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슬럼버
거대 조직에 희생당하는 왜소한 개인의 모습은 결국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역사는 위대한 몇몇 소수의 개인에 의해 진전되었지만 그 개인도 역시 거대한 세계의 일부분이고,
세계와 분리되어서 독자적으로는 어떤 역사도 만들어가기 힘들기 때문에,
창조적 개인이라고 해도 세계의 거대한 조직 아래서는 왜소해진다.
이사카 코타로의 원작소설을 아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이 영화화 한 [골든 슬럼버]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희생당하는 왜소한 개인들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외적 구조는 스릴러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따뜻한 정서와 휴머니즘이 영화 전체를 감싸는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스릴러 문법에서 벗어나 있다.
일본의 지방도시 센다이에서, 새로운 총리 취임 퍼레이드가 진행된다.
젊은 총리는 기존의 가치관과 다른 반미 성향의 진보적 정치인이다.
오픈카를 탄 총리의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도중
리모컨으로 조종되는 모형 헬기가 다가오면서 폭탄이 터져 총리가 암살된다.
전국에 생중계 된 총리 암살사건의 유력한 범인으로
택배기사 아요야기(사카이 마사토)가 지목당한다.
총리가 암살되던 그 시각 아오야기는
현장 부근의 차 안에서 오랜만에 연락이 온 대학 친구 모리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불안한 표정의 모리타는 너는 이제 곧 제2의 오스왈드가 될 것이라고 아오야기에게 말한다.
자신은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오야기를 이곳으로 불러냈지만
너는 도망치라고, 끌까지 살아남으라고 외친다.
아오야기가 차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차는 폭발한다.
그리고 경찰들이 자신을 쫒아온다.
TV에는 총리 암살범으로 현장 부근에 있었던 아오야기의 모습과
그가 R/C 헬기를 조종하는 연습 동영상 등이 공개된다.
왜, 누가, 아오야기를 총리 암살범으로 누명을 씌운 것일까?
[골든 슬럼버]는 정치적인 문제는 수면 아래로 묻어둔 채
긴박하게 도망치는 아오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경찰들은 아오야기를 체포하려고 하지 않는다.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아오야기는 어떻게 해서도 자신의 누명을 밝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골든 슬럼버]는 정치영화가 아니다.
왜 반미성향의 총리가 암살되었는지,
그 배후에 어떤 정치세력이 있는지 드러나지는 않는다.
한 왜소한 시민이, 그것도 성실한 시민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거대조직에 의해
총리암살범으로 낙인찍힌 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이야기이며,
아오야기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주변의 왜소한 인물들이
그 도주를 은밀히 도와주는 이야기이다.
도망 과정은 긴박감 넘치게 스릴러의 공식아래서 전개되지만,
거대 조직에 희생당하려는 아오야기를 돕는 왜소한 개인들끼리의 따뜻한 연대가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캐릭터는 정교하게 입체적으로 만들어져 있고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유머 넘치는 대사가 긴장감을 풀어주며,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깔려진 섬세한 복선이 결말 부분에서 만나면서
짜임새 있는 극적 구조까지 갖는다.
아오야기의 학생시절 사소한 에피소드까지 도주극 사이에 전개되면서
그것들이 의미를 갖고 반짝이는 복선으로 등장하며 현재의 이야기와 연결이 된다.
아오야기의 도주를 돕는 사람들 중에는
지금은 유뷰녀가 된 그의 대학시절 첫사랑 하루코(다케우치 유코),
택배회사의 동료이며 센다이 시의 모든 길을 꿰뚫고 있는 택배기사 이와사키(시부카와 히요히코),
당대 최고의 아이돌 스타인 린카(칸지야 시호리)가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병원에서 거짓 환자로 입원중인 전직 야쿠자 출신의 호도카야(에모토 아키라)와
희대의 엽기적인 연쇄살인범(히마다 가쿠)까지 아오야기의 도주를 돕는다.
영화의 제목이 된 골든 슬럼버는
비틀즈 마지막 레코딩 앨범 [애비로드](1969년)에 수록된
비틀즈 최후의 명곡으로 꼽히는 노래다.
폴 매카토니가 만든 이 곡은,
당시 해체 위기에 처한 비틀즈 멤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갖고 만든 곡으로서,
영화 속에서는 아오야기의 과거 동료들이
그가 절대 총리 암살범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의 도주를 도와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그들의 우정을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