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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 때, 일본헌병은 제암리 마을 남자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한 후, 교회당을 불 질러 21명을 학살하고, 마을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살해하며 초가 32채를 불태워 마을 전체를 폐허로 만든 비인간적인 일제의 포악의 바람이 할퀴고 간 현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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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성지는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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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읍성에는 감옥 터가 있고 그 옆에는 고문대로 쓰이던 호야나무가 남아있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 돼 있고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돼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어 전시돼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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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에 “ㄱ”자 형으로 지어진 교회로 지금까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하나뿐인 교회이다. 수십 개의 신흥종교들이 하나의 단지를 이루다시피 하고 있는 곳에 놀랍게도 일찍이 교회가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다 기울어져 가고 있던 1904년 무렵 미국의 젊은 선교사 테이트 (L.B.Tate) 목사는 사교가 우글거리는 이 금산리에 꼭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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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조덕삼이 먼저 마방의 손님인 테이트 선교사에 접근하였고 둘은 서로 많은 교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드디어 그는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테이트에게 말한다. “선교사님, 앞으로는 저희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이래서 오래도록 기도하였던 테이트의 기도 응답이 이루어졌으며 금산리에 기독교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 시작되었다. 이 금산교회가 시작되는 데는 또 한명의 빼 놓을 수 없는 주역이 있다. 이자익 목사이다. 그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지낸 유명한 목사이다. 이 무렵 이자익 청년은 조덕삼 씨의 집에서 일하던 마부였다. 그는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무학자였지만 매우 총명하여 마부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 하였고 또 주인을 따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이 두사람과 박희서가 세례를 받고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금산교회가 공식으로 출발하는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금산교회는 신앙적으로도 놀라운 일이 또 있었다. 교인이 100명 가까이로 불어나자 장로 한분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조덕삼 웅은 떨어지고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반상을 엄하게 따지던 봉건적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조덕삼 웅은 의연히 교회앞에 나가 말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이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 후 집에 돌아오면 주인과 마부요, 교회에서는 장로와 평신도로 두사람이 열심히 자기 직분을 다하였다. 그 뒤 조덕삼 웅도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선배 장로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시키고 목사가 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고 목사가 된 후에는 금산교회에 초빙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하여 교회가 더욱 부흥하게 되었다. 그 후 이자익 목사는 세 번씩이나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교회에 많은 업적을 남기에 되었다. ※ 왜 교회당을 “ㄱ”형으로 지었는가? 한쪽 날개는 남자석, 다른 한쪽 날개는 여자석.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구조이다. 모서리에 강대상이 있고 그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만 남녀석을 번갈아 볼 수 있고, 틈새가 나는 중간에는 흰 포장을 치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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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6·25동란 때인 9월 29일 국군이 영광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 미처 퇴각하지 못한 공산주의자들이 10월 7일 교회당을 불 지르고 교인을 바닷가 수문통에서 새끼줄로 묶고 돌멩이를 달아서 수장시키는 참상이 벌어졌다. 이때 전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순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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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동란이 지나가고 9.28 수복이 될 대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을 환영했다 하여 공산군 잔당인 공비들이 마지막 철수 직전 교인들을 잡아 처형했다. 김성종,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최판원 집사는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과 수많은 교인들은 두우리 쪽 큰 북재 넘어 공동묘지에 직경 6m 넓이의 구덩이를 파서 밤에 손과 몸뚱이를 묶어서 구덩이에 수장시키어 죽이기도 했다. 후에 한 구덩이에서 80구의 사체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 해 10월 어느 날 그들은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려서 그 곳은 몇 년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었다. 야월 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한 분도 남김없이 살해되어 순교제물이 되어진 것이다. 교회가 불타고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순교하였고 교인 대다수가 생매장 되어 순교를 한 점이 한국 교회사에서 유일한 교회이다. |
한센병(나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고 불리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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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세워진 애양원은 1939년 손양원 목사가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으며 애양원 병원 원장을 겸임하면서 사역했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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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던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이다. 순교자들의 존영과 순교 사료 보존 및 전시와 기념공원조성 등 순교신앙 전승운동에 부응하는 영성훈련 장으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가 한국교회의 중지를 모아서 한국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된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게 하고자 1989년 11월 11일에 건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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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 한번 교인들 성지 순례를 계획해 보세요.
이런곳들이 이렇게 많았군요. 저도 성지순례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우리마르다 회원들은여기가기위해 준비하고있읍니다 그때가언제인지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