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늘 혼나는 아이였다. 아주 어릴 땐 바지에 오줌을 싸서, 조금 커서는 바닥에 물을 흘려서, 더 커서는 저녁밥을 늦게 해서. 소변이 나올 것 같으면 참았고 큰 컵을 잡기가 힘들어 물도 잘 마시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달려와 쌀을 씻는 등 혼나지 않으려 애썼다. 아빠의 화난 눈은 물건을 던지고 밥상을 엎을 핑곗거리를 찾으려는 듯 늘 내 뒤통수를 쫓았다. 엄마는 집에서 한참 떨어진 콩나물국밥 가게에서 일하느라 밤늦게야 돌아왔다. 그 모습이 지쳐 보여 힘들다고 투정 부릴 수도 없었다. 주눅이 든 나는 학교에서도 혼자였다. 깔깔대며 웃는 아이들 틈에 섞일 엄두가 나지 않아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면 구석진 곳을 찾아 없는 아이처럼 지냈다. 고등학교 1학년 무더운 날이었다. 아빠가 배고프다고 화낼까 봐 수업이 끝나자마자 내리막길을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다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교복 아래로 드러난 살이 아스팔트에 사정없이 쓸렸다. 피가 줄줄 흘렀지만 아빠가 무서워 계속 뛰었다. 칠칠맞지 못하게 넘어졌다고 주먹이 날아 올 것 같아 긴바지를 입어 상처를 숨겼다. 더운 날씨에 고름이 생긴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다. 며칠째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밥을 해야 했지만 일어설 기운조차 없어 결국 아빠에게 아프다고 말했다. 아빠는 밥하기 싫어 엄살을 피운다며 마시던 막걸리 병을 집어던졌다. 바닥에 쏟아진 막걸리를 치우려고 걸레질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깨어나 보니 응급실이었다. 아빠는 술에 취해 졸고 있었다. 엄마가 땀에 흠뻑 젖은 채 응급실로 뛰어 들어왔다. 의사 선생님은 백혈구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 급성 백혈병일 확률이 있으니 얼른 대형 병원으로 가라고 말했다. 기가 차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엄마는 주저앉아 통곡했다. 아빠는 내가 백혈병이면 진단금으로 보험금 1억 원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처음으로 나를 꽉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딸이 드디어 아빠를 살리는구나." 그렇게 환하게 웃는 아빠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백혈병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자 아빠는 평소보다 술을 더 마셨다. "그럼 그렇지.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아빠는 점점 더 무서운 사람이 돼 갔다. 나는 전보다 숨죽여 살았다. 그 속에서도 꿈이라는 게 생겼다. 술에 취한 아빠가 잠들 때까지 조용히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러면 쿵쾅거리는 심장이 진정되고 마음이 편해졌다. 잠깐이나마 행복했다. '그림을 그려 보자.'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아는 게 없었다. 대학생인 사촌 언니가 시각 디자인과에 가려면 입시 학원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학원비를 벌기 위해 8개월 동안 식당에서 일해 500만 원을 모았다. 학원에 6개월밖에 다닐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남들보다 열심히 배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빠가 식당으로 찾아와 말했다. 기가 막힌 투자처가 있다고. 한 달 안에 돈을 두 배로 불려 주겠다고. 아빠는 한 달은커녕 열흘도 안 돼 돈을 고스란히 날리고 술에 취해 들어 왔다. 처음으로 아빠에게 소리를 질렀다.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다음 날 집을 나왔다. 아빠도 미웠지만 나를 방치하고 버려 둔 것 같아 엄마도 싫었다. 너무 슬프면 눈물도 마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행히 사정을 딱하게 여긴 친구 부모님의 도움으로 옥탑방에서 지낼 수 있었다. 처음으로 아빠 없는 곳에서 편안하게 잠들었다. 학원에 다닐 순 없었지만 열심히 그림을 그려 시각 디자인과에 입학했다. 아르바이트와 학교생활을 병행하느라 힘들었지만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마음 터놓고 지낼 단짝도 생겼다.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가 간암 말기라 입원 중인데 한 번만 와 달라는 거였다. 슬프지도,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다. 아빠가 벌을 받은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이 고비라는 엄마의 말에 결국 병원을 찾았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한 아빠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만지면 부스러질 것처럼 보였고 눈도 양처럼 순했다. 아빠는 내게 손을 내밀며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갑자기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늘 미워한 아빠의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괜찮다는 말은 결국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빠는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고 나는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양말을 만드는 작은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업했다. 내가 디자인한 양말이 매장에 놓이자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고 움츠러든 어깨도 펴졌다. 오늘도 나는 편안하고 예쁜 양말을 디자인한다. 이 양말을 신은 사람이 행복한 길로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 삶도 새롭게 디자인 중이다. 힘든 기억을 덮고 그 위에 알록달록한 그림을 그릴 것이다. 마음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언제든 고쳐 그릴 수 있다는 걸, 내게 그럴 힘이 있다는 걸 믿어 보기로 했다. 송다해 | 서울시 강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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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
동트는아침 님 !
더울 때일수록 감기
조심하라던 옛사람들의
말이 떠오르는 늦더위입니다
오늘도
건강하게 지내시고
행복하세요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좋은 글 고맙습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
공유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