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 5장 팔복의 산상보훈의 청취자
그리고 누가의 부자청년의 이야기에서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이라는 단어의 사용
(우선 줄거리를 알아야 부분을 이해하게 되므로)
( 이 말들은 어떤 분이 마4의 천국은 불신자가 회개하여 들어가는 천국이고 산상보훈의 천국은 이미 믿은 신자가 신자로서 살아야 들어가는 천국이라고 주장함에 대한 답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마4의 경우는 불신자에게 마5의 경우는 신자에게라는 이론에 대한 반대의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함에 해석의 지평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꼭 학자가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는 성도님들도 들어옵니다. 감히 예수님 당시로 가볼까요?)
앞에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예수님의 처음 외침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십니다. 먼저 말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이미 천국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앞서 세례요한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의 질문에서 세례요한 조차도 예수님이 가져오신 천국을 오해한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마태복음은 산상보훈에 이르기 전에 예수님의 사역을 간략이 서술합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이것이 왕의 임직식임도 밝혔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시고 사단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외침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리고 4명의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온 갈릴이에 두루 다니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이 복음전파에 늘 병행하신 것이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몰아내십니다. 이 사역은 천국이 현실적으로 임한 표징입니다. 이미 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천국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고 있습니다(여기서 종말론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범위가 넓어집니다). 이미 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도 귀신도 다스리시십니다.
그리고 4장 25를 보면 이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따라옵니다. 그 무리들이 산상보훈을 듣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어디서 온 것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제사장도 서기관도 여기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온 사람들은 그리 분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힘든 사람들이 그야 말로 전에 말한 것처럼 천국을 열망하는 이 고난과 고통의 삶에서 자신들을 건져줄 메시야로 말미암은 천국을 고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인지라 하나님을 압니다. 천국에 대하여 예수님과 다른 이해를 하지만 하여간 천국을 열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다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백성인가? 이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잘 알까? 잘 모릅니다. 소문을 듣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한 고백은 이보다 한 참 뒤에 마10장에 12제자를 세우시고 마16장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것을 알게 하신 분이 베드로 자신의 지혜나 혙통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알게 하지 아니고는 아무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다른 사람들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엘리야다 ! 세례요한이다! 선지자 중에 하나다! 예레미야다! 하고 말합니다. 16장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이 한참이나 진행된 다음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산상보훈의 청취자들이 회개하고 일차적으로 천국을 소유한 백성들이 듣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들이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아서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청취자가 제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헬라어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청중들에게 팔복의 주어들이 3인칭 복수입니다. 3인칭 복수 마카리오이 호이 프톡소이 ~~~ 등등
예)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 가 처음인데 여덟 번째도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이를 문예구조에서 봉투기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덟가지 복의 주인공들이 다 3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에 대항하는 2인칭 복수가 아닙니다. 여기서 팔복에서의 주어들은 <~~~들은>으로 3인칭 복수를 사용합니다. 제자들을 향한 너희들이 아니라~~
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 그냥 호기심에 온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앞의 4장에서 회개하여 천국을 소유한 그런 백성들로 볼 수 없습니다. 이 산상보훈은 아직 예수님이 산상보훈을 설교할 당시로 가면 천국을 소유하라고 초청하는 설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천국을 이 땅에 현실적으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자기들 앞에 와 있는 천국을 소유하라고 초청하는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나머지 6개의 복은 다 수동태로 받습니다).
<잠시 외출해서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참고하면>
요한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로고스찬가가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 .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 그 안에 생명을 가지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로고스를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다른 곳에서 아들이 있는 자는 그 영생을 얻었고 라고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여기서 생명은 요한복음 5/39에 의하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으려고 성경을 상고하는데 <그 영생>이 바로 <나 예수다>라는 말입니다.
한가지 더 말한다면 누가복음 18장의 부자청년의 경우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야기의 진전~~~~ 부자가 돈이 많으므로 예수님의 요구를 거절하고 갑니다. 이에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이 상호교차적으로 사용됩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구원이 같이 한 문맥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여간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영생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 을 얻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영생을 얻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구원은/ 영생을 얻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은/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첫댓글 그렇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입니다. 인간의 의지나 자랑거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공로주의 신학이야 말로 인본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감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넘보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천국이 이르기 전까지는 인간의 이런 시도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행될 것이구요. 그것이 사단이가 인간에게 교묘하게 불어 넣어준 의도이기도 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했던 모든것들이,..하나님의 인도요 보살핌이라고 고백하는것이 믿음의 고백인것이지,..구원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려고,.열심히 순종했다구 생각하면,.그 얼마나 피곤한 삶이 되겠습니까?...내안에 하나님 뜻대로 살아본적이 없는것 같은,.허물투성이요!!~죄많은 인생인것 같은데,.그래도 끝까지 나를 붙들고 계시는 그 은혜로 사는것입니다!!~~
위 내용 중에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를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라고~~
다음에는 저자 마태가 이 산상수훈을 기록한 목적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왜 거기서 거짓선지자가 언급된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곧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그리고 마태가 쓴 복음을 읽을 수신자들의 상태를 살필 것입니다. 유대적인 색채와 예수님의 복음의 색채가 같이 나타나는 이유를 밝히면 산상수훈이 규범인지 구원의 길인지 아니면 거짓선지자와 참 신자를 가릴 수 있는 표지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별로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은혜를 나누고 싶을 뿐인데~~~~한 번에 많이 싣기도 어려운 형편이라서~~ 이렇게 가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그냥 빠른 결론을 내리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본 것은 예수닝의 직접청취자이고요~~ 마태의 청취자로 넘어와야지요. 앞에 누가 개혁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아는지 모른다고 야단치는 댓글을 달았던데 지금 그것이 이 논의의 목적이 아니며 마 4- 시작하여 나타난 부분은 현재적으로 다스림이라는 단어하나로 이미 충분한데~~ 자꾸 논의의 방향이 흔들리려고 하네요. 부족하지만 이 글을 그냥 함께 성경을 펴고 보시면서 그만큼만 나가시면서 아 이런 견해도 있구나 하면 될 것같아요. 그리고 그 것이 맞으면 인정하시면 되구요
하여간 이 부분은 너무 양극단으로 해석하여서 문제가 많은 곳이지요. 이 번에 한 번 다시 보게 된 것을 감사하며 읽고 있답니다.
산상수훈이 팔복으로 시작되지요. 팔복의 시작은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이고요. 가난한 자는 거지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자신에게 내세울 것이 없으며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에 기꺼이 감사함으로 받는 사람이지요. 곧 인생을 찾아오신 하나님, 예수님을 통하여 찾아오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기꺼이 감사함으로 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산상수훈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 언약의 말씀이랍니다.
그 말씀을 직접 듣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믿는 자들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산상수훈 자체가 새 언약의 말씀이고 각 내용이 새 언약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팔복은 새 언약의 백성의 인격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는 구체적인 삶의 정황을 토대로 주어진 생활 원리이고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새 언약의 백성으로 그 인격을 갖추고 삶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지요. 그러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십니까?
참복음님 그들의 열매로 그 나무들을 알리라를 해석해보세요. 이 문맥과 연관하여 주석해보세요 그리고 끝까지 가면 알 것입니다. 부자청년의 스토리에서 영생 하나님의 나라 구원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군요.
산상수훈은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의 삶은 이러한 것이다"라는 것이지, 산상수훈이 "구원을 위한 필요조건"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참님의 주장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그런 자들이 늘 잊고 있는 사실은 구원에 관한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사실입니다. 행위로 구원얻는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서 타자의 주장들은 전혀 비성경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참님이구요.
그러나 참님이 알아야만 하는 사실은, 인간이 구원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빼앗아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에 자꾸 인간이 비집고 들어가 무언가를 한 것처럼 말하게 하는 사단의 본성적인 내용이 그대로 발현되는 주장이 알미니우스의 주장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을 대적하기 시작했을 때 루터란들과 가톨릭의 지원을 받아서 알미니안주의가 자랐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로서, 알미니안들은 가톨리즘과 떨어질 수 없는 인과관계에 있습니다.
가톨릭이든 알미니안이든 같은 나무, 같은 뿌리로 이해됩니다. 부연해서, 이와같은 인본주의 종교는 인간의 능력을 최고치의 값으로 선정하는 바벨탑 사건의 근저에서 자란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입김에 무너져 내려야 할 사단적 본성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