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
1독서: 집회 27,30―28,7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2독서: 로마 14,7-9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복음: 마태 18,21-35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제목: 탕감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삶
1. 빈손으로 돌아가는 길
옛날 고려 시대에 나옹 선사(1320-1376)라는 스님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시가 있습니다. 많은 분이 노래로도 잘 아실 겁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흘러가는 구름처럼 화냄도 욕심도 다 내려놓고 살라는 이 말은, 오늘 독서인 집회서 말씀과 깊이 통합니다. 집회서는 인간의 복수심을 내려놓고 모든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분명히 이릅니다.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인데도 죄지은 사람은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집회 27,30―28,1)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던 옛 방식을 넘어, 성경은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는 너그러움을 가르칩니다. 가슴에 품은 분노와 미움은 남이 아니라 내 영혼과 몸을 먼저 병들게 합니다. 그러니 용서는 상대방이 예뻐서 베푸는 동정이 아니라, 미움이라는 족쇄를 풀고 내 영혼의 평화를 되찾는 결단입니다.
2.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질긴 미움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을까요? 집회서는 인생의 마지막 날을 기억하라고 일깨워 줍니다.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집회 28,6)
사람은 누구나 빈손으로 와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내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 보면, 살면서 움켜쥐었던 원망과 미움이 얼마나 부질없습니까? 흙으로 돌아갈 유한한 인간이 서로를 심판하며 증오를 품는 것만큼 헛된 일은 없습니다.
3. 우리는 모두 주님의 것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단순히 인생무상을 느껴서 체념하듯 용서하는 것을 넘어, 신앙인으로서 용서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짚어 줍니다. 당시 로마 교회 신자들은 음식이나 축일 문제로 편을 가르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다투었습니다. 그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누구의 것인지 그 밑바탕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우리가 이웃을 품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바로 ‘우리는 모두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밀어내고 싶은 그 사람 역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소중한 형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예수님만이 우리 모두의 참된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내 잣대로 형제를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참주인이신 주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입니다.
4. 끝없는 복수에서 무한한 자비로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용서의 부르심을 더욱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끕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당시 율법 교사들은 보통 세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가르쳤기에, 베드로는 크게 양보하여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계산법을 완전히 깨뜨리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 말씀은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라멕의 복수 노래를 완전히 뒤집은 선언입니다. 일찍이 라멕은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24) 라며 끝없는 보복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물고 물리던 복수의 사슬을 단칼에 끊어버리시고, 끝없이 용서하는 자비의 새 시대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왜 끝없이 용서해야만 하는지,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밝혀 주십니다.
5. 셈을 깨뜨리는 탕감과 용서의 삶
복음에 나오는 빚의 액수를 따져보면 주님의 뜻이 더욱 또렷해집니다.
동료가 진 빚인 ‘백 데나리온’은 일꾼이 석 달 남짓 일하면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반면에 임금에게 진 빚인 ‘만 탈렌트’는 차원이 다릅니다. ‘한 탈렌트’가 노동자가 십육 년 동안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육천 데나리온이니, ‘만 탈렌트’는 무려 육천만 데나리온, 곧 십육만 년을 일해야 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평생은커녕 몇 대를 이어가도 갚을 길이 없는 빚입니다.
만 탈렌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육십만 대 일’입니다. 만 탈렌트는 우리가 하느님께 거저 탕감받은 측량할 길 없는 죄와 은혜의 크기이며, 백 데나리온은 우리가 살아가며 이웃에게 입은 작은 손해나 서운함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갚을 길 없던 만 탈렌트를 자비로 탕감받은 종이, 고작 석 달 치 품삯 때문에 동료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엄청난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모습입니다. 이에 임금은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형제자매 여러분, 용서는 내 힘으로 생색내며 베푸는 시혜가 아닙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께 헤아릴 수 없이 큰 빚을 탕감받았음을 고백하는 신앙의 응답입니다.
내 마음속 앙금을 털어내고 이웃의 허물을 품어 안을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보게 됩니다. 주님께 받은 그 넘치는 자비를 기억하며, 참된 화해와 평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