민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셨습니다. 그 연민 때문에 모욕과 수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 역시 교감을 넘어 연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순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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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b-28: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사도들이 호수를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의 악습을 버렸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절)로 갔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란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오심을 예상하였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다.
마귀들도 아드님을 뵙고 이렇게 외친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주님을 뵌 악마는 그분을 유혹하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이라고 말한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 뵈었지만 믿음이 없었다. 성경 말씀을 증거로 들이대어도 믿지 않고 예수 아기를 죽이려 했던 헤로데는 마귀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악마가 진리를 말할지라도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우리를 속임수에 빠뜨리기 위해서 진리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8,29)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 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라고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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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ㄴ-22)
여기서 ‘권위’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으로 해석됩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고, 그 힘에 압도당하면서 놀라게 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달리’ 라는 말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서는 그런 힘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또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말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말재주’였을 뿐이고, 삶으로 실행하지는 않으면서 말만 잘하는 ‘위선’이었을 뿐입니다.(마태 23,3)
그러니 율법학자들의 말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가득 들어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말씀의 힘이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삶’과 하나였고, 그 말씀은 곧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성령으로 가득 찬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의 말은 성령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 자기 지식이나 자랑하는 ‘빈말’이었다는 것이 됩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3-28)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느낀 ‘예수님의 말씀의 힘’이 그냥 느낌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이라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의 힘은 ‘살아 있는 힘’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에게 명령하시고 바람과 호수가 그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9.41)
예수님의 ‘말씀의 힘’은, 천지 창조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힘’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에도 “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마르 5,41-42) 예수님의 ‘말씀의 힘’은 바로 그런 힘, 즉 창조력이기도 하고, 생명력이기도 합니다.
마귀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복종한 것은 그 ‘말씀의 힘’에 복종한 일이기도 하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주권에 복종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예수님에게 ‘사람들도’ 복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들어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예수님 말씀에 복종한 일이 진짜 복종이었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복종으로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거역할 능력이 없어서 겉으로만 복종한 것일 뿐이고, 실제로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떠났습니다.(루카 4,13) 즉 참된 복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귀라는 것들은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하느님과 예수님께 반항하고 반역하는 존재이고, 이미 파멸이 예정된 존재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마귀들에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도 기회도 자유도 안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는 선을 선택하고 실행해서 공로를 쌓을 수 있는 능력이고,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6)
이 말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으면 심판과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겁을 주는데, 무서워서 순종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선택의 자유가 될 수 있는가?”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다음 말씀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요한 3,19)
“이 길이 살 길이고, 저 길은 죽을 길이다. 제발 이 길로 가라.”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죽을 길’로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아담과 하와 때부터 그랬습니다.)
심판과 멸망을 예고하는 말씀은 겁을 주거나 위협하는 말씀이 아니라, ‘살 길’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의 호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주는 구원과 생명을 받아 누리라고 우리에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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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카파르나움으로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가르침의 세부 내용은 언급되지 않지만, 사람들의 반응으로 이를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합니다.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사건은 예수님의 권위가 무엇인지 설명해 줍니다. 악령은 외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랍니다. 그리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적 권위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모든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의 신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기적도 가르침이라고 전합니다. 기적은 눈앞의 놀라운 사건을 넘어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하여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사람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더욱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고백은 악령조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우리를 향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그분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도록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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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신학생 시절, 방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오면 동창생들이 함께 모여 방학생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 번은 시골 본당 출신 친구가 겨울방학 동안에 마귀 들린 여자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본당에 마귀 들린 여자가 있어서 많은 교우가 기도해 주려고 갔는데 이 여인이 메가톤급 신자들의 비리를 폭로해 모두를 혼비백산시키고 본당은 초상집과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마침 그 시기에 동창생이 방학을 지내러 내려가니 신자들은 크게 반기며 “우리 학사님이야 순결한 분이시니 마귀 들린 여자를 대적할 수 있겠지!” 하더란다.
다음날 신자들과 함께 그 여인의 집을 방문했다. 신자들이 여인에게 신학생이라고 소개한 후 함께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동안 내내 이 마귀 들린 여인이 뚫어지게 자신의 눈을 쳐다보며 무슨 비리를 찾는 것 같아 두려운 나머지 시선을 피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기억에도 희미한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어쩌면 그 여인이 마귀에 사로잡힌 부마자였다기보다는 인간적인 상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던 가련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세상 안에는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는 하느님의 빛과 은총이 역사하시는 반면에 이에 저항하는 어둠과 악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주신다.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6절)
예수님 가르침의 권위는(22절), 그분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심을 단지 말로만 선포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곧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악의 세력과 싸우기까지 하심에서 나온다.
예수님은 단지 인간의 신체적 병만을 치료해 주시지 않고 인간의 근원적 병인 죄까지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사로잡고 있는 악령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해 주시는 구마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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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손질하던 어부 네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바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로서 시몬과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그들이 고기를 잡는 배와 그물은 버렸지만 사람을 낚는 배에 올랐다. 배의 이름은 ’복음선포 호(號)’이며, 선장은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선원들이며, 목적지는 하느님나라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복음선포의 항해(航海)를 시작한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항해 첫 하루의 일과를 들려준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복음선포 호가 카파르나움에 도착하였고,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예수께서 첫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에서 보낸 복음선포의 첫 하루를 일컬어 ’예수님의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9) 라고 한다. 안식일에 먼저 회당을 찾아가신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회당에 있던 악령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 회당을 나와 시몬의 집에 들러 열병으로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해 주셨고, 문 앞에 모여든 온갖 병자들과 마귀 들린 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이튿날 새벽에 홀로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다음 선교 장소를 향하여 닻을 올리시고 돛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루는 이렇게 흘렀다. 물론 안식일 하루에 이 많은 일을 수행했다는 점이 다소 과장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 안에 마르코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공생활 활약상이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는 곧 예수님 생애가 하루로 요약된 것인 셈이다.
예수께서 복음선포의 첫 하루를 카파르나움의 회당(會堂, Synagogue)에서 시작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나라가 망하고 유배생활을 시작하던 때부터(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하여 곳곳에 지어진 회당은 유다인들의 종교와 신앙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 회당에 들러 기도하였으며, 안식일에는 모두가 회당에 모여 야훼신앙을 고백하고, 오경과 예언서를 봉독하고 그 내용을 설교하였다.
안식일에 회당예배에 오신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어떤 내용의 가르침을 주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가르침의 권위에 놀라버렸다. 그 가르침의 효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경과 예언서를 바탕으로 율법과 조상의 전통을 가르치는 율사들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침의 권위는 오히려 악령 들린 사람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 예수는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움과 찬사를 보냈으나 예수를 믿지는 않았다. 악령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이는 믿음의 순종이 아니라 두려움의 복종이다.
따라서 사람들도 악령도 모두가 아직은 암흑 속에 있다. 진정한 믿음의 순종은 빛과 진리이신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며,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복음선포의 항해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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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강론시간이 가요 톱 텐이나, 뮤직뱅크 시간이 아닌데, 요즘 들어 가요를 자주 인용하게 됩니다. 안치환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 누가 뭐래도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 누가 뭐래도 ―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하아 햐
노랫말을 천천히 음미해 봅니다. 그런데,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 꽃이 사람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장미, 백합, 극락조, 초라한 잡초라 하더라도, 그 꽃이 저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노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 소중함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초라하게 보여도…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으로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고귀한 존재요,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귀함, 가치를 따진다면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사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사람의 우월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만이 최고요, 중심이기에 자연과 다른 창조물들을 훼손하고 파괴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최고’란 의미는 지배 피지배의 개념이 아니라, 소중함의 의미입니다.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요, 하느님의 숨결, 넋으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 외칩니다.
“나자렛 예수님,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떠나거라.” 꾸짖으시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에, 치유해 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묵상하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이 외침이 마음에 남습니다.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과 더러운 영, 곧 마귀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모상을 갖고 있고, 예수님의 숨결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관이 있습니다.
비록, 몸과 마음이 온전치 못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는 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도 예수님에게는 소중한 존재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에도 예수님께는 그러한 존재이기에… 구원의 대상이기에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으로 나약하고, 많은 잘못과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자신과 이웃들에게 실망과 아픔을 안겨준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아름다운 꽃으로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또한 시편 저자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인간을)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나이다.”
이러한 감사와 찬양과 함께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꽃보다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다짐을 드리며 새롭게 시작되는 연중 시기를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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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앞으로>
마르코 1,21ㄴ-28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그분 앞으로>
나조차
어찌 할 수 없는
나로 말미암아
도저히
그분 앞에
나설 수 없는
그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그분 앞으로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갈 때입니다
나
스스로는
버릴 수 없는
내게 스미어
죽음의 덫으로 옭매는
나의 무엇들을
그분께서는
말끔히
씻어내시어
마침내 오롯한
나로 만드시리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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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권위 있는 가르침>
오늘은 청주교구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소명에 감사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히 봉헌하는 삶이 항구하게 지켜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하느님의 권위가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마르1,21-22). 권위를 나타내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 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로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한 마디로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악령 들린 사람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거룩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며 내 뜻을 관철하고 이루려 안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권위 있는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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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의 사진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먹으면서 제 모습이 계속 변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갓난아기 때의 제 모습을 보고 지금의 저를 떠올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의 제 모습을 보고도 지금의 ‘저’임을 알기 힘들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격은 어떨까요? 성격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하긴 인간의 세포는 거의 7년 주기로 완전히 바뀐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포로는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7년 후의 ‘나’ 모두 완벽하게 다른 존재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계속 변합니다. 그래서 제가 잘 안다는 상대방 역시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잘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부부간에도 대화가 점점 줄어든다고 합니다. 지레짐작하고,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리를 둡니다.
변화하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못할 때 드러나는 증세입니다. 상대방이 변했다면서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를 진짜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권위로 가르쳤습니다. 율법에 쓰인 한 획 한 획만을 강조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율법에 구속된 것이 아닌, 당신의 말을 통해서도 더러운 영이 복종하는 권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권위는 바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신원에 대해 말하는 더러운 영의 말을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 나가라.”(마르 1,25)라고 꾸짖으십니다. 악의 틈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갇혀 있는 사람의 아들을 잘 아시기에 그 감옥에서 곧바로 풀려날 수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권위는 사랑에서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모든 변화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 하느님께 모이도록 이끌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권위를 우리 역시 갖춰야 합니다. 진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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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진정한 권위>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요즘은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걱정들입니다.
사법부의 권위, 통치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요즘 권위가 떨어진 것을 얘기함은 그런 권위를 말함이 아닐 것입니다. 스승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성직자들의 권위도 전과 비교할 때 별로 없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보다 스승과 성직자들의 권위가 사라짐을 걱정함은 이들이 바로 가르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이들의 권위가 있어야 이 길로 가던 사람이 저 길로 길을 바꾸고, 방황하던 사람이 마음을 잡고 올바른 길을 가며, 주저앉아 있던 사람이 다시 기운을 차려 일어설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멘토니 멘티니 하는 서양말이 요즘 유행입니다. 멘토Mentor는 단순한 지식전달자와 기술 전달자가 아닙니다.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고 중요한 순간 옳은 판단을 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너도나도 멘토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며 비판적으로 얘기하자면 스승을 깔아뭉개면서, 멘토가 없으니 멘토가 있어야 한다는 요즘 젊은이들이 우습기도 하지만 나이 든 사람으로서 그리고 수도자요 사제로서 반성적으로 얘기한다면 부모로서, 스승으로서, 성직자로서 우리 기성세대가 권위를 상실하였음을 마음 아파합니다.
부모는 부모답고, 스승은 스승답고. 성직자는 성직자다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직능적 권위,
권력적 권위,
직위적 권위,
주둥아리 권위는 권위가 아닙니다.
그다움으로 지니게 되는 존재적 권위.
실천하는 바를 가르치는 실천적 권위.
사랑으로 다가서고 이끄는 동반적 권위.
행복으로 행복에로 이끄는 행복한 권위.
이런 것들이 진정한 권위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뛰어난 권위는 영적인 권위가 아닐까요? 그런데 그게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악령들을 퇴치하는 그런 권위인가요?
그런 영적인 권위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영적인 권위는 없더라도 육의 영을 분별하고 부끄럽게 하는 영적인 권위, 그래서 지상이 아니라 천상을 갈망케 하는 영적인 권위만 있어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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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이신 하느님은 참 권위의 원천>
-“사랑밖엔 길이 없네”-
지금도 묵직한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한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어제 하늘병원에 진료차 들렸다가 원장님께 고백성사를 드린후 붉게 젖었던 눈시울을 잊지 못합니다. 참 순수하고 성실한 분으로 성인이 되시라 격려해 드렸고 강론집도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내어, 전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주인공의 영화 ‘탄생’에 이어 뮤지컬 영화 안중근 도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윤제균(마티아) 감독의 ‘영웅’을 봤습니다. 저는 주저없이 두분을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의 자랑스런 순교자로 꼽고 싶습니다.
특히 나문희가 열연한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역은 짧았지만 감동의 절정이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참 오랜만의 감동의 눈물이었습니다. 길다 싶지만 조마리아 어머니의 사형을 앞둔 안중근 아들에 대한 편지와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 노래를 인용합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마땅히 죽어야 한다면 딴 맘 먹지 말고 죽어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마라.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天父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어지는 조마리아 어머니의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라 울며 기도하듯 노래한 내용도 감동이었습니다.
“내 아들 나의 사랑하는 도마야
떠나갈 시간이 왔구나
두려운 마음 달랠길 없지만
큰 용기 내 다오.
내 아들 나의 사랑하는 도마야
널 보낼 시간이 왔구나
멈추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큰뜻을 이루렴.
십자가 지고 홀로 가는 길
함께 할 수 없어도
너를 위해 기도하리니
힘을 내 다오.
천국에 니가 나를 앞서 가거든
못난 이 에밀 기다려 주렴
모자의 인연 짧고 가혹했으나
너는 영원한 내 아들
한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너를 안아 봤으면
너를 지금 이 두 팔로
안고 싶구나.”
흡사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아드님을 향한 마리아 성모님의 노래처럼 들렸습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새삼 이런 어머니의 사랑의 권위는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권위임을 깨닫습니다. 윤제균(마티아) 감독의 인터뷰중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국제시장’이 아버지를 위한 영화였다면, ‘영웅’은 어머니를 위한 영화라 한다. 이 작품을 통해 어머니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나?
“2015년 간암 판정을 받고 2017년 6월에 보내드렸다. 1년반 동안 살리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결국 돌아가셨다. 더 효도를 못한게 너무 후회된다. 나문희 선생님이 노래를 부를 때 정말 많이 울었다. 돌아가시고 나니 더더욱 애툿하고 애잔하다. 내가 감독이 된다고 했을 때 감독은 배고픈 직업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에 대해 흔쾌히 응원해 줘서 고맙다. 엄마가 정말 그립다.”
저도 신마리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나이 들어 갈수록 더해 갑니다. 생각할수록 끝없이 이어지는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어머니를 그리며’ 고백시중 다음 대목이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슬프고 아픕니다.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 오신 내 어머니 ‘신마리아’
내 수도원 들어올 때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만하게 되었는데 또 고생길에 접어드느냐?’고
그러다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얘,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수도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사랑의 권위, 어머니의 권위요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입니다. 어제 주님 세례 축일에 이어 오늘부터 시작되는 연중시기 첫날 복음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일화입니다. 문득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 세례 받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 바로 여기 하느님 아버지에서 기원하는 예수님의 사랑의 권위, 섬김의 권위임을 깨닫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랑은 모두라 할 만큼 앞에 사랑이 붙습니다. 사랑의 기적, 사랑의 침묵, 사랑의 치유, 사랑의 신비, 사랑의 성사, 사랑의 순종, 사랑의 수행, 사랑의 관상, 도대체 사랑이 붙지 않은 참덕목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어제 주님 세례 축일 저녁기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은 얼마나 은혜롭고 아름답고 깊었는지요!
“묵은 사람을 세례의 물을 통해서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불멸의 옷을 입혀주신 우리 구원자께서 오늘 요르단강에 오시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도다.”
아, 이런 겸손한 사랑이 예수님의 참 권위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권위부재의 시대, 참권위가 목마르게 그리운 시절, 바로 참권위의 원천은 사랑의 하느님 아버지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가르침에 사람들은 몹시 놀랐고, 더러운 영은 소리 지르며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권위 있는 명령에 더러운 영은 혼비백산 달아났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 고백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 구나.”
심지어 더러운 영들인 마귀까지 하느님 사랑의 힘에 복종합니다. 새삼 사랑밖엔 길이 없음을, 무지와 허무뿐 아니라 마귀에 대한 답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뿐임을 깨닫습니다.
더구나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야 말로 영원한 천하무적의 구원의 영도자임을 히브리저자는 장엄하게 시편을 인용하여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권위의 힘은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실현됩니다. 이런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사랑의 일치야 말로 참권위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 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존엄한 품위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은 날로 깊어가는 파스카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시편8장의 오늘 화답송과 이를 바탕한 히브리서의 고백이 파스카의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참 신원을 밝혀 줍니다. 바로 우리 인간의 소명이 파스카의 신비안에서 충만히, 완전히 실현됨을 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사랑에 뿌리 내린 참권위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시편 8장의 화답송 시편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이 거룩한 주님의 파스카 미사은총이 이 고백대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권위있는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천사들 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시편 8,2-7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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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예수님의 권위!>
오늘 복음(마르1,21-28)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의 공적 드러남인 공생활(公生活)의 시작 말씀입니다.
공적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몹시 놀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하고,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복종합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더러운 영들도 복종시킨 예수님의 권위는 어떤 권위일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권위'입니다. 더러운 영들도 예수님의 이 신적 권위를 알아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가는 이들에게, 이 신적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제대로 믿고 따라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 신적 권위는 곧 성령이고,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안에서 나오는 권위입니다.
우리는 이 권위로 끊임없이 달라붙는 유혹을 이겨내고, 악과 싸워 승리합니다. 수많은 순교자들, 그들이 칼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기쁘게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힘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이 신적 권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탄시기를 마치고,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이라는 두 큰 축으로 이루어져 있는 전례주년 안에서 연중시기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땀, 곧 그분의 삶 전체를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감사와 함께 우리도 구원을 위해 땀을 흘려봅시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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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N_CEc-binJ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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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살맛을 느끼게하시는
예수님 말씀이
우리 삶에
울려퍼집니다.
새롭고 권위있는
예수님 말씀으로
새로 시작하는
연중시기의
첫날입니다.
새롭고도 권위있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를 누군지를
일깨워주어
우리를 기쁘게 다시
깨어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을
두려움으로 몰고갔던
더러운 영까지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십니다.
맑고 밝게
사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놀라운 가르침은
순명의 길을 내듯
우리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으로
잃어버린 신앙의
권위를 되찾아주십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군지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새롭고 권위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부여잡고 있던
집착을 내려놓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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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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