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윤회(輪回) 사상의 현대적인 적용을 통한 ‘나’의 확장 및 묵자(墨子)의 겸애사상(兼愛思想)의 새로운 의의
서론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 2012)에 따르면, 불교에서 ‘무아(無我)’ 내지 ‘비아(非我)’는 불교 자신의 윤회(輪回) 사상과 서로 모순되며, 불교계는 이러한 모순을 이전부터 마주하고 있었다. 윤회 사상은 영혼과 같이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남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의 핵심 주장인 ‘고정불변한 실체는 없다’가 논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윤회 사상이 당시 불교에 용인된 이유를 나라 야스아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인간의 생활, 사회는 부조리, 불합리한 것이다. 윤회 사상은 현세에서의 행복한 상태를 과거세의 자업(自業)에 의한 것이라고 납득하며, 동시에 현세의 바른 행위는 내세의 행복을 보증하는 것으로, 왜 선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의 윤리적 기반으로서 전승되고 있다.’(나라 야스아키, 2012, p.321)
즉, 현실 사회에서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써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불교는 인도의 민속 신앙인 윤회 사상의 효용성을 인정하였고, 불교의 중심적 논리에 배치되더라도 민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선’을 추구하게끔 묵인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대다수 인간이 국가의 역할과 적절한 교육을 통해 기존 종교가 유지하던 도덕적 기능이 상당 부분 보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윤회 사상과 같은 ‘자업자득’ 형태를 띠는 종교를 믿지 않고도 일상에서 법을 준수하고 최소한의 도덕성 정도는 유지 가능하게 되었다. 문제는 ‘악’의 영역보다 ‘선’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살인, 절도, 폭력 등 그 자체로 ‘악하다’라는 특성을 가진 것으로부터 항상 거리를 두나, 역설적으로 ‘선’ 자체를 추구하려는 경향 또한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 일례로 ‘선한 사마리아인 법’의 제정에 관하여 우리나라에서 논쟁이 이루어졌음을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방관’을 ‘악’으로 여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나, 문제의 본질은 ‘선을 행함’에 대한 동기가 부족하다는 점에 있다. 윤회 사상의 관점에서 누군가를 돕는 것은 선행을 함으로써 다음 삶에서의 윤택한 삶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일종의 추상적 보상이 뒤따라오는 반면, 현대 사회(종교인을 제외하고)에서는 선행을 하더라도 선행으로 인해 자신에게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걱정 등으로 이해관계에서 손익만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현대적 선행 동기 부재 문제를 영혼의 존재를 논하는 윤회 사상을 변형함으로써 현대적인 윤회 사상으로의 적용을 도모하고, 나아가 묵가의 ‘겸애사상(兼愛思想)’을 재해석해보고자 한다.
윤회 사상의 과학적 재해석을 통한 ‘나’의 확장
윤회 사상은 앞서 설명하였듯 불변하는 일정한 주체를 전제하여 그 주체가 업(業)을 다스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타자’를 분리하여 논하기 때문에 불교적 논리와 배치됨과 동시에 현대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를 윤회 사상이 내포하는 '주체'의 부정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본론을 논하기에 앞서 인간이 이타적 행동과 행복에 관한 연구(강철희, 김찬미, 길영인, 2022)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다.
‘심리적 요인이나 인구사회학적 요인과 비교해 보면 비록 그 영향력이 크진 않으나 이타적행동 요인 역시 일정 수준 행복에 긍정적 영향력을 지니는데, 이타적행동의 유형 중 기부와 자원봉사활동만이 유의미한 영향력을 갖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헌혈 및 혈장기부와 낯선 사람 도움과 같은 이타적행동은 행복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력을 갖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 각 요인에 속한 변수의 측면에서 정리해보면, 행복에 대한 영향력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변수는 심리적 요인에 속한 자율성이었다.’
정리하자면 자원봉사, 기부와 같이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한 선행만이 인간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자율성의 범주 안에서 선을 행하기 위해 ‘타자’와 ‘나’의 통합으로 ‘나 스스로를 돕는’ 행위로써 유도하여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윤회 사상을 과학적 관점에서 해석해 보았다. 해석에 앞서 필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인 ‘영혼’의 개념을 윤회 사상에서 배제하고자 한다.
인간을 이루는 요소는 주로 탄소, 산소, 질소, 수소 등 모두 우주의 변화 과정 및 별이 핵융합하거나 폭발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원소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 생성 원리에 따라 다른 이들과 물질적으로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탄생하며, 죽더라도 그 원소의 본질이 변형되지는 않으므로1) 다시 우주(자연)로 환원된다. 또한 환원된 이후에도 특정 형태를 취하고 다시 분해되기를 반복할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것은 물질이 우연히 지금 이곳의 ‘나’로 형태가 변질된 것이지, 타자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윤회 사상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세계의 구성원으로서의 ‘나’임은 동일하므로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적 차원에서는 사실상 동일하다. 이와 유사하게 불교에서 칭하는 ‘나’ 또한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상된 공(空)한 것으로 규정하는데, 과학적인 해석을 통해 불교의 ‘무아’와 윤회 사상의 모순점은 해결된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나’라는 것은 우주의 일부이자 우주 그 자체이므로 ‘나’와 ‘타자’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즉, 타인을 돕는 행위는 다른 형태의 ‘나’를 돕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위하는(섭식, 수면, 유희 등) 행위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나’의 의미를 확장하여 인식하면 선행을 단순히 보상을 위하여 행한 경우보다 상대적으로 ‘나’를 도움으로써 더 순수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1)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경우에도 그 우주적 본질에 있어 다르지 않다고 필자는 정의하였다.
맹자의 겸애사상에 대한 비판과 ‘나’의 확장을 활용한 반론
위에서의 ‘나’의 확장은 묵자의 겸애사상에 관하여 논한 맹자의 비판점을 반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정재현(鄭在鉉, 2014)에 따르면, 맹자는 묵가의 겸애를 인륜이나 실정을 무시한 것으로 보아, 묵가의 사상을 인륜을 부인하는 사상이라고 공격하였다. 맹자가 겸애사상을 비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또한 묵자의 겸애처럼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똑같이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를 부정하는 일로써 금수와 같은 것이라고 묵자를 비판하면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그래도 남는 힘이 있다면 남과 남의 부모를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견해를 펼쳐 보였다.‘(황성규, 2014) (孟子, 「등문공장구」 하: “墨氏兼愛, 是無父也,.無父…, 是禽獸也..” 재인용)
즉 맹자는 위 글에서 ’아버지‘를 별개의 실체로 간주하므로 필자가 논한 ’나‘의 확장을 겸애사상에 적용할 경우 겸애사상은 맹자의 비판점을 탈피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나에 대한 사랑‘이 확장되므로 인간 욕망의 해소에도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겸애사상은 현대적으로 새로운 의의를 가지게 된다.
결론
필자가 재해석한 겸애사상은 결국 다른 형태의 ’나‘를 ’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평등한 사랑을 가지기를 추구하며, 차별적 사랑은 결과적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므로 인간 본능에 의하여 거부감이 형성됨을 주장한다. 특히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적 면모의 단점은 '나‘의 범주가 축소되어 이기적 사회를 구성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나‘의 범주가 확대되었을 때 개인주의는 다른 형태에서의 ’공동체주의‘로 변모할 수 있으므로 겸애사상의 의의는 한국 사회에서 더욱 중요해질 것이며, 앞서 필자가 서술한 우리나라의 ’선행과의 거리감‘ 또한 해결 가능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재해석한 겸애사상을 필두로 각 개인의 감정적 연결과 공감,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철학으로서 냉랭해진 현대 사회의 방관적 태도를 타파하고 공존적 사회로의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참고자료>
나라야스아키. (2012). 특별 기고 : 불교에서 본 나,자아,영혼. 인도철학, 36(0), 308-330.
송방주(혜천스님)(Bang-ju(Hechun) Song). "불교의 인간관과 대화법에 관한 연구." 불교상담학연구 18.- (2023): 165-183.
강철희, 김찬미, 길영인. (2022). 이타적행동이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가? - 기부, 자원봉사, 헌혈 및 혈장기부, 낯선 사람 도움의 영향력 분석 -. 한국사회복지학, 74(4), 9-39, 10.20970/kasw.2022.74.4.001
황성규 ( Seong Kyu Hwang ). "중국철학 : 청소년 인성교육 덕목 개발을 위한 묵자의 겸애사상 탐색." 한국 철학논집 0.40 (2014): 225-246.
이경무. (2012). 묵자 겸애설의 의의와 한계. 철학연구, 124, 219-241.
정재현(鄭在鉉). (2014). 묵가(墨家) 겸애사상(兼愛思想)의 의미와 의의 ─유가(儒家) 인사상(仁思想)과의 비교─. 유교사상문화연구, 57(0), 33-57.
첫댓글 불교와 묵가, 그리고 맹자를 통해서 "겸애", 곧 "공감과 연대"의 문제를 논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우선은 원시불교에서는 과보, 곧 인과율의 법칙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윤회사상은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대승불교시기에 이르러서 힌두교의 윤회사상이 원시불교의 인과율을 통해서 불교에 들어오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부파불교시기부터 철저히 개인의 안심입명, 곧 깨달음을 강조해왔습니다. 인간의 실존적 한계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는 물론, 그 어떤 존재가 아닌 자신에 의한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과율의 법칙은 타자가 아닌 자기 집중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결과는 다른 누가 아닌 나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계급구조, 또는 내세를 통한 결과의 성취는 본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맹자가 겸애를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타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점을 역설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