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며 낯섦에 관하여
2020103177 무역학과 박예준
글에 앞서 먼저 고백할 사항이 있다면, 처음 주제를 듣자마자 게슈탈트 붕괴를 생각했다는 점이다. 교수님께서 직접 게슈탈트 붕괴에 관하여 집필하지 말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게슈탈트 붕괴에 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짚고 넘어가는 점은 ‘의미 포화’가 이루어지는 잦고 깊은 사유에 관한 관점으로 익숙한 낯섦에 대한 사유를 시작했음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게슈탈트 붕괴가 떠오른 이유는,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다 보면,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것들이 낯설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현상으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이것은 금하였고 나는 그 이유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게슈탈트 붕괴라는 이론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신조어에 가깝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결론에 이르러 이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
어떠한 문제를 깊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기틀이 될 단어들의 정의를 다시금 내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첫째로, 익숙함과 낯섦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나에게 던졌다. 일상생활에서 익숙함이란 보통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무언가이다. 반대로 만약 어떤 것에 대하여 부단히 생각한다면, 익숙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오래 지낸 친구가 갑작스럽게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다면,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공통된 반응으로 “얘가 왜 이러지?”라고 생각하고 익숙하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익숙함의 핵심 성분은 바로 ‘사유함’에 있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사용할 ‘익숙함’을 사유하는 것을 멈춘 상태로 정의한다. 반대로 ‘낯섦’은 사유하지 않았거나, 사유가 진행 중인 상태로 정의한다.
이어서 나는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를 오가는 행위가 무엇이 있는지 골똘히 ‘낯설어’ 보았다. 그러던 와중, 철학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철학의 특징과 형태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철학은 논리다. 왜냐하면 철학은 증명에 애쓰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칸트, 베이컨, 밀, 데카르트 등 수많은 철학자는 명제를 제시해왔다 명제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제와 증명의 과정이 필요하게 되며, 따라서 철학은 굉장히 논리적인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혹자는 모든 철학이 논리적이라면, 왜 철학이 제각각 다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의문은 굉장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논리와 진리는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할 뿐이다.
철학 서적을 읽어보면 철학자들이 반드시 행하는 행위가 있다. 이것은 토론과 논증에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것인데, 단어의 정의. 개념의 정립을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던 단어와 추상적 개념에 대해 깊게 사유하여 도출된 결과물이다. 철학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 시작하며 시작되었다. 단순하게 살아가던 인간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낯설게 생각하며 시작되고, 용병을 하며 살아가던 사람이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낯섦의 다른 접근을 하며 철학은 시작되었다. 따라서 나는 익숙하고 낯섦은 ‘철학’을 태동하며,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낯섦을 불러일으키고, 낯섦은 그것에 생기를 불러온다. 사유는 무언가를 정의하려 애쓰고, 낯설었던 무언가는 사유한 자가 붙여주는 특별한 이름이 생기게 된다. 그 무언가는 물건, 장소 등 유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념, 의식 같은 무형적인 것 또한 포함된다. 우리는 철학을 통해 생기를 불어넣는 마치 신과 같은 고귀한 행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사유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유하는 '낯섦'을 대입할 익숙한 무언가를 생각해보았다. 다시 말해 ‘철학’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가치와 권리로 정했다. 기초 교육 과정을 거치며 권리, 특히 기본권은 날 때부터 지닌, 불가침의 영역으로 교육받아왔다. 또한 권리라는 단어는 당연한 것, 보장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익숙함’이 있다. 두 번째로 가치는 값진 것, 영어로 Value이다.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에서 대부분 가치는 Price, 가격으로 재화로 나타낸 값어치를 생각한다.
이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가치와 권리의 비례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눈 사건인 임진왜란은 조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전기의 경우 고려보다는 여성의 인권이 낮아지긴 하였으나, 재산상속이나 족보 에 기록될 때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두지 않는 점 등을 미루어보아 불평등은 있었으나, 세간의 인식보다는 나은 실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등 큰 전쟁을 거치며 많은 남성이 죽었고, 물론 성리학도 여성의 가치 하락에 영향을 끼쳤지만, 상대적으로 남성의 가치가 오르는 현상이 발생했다. 또한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농노들의 수가 크게 감소하자 농노들의 가치가 오르는 현상이 발생했다. 두 사건의 결과는 남자와 농노는 더 많은 권리를 얻었다. 가치는 권리와 비례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우리는 사형수뿐만 아니라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이유인데, 이거에 대한 갑론을박은 팽팽한 편이다. 그런데, 이러한 토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측 입장에 판이하게 갈리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가치’이다. 권리를 빼앗자는 측의 입장은 범죄자들을 가치 없는 인간으로 인식하고, 권리를 그래도 보호해야 한다는 측의 입장은 범죄자들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고 인식한다.
그뿐만인가? 우리는 대체로 비싼 물품, 명품은 소중히 다루고 싼 물품은 무신경하게 다루는 편이다. 만약 싼 물품을 거칠게 다루지 않더라도, 비싼 물품을 신경써서 대하고 다룬다는 것에는 큰 이견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이것을 당연하고 ‘익숙’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가치가 아닌 가격이 높을 뿐인데, 그것들은 소중하게 여겨질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권리는 당위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가치에 따라 오는 후속적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Strength의 뉘앙스가 아닌. 무언가를 하게 하는 Force의 뉘앙스가 강하다.
따라서 나는 이번 사유를 통해 권리는 힘에 가깝고, 가치에 종속된다고 결론 짓게 되었다. 권리는 보통 의무와 동반되는 경우가 많은데, 의무 역시 무언가를 해야 하는 Forced 되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것 같다.
첫댓글 게슈탈트 붕괴를 쓰지 말라고 했던 이유는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의미 포화' 등등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할 경우 일상성이 파괴된다는 식의 설명인데, 주로 일본 애니메이션, 곧 재팬에니메이션에서 "기존 세계관의 무너짐", "파국"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철학하기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로 의미를 두지 않던 것에 대해서 의미를 되새겨봄으로써 그 존재와 가치, 인식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철학은 논리적 증명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만능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사실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서도 수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 해석학과 현상학, 그리고 언어철학, 심리철학 등의 분과가 등장하게 된 것도 그래서입니다. 권리 문제를 언급했는데, 유교의 사서를 영어로 번역한 제임스 레게는 도를 The Way, 덕을 The Power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도덕은 Moral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 찾게 되는 길과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