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출생
요한복음 3:1-17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이다. 사순절은 날마다 반복하는 평범한 시간이지만 일상의 시간에 신앙적 의미를 주는 기회가 된다. 사순 절기에 우리는 영적 순례자가 된다. 내 삶의 자리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깊이 돌아보게 한다.
지난 월요일에 강화 볼음도에 다녀왔다. 그곳은 강화도에서 가장 서북쪽에 있는 섬인데,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주관하는 ‘사순절 DMZ 평화 순례’의 발대식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였다.
비록 안개 때문에 북쪽을 볼 수 없었지만, 북한 연안 땅이 불과 5.5km 바다 건너 지척에 있다고 한다. 순례단은 2주간 동안 걷기도 하고, 차량을 이용도 하면서 이번 주 금요일에 고성 평화전망대에서 해산한다. 해산식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볼음도에는 121년 된 감리교회가 있는데, 시골 섬 교회가 얼마나 세련되고 규모가 있는지 장로교 목회자들 틈에서 아주 자랑스럽고 뿌듯하였다. 그러나 볼음도가 예부터 살기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분단 이후 섬 사람들이 조개를 캐러 북쪽 해안선으로 나갔다가 납북되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험할 꼴을 여러 차례 겪었다고 한다.
평생 작은 이 섬에 갇혀서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강화 선수 항에서 한 시간 거리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세 시간이 걸렸다. 분교로 존재하던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2019년에 모두 문을 닫았다. 아이도 없지만, 아이를 키울 환경도 아니라는 말이다.
고향이 어디냐가 참 중요하다. 이 섬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을 운명적이라고 생각했을까? 분단 현실이 운명이 아니듯이, 볼음도에 복음이 전래 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1)
요한복음 3장은 바리새인 니고데모를 통해 영적 순례자의 모습을 다룬다. 주제는 거듭남, 두 번째 출생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당시 사회에서는 사람의 신분이 출생과 함께 규정되었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면 평생 귀족이고, 노예를 부모로 둔 사람은 죽도록 노예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운명적이다.
한 사람의 생애를 결정짓는 유일한 요소는 아버지가 누구냐는 것이다. 그것은 출생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다. 대체로 아버지의 집에서 자라고, 아버지의 것을 누리고, 상속받았다.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였다.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행할 수 없다며 높이 추켜세웠다.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 나라를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한 지식인으로서 나무랄 데 없는 인물이었다. 율법에 대한 해석 능력, 사람을 보는 안목, 새로운 역사적 추세에 대한 진지한 접근 등 뭇사람의 모범이 되기에 넉넉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거듭남은 ‘두 번째 출생’에 대한 말씀이다.
사실 율법에 정통한 니고데모였지만 예수님이 하신 거듭남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율법의 차원에서 알 수 없는 성령으로 거듭난 삶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묻는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지극히 상징적이다. 요한복음 사상에 따르면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를 상징한다.
니고데모는 평소 경건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불렸다. 그는 남달리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많은 바리새인이었다. 어둠에서 빛을 찾으려는 영적 순례자로서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의문도 많은 사람이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대체로 불명예스럽게 나온다. 예수님은 자주 바리새인들과 갈등한다. 본래 바리새인은 종교 엘리트로 ‘카부라’(chaburah) 곧 형제단으로 불렸다. 그들은 유대인 중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본이 될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대단한 그룹에 속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니고데모가 남의 눈을 피해 밤에 찾아온 것은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산헤드린 의회 의원이었다. 남들이 알아볼 만한 유력한 인물이란 의미이다.
2)
사실 니고데모는 꿀릴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다. 그런 명예를 지닌 니고데모지만 그에게도 목마름이 있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의 답변은 뜻밖이다. 인간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에 대해 ‘거듭난 사람이어야 그 진실을 바로 알 수 있다’고 하신다. 니고데모는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한다. 그의 물음은 진지하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거듭남, 곧 두 번째 출생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중에서는 유명한 선생이었지만 이 진리를 알지 못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다그쳤다. 타고난 선민이나 신분이나 자격의 문제가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니고데모는 점점 난감해졌다.
거듭남은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지금의 모습으로는 안 되며, 다시 두 번째 출생이 필요하다. 어떻게 가능한가?
사실 거듭남, 두 번째 출생은 고대 종교에서도 큰 관심 사항이었다. 신비 의식을 강조하는 고대 종교에서 초신자에 대한 입문 의식은 바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 두 번째 출생을 의식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래서 자정에 입문식을 마치면 그에게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우유를 먹여 주었다.
신비종교 의식 중에 타우로불리움(taurobolium)이 유명하다. 초신자를 구덩이에 들어가게 한 후 격자 뚜껑으로 구덩이를 덮는다. 그리고 목이 잘려 죽은 황소를 그 위에 놓으면 피가 흘러 내려 초신자가 그 피로 목욕을 하듯 뒤집어쓰면서 온 몸이 피로 젖는다.
한마디로 피 씻김을 받는 것이다. 그런 후에 구덩이에서 나오면 다시 태어났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 방식의 거듭남 의식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한 거듭남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다른 종교는 오로지 인간적 노력을 강조한다. 인간적 방식에 의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의지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맡긴다.
그리스도교에서 ‘거듭남’(아노덴)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먼저, ‘처음부터 완전하게 근본적으로’라는 의미이다.
둘째, ‘다시’(again), ‘두 번째로’(the second time)라는 의미이다.
셋째,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란 의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며, 두 번째 출생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사람의 운명이 첫 번째 출생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대부분의 인생은 절망적일 것이다. 출생결정론으로 모든 판단을 한다면 인생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신분 의식은 많은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패배자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은혜의 삶이 있다. 궁극적으로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남의 은혜를 입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
3)
자기의 출생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 ‘친구’는 2001년도에 크게 흥행을 일으킨 영화인데, 지금껏 회자 되는 명대사가 있다. 학교 담임 교사가 깡패짓하는 학생을 야단치면서 다그친다.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는 시험지 맨 위에 아버지 이름을 적었다. 집안과 가문이 합격의 요소를 가름하기도 했다. 그러니 첫 번째 출생에서 인생이 끝난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요즘 드라마에서 툭하면 이번 생이 어떻고, 다음 생이 어떻고 하는 것도 다 첫 번째 출생에 대한 원망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인생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위로부터’ 임하는 은총의 삶이다. 성령께서 나를 새롭게 창조하신다고 하신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누구든지 영적 DNA, 인격, 마음 그 자체를 바꿀 수 있다. 그것을 새롭게 하는 거룩한 능력은 우리 안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1900년대 말 조선시대 신분사회에 들어온 그리스도교가 맨 처음 전한 복음이 신분 타파였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상놈도 백정도 여자들도 모두 하나님의 교회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다.
성경은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며(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가 있다(갈 6:15). 하나님의 자녀됨이야말로 두 번째 출생, 곧 거듭남의 신비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일어난 불뱀 사건의 예를 말씀하신다. 그 광야는 의심의 광야, 불평의 광야였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공공연히 하나님을 향해 대들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은총의 양식인 만나를 대놓고 경멸하자, 그때 광야의 불뱀이 불평하는 백성들을 물어 죽였다. 백성은 곧 후회하였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질렀다. 그러자 하나님은 자비로 고통을 겪는 광야의 백성들은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그 가운데 십자가의 비밀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세 때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잖아요. 눈앞에 있는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보는 것이고,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보는 것이죠. 그게 소명이자 사명이고 믿음인 것 같아요.”(임은정, ‘복음과 상황’).
나무 위에 달린 불뱀의 형상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임을 믿는 그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성경은 복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이 말씀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경 요절(요 3:16)이 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그것은 위로부터 난 신분, 거듭남, 바로 두 번째 탄생이다. 이 말씀이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이 죄인인 나를, 어둠에 속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죽기까지 그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복음의 진수이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어둠으로부터 빛이신 예수님에게로 나아온 사람이다. 이후에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용기 있게 예수님을 변호하였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에서 빛을 찾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뜻과 소망을 지닌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새 삶을 입은 존재이다. 여전히 하나님이 은총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빛을 찾는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내 삶을 축복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순례를 하는 사람이다. 사순절은 내 삶의 광야를 의식하면서 살아보는 기회이다. 여전히 어둠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빛으로 나아오려는 의지를 품은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사순절 기간에 내 광야, 나의 밤, 나의 십자가를 새롭게 하시길 바란다. 그리하여 은총의 기회를 새롭게 맞이하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