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訓民正音
[ Hunminjeongeum (The Proper Sounds for the Instruction of the People)]
요약 1443년에 창제된 훈민정음에 대한 한문해설서.
《훈민정음예의본(訓民正音例義本)》과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목판본으로 2권 2책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에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전자(훈민정음예의본(訓民正音例義本))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 첫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에 대하여는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모양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 책의 찾으므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원설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
(소리를 내는 신체 부분의 모양대로 글자모양을 만든 것 )였음이 밝혀졌다.
( 제자(製字)의 원리
가. 자음의 제자
우리 한글은 우주의 근본 원리인 오행(五行)과 음ㆍ양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다음과 같이 만들었다.
따라서, 자음의 순서는 ㄱㅋ/ㄴㄷㅌ/ㅁㅂㅍ/ㅅㅈㅊ/ㅇㅎ/ㄹ 이었다.
나. 모음의 제자
모음은 어머니(母) 마음과 같이 우주만물을 나타내는 천(天) 지(地) 인(人)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먼저 기본 모음ㆍ(하늘), ―(땅), ㅣ(사람) 3개를 만들고, 서로 교합하여 다음과 같이 나머지 모음을 만들었다.
따라서, 모음의 순서는 ㆍ― ㅣ/ㅗㅏ/ㅜㅓ/ㅛㅑ/ㅠㅕ/ 이었다.
다. 한글의 과학성ㆍ용이성ㆍ창의성
자음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뜬 상형원리에 의해 기본자음 6개를 만든 후에
획을 더해 새끼(子)쳐 나머지 자음(子音)을 만들고,
모음은 어머니(母)마음과 같이 우주만물을 품는 천ㆍ지ㆍ인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먼저 기본모음 3개를 만든 후에 서로 교합시켜 나머지 모음(母音) 8개를 쉽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기본자음 6개와 기본모음 3개를 색깔이 다르게 여러 개를 만든 후에,
제자원리 순서에 따라 글자 맞추기 놀이(Puzzle)식으로 가르치면, 3ㆍ4세 어린이도 재미를 가지고
한ㆍ두시간안에 아주 쉽게 배울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어린이들의 조립력과 창의력도 길러줄 수 있는
세계 최고ㆍ유일의 글자이며,
과학적 원리에 따라 만든 독창적인 글자이다.
라. 현재의 한글순서는 훈몽자회에 따른 순서임
1)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순서는
1933년에 제정된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해 정해진 순서(자음 :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모음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를 따른 것이다.
이 순서는 최세진이 1527년에 아동용 한자교습서로 만든 훈몽자회(訓蒙字會)를 그대로 따른 순서이다.)
후자는 예의(例義)·해례(解例)·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해례는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집필하였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천(李蕆)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에는
김태준(金台俊)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 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