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생명의 서(書)를 쓰는 구월
문희봉
백여 년 만에 한반도의 최고기온을 갈아치웠던 8월이 가고, 잠자리 날개에 실려 9월이 왔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풍성함에 벅찬 계절이다. 이 계절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코스모스 핀 길에서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느티나무 아래 팔베개하고 누우니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라는 시인 릴케의 시구가 떠오른다. 청량하고 화창한 9월이다. 고향을 생각한다. 천변에 키 큰 미루나무가 서 있고, 풀잎들이 더욱 진한 빛을 내고, 하천 가까이 벼들이 누렇게 익어간다. 고개를 넘어온 햇살을 받은 하늘은 어찌나 그리도 맑고 아름다웠던지.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선선한 바람을 대동하고 9월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서 나를 기쁘게 한다. 벌써부터 저 북쪽에서는 붉게 물들어가려는 나뭇잎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기차를 타고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지나다 보면 여름 내내 비지땀 흘려 가꾼 곡식들이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걸 볼 수 있다. 하늘은 점점 드높아 푸르러지고 독서를 하든 여행을 하든 뭘 해도 좋은 계절이 바로 이 계절이 아닌가 싶다.
세월의 무게를 못 이긴 채 고개 숙인 벼 이삭은 넓은 들판을 누렇게 수놓는다. 제철을 만난 참새떼는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를 희롱한다. 고샅길 돌담에 주렁주렁 매달린 박 위로 고추잠자리들이 떼 지어 날아다닌다. 9월이 그려내는 풍경화이다.
드높은 하늘에는 두어 점의 게으른 구름이 양떼를 몰고 유람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고, 풀벌레도 목청껏 노래한다. 오만가지 생각과 고민으로 모든 풀들은 이 9월에 밖으로 꽃 피우고, 안으로 익어간다.
토담 위로 가을볕이 쏟아질 때마다 호박덩이도 조금씩 조금씩 함께 붉어져 간다. 듬성듬성 서 있는 수숫대 사이로 머리 푼 9월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마당에 이르면 멍석에 누워 일광욕하는 고추도 쉽게 만날 수 있다.
투명한 가을 햇살. 참 아름답다. 햇살은 아스팔트 위에 향유와도 같이 향기로운 생명의 서(書)를 쓰고 있다. 이름 모를 어느 조그마한 시골 정거장에서는 한들한들 몸을 흔들며 나그네를 반겨주는 코스모스의 미소가 한참이겠다.
어느새 안개가 골짜기를 가득 메운다. 한낮은 따가운 햇볕, 그리고 달 뜨고 풀벌레 슬피 우는 밤, 시간이 흐르면서 계곡의 바위를 감싸 도는 물소리도 바뀐 것 같다. 깊은 밤 가벼운 차림으로 개울가 침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어느새 나와 달은 하나가 된다. 내가 바라보는 하천물이 9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어 놓고 간다. 그뿐인가? 머리 위에는 부드러운 코발트 빛의 하늘이 펼쳐지고 구름은 양털같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