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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8
#사사기 #삼갈
사사 삼갈에 대해서는 성경에 단한구절로만 기록되어 있다보니,삼갈을 정식 사사로 인정하지 않는 해석이 종종 있어보인다.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사사기에 기록된 모든 사사들 중에서 삼갈이 가장 훌륭한 사사라 생각된다.사사기의 기록정황으로 봤을때,삼갈은 아마도 이스라엘에 이주해와 여호와를 섬기며 살던 이방인으로서,생업은 목자였던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때,모든 이스라엘은 나서서 싸우지않고 도망하기에 바빴을때,삼갈은 어찌보면 육적으로는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다 이스라엘도 도망치는 판국에 같이 도피하더라도 되었을텐데도,단지 소모는 막대기만을 들고서 분연히 일어나 블레셋 군인 6백명을 죽이는 성과를 올린다.삼갈이 막대기만을 가지고 창칼든 블레셋 정예병 수백명을 죽일수 있었던것은,그저 그의 무용이 탁월해서가 절대아니라 여호와께서 삼손에게처럼 삼갈에게도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셨던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훗에서 삼갈을 거치지 않고 바로 드보라로 넘어가는 사사기의 기록을 볼때,아마도 삼갈은 이 전투에서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거나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당시 이스라엘 족속의 신앙수준으로 봤을때 그는 이방인이라 하면서 마치 땅의 사람들이 죽임당한 하나님의 두증인의 시체를 둘러싸고 조롱하듯이 천대했었을 것이다.그러나 여호와의 영감을 받은 사무엘이 삼갈의 활약을 알게되었고 짧게나마 기록을 남김으로써,삼갈을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라 여겨진다.
#20190228
#간음
칼빈 선생이나 매튜풀은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죄 없는 자'를 원죄 관점에서 주석한다. 즉, 죄 없이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아무도 저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지칭하신 '죄'는 원죄와 같은 광범위한 죄라기보다는 '간음죄'를 지칭하신 것 같다. 즉, 모인 자들 중에 저 여인과 또는 아무 여인과도 간음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자가 있다면 그가 먼저 돌로 치라는 의미인 것 같다. 원죄와 같이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것에는 사람들은 별다른 죄의식을 갖지 못하지만, 간음 죄와 같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것에는 죄의식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전부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그런 의미 아닐까?
#20220228
#요한계시록 #Revelation 3:15
15 내가 네 行爲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願하노라
I know your deeds, that you are neither cold nor hot. I wish you were either one or the other!
Scio opera tua : quia neque frigidus es, neque calidus : utinam frigidus esses, aut calidus :
Οἶδά σου τὰ ἔργα, ὅτι οὔτε ψυχρὸς εἶ οὔτε ζεστός. ὄφελον ψυχρὸς ἦς ἢ ζεστός.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당신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었다거나 발람이나 니골라 당이나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랐다거나 했다는 것으로 책망하시지 않으시고 단지 그 교회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책망하셨다.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적어도 복음에 대한 잘못된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복음에 대한 바르고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교회로서의 복음 사역에 그다지 힘을 쓰지도 발전시키지도 않고 처음 받았던 것에 만족하며 교회를 유지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무릇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라면 처음 받은 복음에 안주하지 않고 더 넓고 깊게 복음을 알아가고자 힘쓰며 복음을 알아가는만큼 선행의 범위도 더 확장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처음 받았던 복음으로 자기들의 신앙에는 충분하다고 여기고 이보다 더 복음을 알아가려는 시도나 노력을 번폐스러운 것이나 그다지 쓸모없는 사변적인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수십년이 지나서 단단한 음식을 먹고 남들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젖이나 먹고 남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정도에 머무르면서도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는 초보적인 지식에 만족해 했던 것 같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보니 예배 설교는 성경해석보다는 설교자의 개인일상이나 경험에 대한 이야기나 세속적인 유행이나 예화들로 점철되었을 것이고 예배를 비롯한 교회 모임은 복음 사역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교인들의 사교모임 정도로 전락해버렸던 것 같다. 다른 교회 성도들이 복음에 대한 넓고 깊은 지식과 깨달음과 확신을 가지고 전도할 때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그저 사람들을 교회에 무조건 많이 데려다 놓는 것을 전도라고 여기면서 뿌듯해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과 핍박 등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다른 교회들은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신들의 힘에 부치도록 연보를 마련하여 도왔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저 체면치레로 마지못해서 얼마간의 재물을 구제용으로 보탰던 것 같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복음을 위해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은 자기들의 사회적 지위와 명망으로 봤을 때 격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하여 힘을 내서 나서지 않았던 것 같다. 에베소 교회가 거짓 교사와 사도들을 복음의 깊은 진리로 단호히 배격할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들에게도 예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관계를 유지해 나갔었던 것 같다. 두아디라 교회가 복음 사업을 확장시켜 나갈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사업은 자기들에게는 너무 버겁고 힘든 일이라 하여 그저 초기 단계를 유지시키는데만 급급했었을 것이다.
신앙이 차갑거나 뜨겁거나 해야 한다는 것은 선과 악, 좌와 우, 복음과 이단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기보다는 차가워야 할 때 차가워야 하고 뜨거워야 할 때 뜨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즉 신앙에서 차가워야 하는 요소로는 냉철한 지성을 가지고 복음의 원리와 체계를 제대로 잘 배우고 알고 깨달아 나가야 하는 것이고, 뜨거워야 하는 요소로는 배우고 알고 깨달은 복음의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실천하고 적용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불타는 의욕과 감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마다 지성과 감성의 발달정도와 성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신자들 중에도 지성에 치우친 신앙을 하는 사람이 있고 감성에 치우친 신앙을 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지성적 신앙인은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배우고 깨우치는 것을 좋아하는 한편, 감성적 신앙인은 무언가를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며 느끼는 것을 중요시한다. 물론 지성적 신앙인이나 감성적 신앙인이나 자신들의 성향에 지나치게 치우치게 되는 단점은 있지만서도 적어도 그들의 신앙이 형태는 아주 차갑던지 아니면 아주 뜨겁던지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성적 신앙인은 복음으로써 예리하게 분별하는 능력이 있고 감성적 신앙인은 열심을 불러 일으키며 하나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성적으로도 냉철하지 못해서 복음에 똥이 묻었는지 된장이 묻었는지 분별하지도 못하고 감성적으로도 의지와 감성이 뜨겁지 못해서 무언가를 합심해서 열정적으로 이뤄내거나 진행해 나가지도 못했던 것 같다.
#20200228
#창세기 #Genesis 38장.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뒤늦게서야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창녀와 잠자리를 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창녀에게 건네 준 담보물을 안찾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유다는 자기 대신 친구를 창녀에게 보낸다. 그러나 유다의 친구는 그곳에서 창녀를 찾아 수소문을 해보았으나 그 지역인들에게서 그곳은 창녀가 없다는 말을 듣고 그냥 돌아오게 되고 유다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그러자 유다는 자기 행위가 소문나서 창피를 당하게 될까 싶어서 서둘러 그 곳을 떠나게 된다. 유다는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자기가 섣불리 건네 준 중요한 담보물 때문에 한동안 전전긍긍 했을 것이다. 그 담보물은 자기의 신분과 모든 권리를 나타내므로 그 창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유다의 모든 소유를 가로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죄가 그러하지만 특히 7계명의 죄는 은밀하게 자기 몸에 짓는 것이어서 더욱 당사자의 영혼을 심란하게 한다. 애정이라는 미명하에 서로간의 육체의 정욕을 마음껏 즐기다가 혹시나 임신하게 되면 어쩌나, 가장이 되면 어쩌나 걱정한다. 그러다가 임신하게 되면 불법적으로 낙태를 하거나 출산 하더라도 몰래 아기를 유기하는 범죄도 짓게 마련이다.
그런데 당시 고대 사회의 창녀는 단순히 남자들에게 성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창녀는 '크데샤'라고 하는데, 이는 이방 종교를 섬기는 무녀로서 이방신을 섬기러 오는 남자들을 상대로 예물처럼 댓가를 받고 성을 제공했던 여인들이다. 한마디로 종교적 공창이었다. 따라서 유다가 '크데샤'와 성관계를 가진 것은 그저 7계명만을 어긴 것 뿐만이 아니라 1계명도 동시에 어긴 것이 되는 것이다. 추측하건대 당시 유다는 아마도 하나님을 믿은 상태였을 것인데도 옛사람의 성향이 여전히 너무나 커서 거의 구원에서 끊어질 정도의 심각한 죄를 한 번에 두 개나 범한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아무리 경건한 신자라 하더라도 매일 신앙으로 자기를 철저히 단속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심각한 죄에 빠지게 될 서 있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심각한 죄책감과 구원에서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영적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번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은 그들이 아무리 심각한 죄에 빠지더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철저히 회개하게 하시지만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너무나 크다. 따라서 가급적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신자의 지혜인 것이다.
또한 다말이 하나님을 믿는 여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정결한 여인이 음란한 창녀로만 변장한 것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이방종교의 무녀로 변장한 것까지 추가된다. 유다가 두가지 죄를 한꺼번에 지은 것처럼, 다말도 그러하다.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렇게 맘편히 지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에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간음하여 임신했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듣고서는 전후사정 따져보지도 않고 바로 그녀를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다말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유다의 담보물을 내어 놓으며 자기를 임신시킨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바로 시부 유다라는 더욱 충격적이고 막장드라마스러운 사실을 드러내고 만다. 그제서야 유다는 그 모든 것이 결국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시인하면서 그녀를 살린다. 아울러 다말이 자기로 말미암아 임신했어도 그녀를 자기 아내로 맞은 것이 아니라 더이상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해서 가까이 하지 않았다. 유다의 이와 같은 참회의 모습은 아무리 그가 심각한 죄를 지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그는 자기의 부끄러운 죄가 드러났을 때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다말에게 떠넘기지 않고 정직하게 시인하였다. 그리고 밧세바를 범한 다윗이 자기를 보살피는 수넴 처녀 아비삭과는 동침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윗의 조상인 유다는 더이상 다말을 아내로 취하지 않고 멀리 하였다. 이처럼 신자들도 숨기고 싶은 죄가 하나님의 섭리로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설령 자기가 지은 죄보다 더 심한 오해와 누명과 비방을 받게 되더라도 그에 항변하지 말고 잠잠히 그 모든 것을 자기 잘못이라 시인하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다말은 세속적인 방법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을지 모르나, 그 잘못된 방식에 대한 회개는 없었다. 육적으로는 그녀가 시부 유다보다 의로웠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했을 것 같다. 오늘날 교회들이, 직분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죄악이 이러하다. 겉으로는 교회의 유익과 안위를 위한다 하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그리스도의 뜻대로가 아니라 세속적으로 통용되는 불의한 방식을 도입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설렬 그런 불의한 방법을 외적인 교회의 물질적 풍요는 거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그저 비참하게 헐벗고 굶주린 장님에 불과하여 마침내는 그리스도의 입에서 토하여 내쳐질 뿐이다.
27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며느리 다말이 임신한 유다의 쌍둥 아들들도 에서와 야곱마냥 뱃속에서부터 투쟁심이 유별나게 강하였다. 심지어 태어날 때는 에서의 발꿈치를 야곱이 잡고 놓지 않은 것보다 더 심하게, 형이 먼저 손을 뻗었는데도 아우가 다시 그를 잡아 끌어들여 자기가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때 형의 손에 붉은 실을 묶은 산파의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었다면 형과 동생이 뒤바뀔 뻔 하였다. 그래서 동생의 이름은 형을 붙잡아 끌어당긴 행위를 본따서 베레스라고 짓게 되었다.
이제 막 엄마 뱃속에서 나오려는 베레스의 영혼에 무슨 판단력이 있어서 자유의지로 그렇게 형을 붙잡아 제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장자의 축복에 대한 신비하고 원초적이며 본능적인 영적 소망이 발동되어 그 갓난 아기의 육체로 나타난 것일 것이다. 어쩌면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 하나님을 선물로 받아 우리 영혼의 영에 모신 신자들은 베레스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령한 소망을 가져야 함을 보이시는 것 같다. 그래서 비록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죄악된 세상에 있어도 세상에서 안락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편함을 느끼며 어떻게든 복음으로 세상을 끌어당기고 제쳐서 이기라고 하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베레스의 육신의 투쟁의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신앙이라는 미명하에 주위에 악랄한 피해만 끼치는 신천지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우리의 투쟁은 이 땅의 육적인 방식이 아니라 복음에 기반한 경건함과 거룩한 행실로써 하늘의 권세 잡은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세상에 지극히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