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3계에 출입(하며 갖가지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 제도)하지만, 법성(法性)을 파괴하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雖行三界,而不壞法性,是菩薩行。
비록 여전히 욕계ㆍ색계ㆍ무색계 이 3계 속에서 구르지만 법성(法性)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는 3계를 뛰어넘어서 제4계로 도달한 것일까요? 제4계는 없습니다. 교종[敎下]이 ‘계외(界外)’를 말하는 것은 제4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3계 속에 있지 않으면서 3계 속을 떠나지도 않는 것을 ‘계외’라고 하며, 성현의 경계요 불보살의 경계입니다.
부처님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모두 3계를 뛰어넘기를 희망합니다. 특히 소승경전에 근거하면 반드시 3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3계를 뛰어넘지 못하면서도 무엇을 닦는다는 것일까요? 3계를 뛰어넘으려면 어떻게 뛰어넘어야 할까요? 9차제정(九次第定)은 수지방법을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각종 선정과 더 나아가서 각종의 종파, 예컨대 천태종ㆍ구사종(俱舍宗)ㆍ성실종(成實宗)은 마땅히 어떻게 미혹을 끊어 진여를 증득하여 3계를 뛰어넘어야 하는지를 모두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정좌하여 공부가 도달해야 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교만 등등의 번뇌와 무명습기가 전환 변화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공부가 4선8정 같은 경계에 도달하는 것은 결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일반 범부로서 기공(氣功)을 수련한 사람은 모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의 진정한 어려움은 습기심념인 견사혹(見思惑)을 끊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 층의 견사혹 습기번뇌를 끊으면서 정(定)을 닦는 공부와 결합하는 것이 바로 3계를 뛰어넘는 순서인데, 우리들은 많이 토론했습니다. 저는 늘 여러분들에게 묻기를 3계 밖으로 뛰어넘으면 어디로 갈 것이냐고 합니다. 부처님은 제4계가 있다고 말씀한 적이 있을까요? 우리는 성현 경계가 하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가설적인 것입니다. 이른바 ‘계외’의 계인 성현 경계를 얻으면 그는 어디에 있을까요? 역시 3계를 떠나지 않으며, 또 3계에 머물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어라고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가설된 계외’의 계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비록 3계에 출입하지만, 법성(法性)을 파괴하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雖行三界, 而不壞法性].’, 진정으로 도를 깨달으면 모든 불보살은 다 환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3계 속에서 온갖 중생을 제도하면서도 법성을 파괴하지 않으니, 오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른바 ‘묘담총지부동존(妙湛總持不動尊: 이 구절은 심오한 내용이기에 운문 형식의 직역으로는 그 의미를 온전히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역자가 번역한 남회근 선생 저작 ‘능엄경 대의 풀이’에서 전재합니다. ‘부처님과 온갖 중생이 함께 같은, 몸과 마음의 자성 본체는 영묘하고 투명하게 맑고, 우주허공 만유의 총체이며,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만상이 돌아가 받드는 바입니다.’ 즉, 무상정각을 얻은 본사 석가모니불이 자성 법신에 증득하여 들어갔음을 찬탄하는 말이다/역주)’으로서, 와도 오지 않았으며 가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거야말로 보살행입니다.
경문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했듯이 보살은 바로 인간세계에 있습니다. 단지 당신이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저는 최근에 몇 명의 친구들과 환담을 하면서 저의 많은 친구들을 회상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두 보살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죽은 뒤에 관 뚜껑을 닫고 논해보니 정말 보살이었습니다. 심지어 여기 심(沈)거사란 사람은 평소에 저한테 오기만하면 제가 훈계를 했습니다. 작년에 저에게 세배하러 왔을 때에 자기의 몸이 몹시 나빠져 온통 병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말하니 그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를 위해서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아래층에서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선생님이 나를 위하여 걱정하시는데 나는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자신이 있다.’ 라고 했답니다. 결과적으로 죽은 뒤에 화장했는데 사리가 나왔습니다. 그의 친구가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가 자신 있다고 하더니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해 보였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그는 본래 다시 온 사람[再來人]이었습니다. 내가 평소 그를 꾸짖은 것은 다른 도리가 있었는데, 당신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성현으로서 다시 온 사람들은 모두 인간세계에 있습니다. 더 엄중하게 말한다면 불보살들은 어디에 계실까요? 능가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반한 부처도 없고 부처가 열반함도 없다[無有涅槃佛, 無有佛涅槃].’, 자성이 본래 열반인데 어디에 가서 열반을 하나 증득할까요? 시방3세 모든 불보살은 다시 오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모를 뿐입니다. 다시 와서 모두 3천대천세계 속에서 오고가면서 대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합니다.
이것은 우리 거사들이 더더욱 본받아야 할 것인데, 재가불자들은 3계를 뛰어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욕계의 가장 낮은 층조차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보살도를 배우면 당신은 엄격하게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세간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당신더러 출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6, 7십 세 된 많은 노년 친구들이 어떻게 그렇게 버릴 수 없을까요? 이러한 세속적인 사무들은 모두 벗어날 수 있으니, 당신이 마음으로 벗어날 수 있고자 해야 합니다. 일생동안 했으니 만년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모두 꿰뚫어 보았어야 하는데 벗어나지 못하니 무슨 대승보살도를 배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공(空)을 행(하여 생각 생각마다 공으로 돌아가)지만, 온갖 선근공덕을 증식하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雖行於空,而殖眾德本,是菩薩行。
비록 공(空)의 경계 속에서 있지만 곳곳마다에서 유(有)를 행합니다. 작은 행위마다 모두 합니다. 선(善)이란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이 쌓이지 않으면 명성을 이룰 수 없고, 악이 쌓이지 않으면 몸을 망치지 않는다[善不積, 不足以成名. 惡不積, 不足以滅身].’라는 말은 역경계사전[易經繫辭]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어떠한 악행도 하지 말고 온갖 선행을 하라.’고 합니다.
대승이든 소승이든 모두 제행무상(諸行無常)ㆍ제법무아(諸法無我)ㆍ열반적정(涅槃寂靜), 이 3법인(三法印)을 숭상합니다. 모든 수행자들은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임에 있어 생각 생각마다 공으로 돌려야 합니다. 만약 이 점을 해낼 수 없다면, 제가 재가거사를 대표하여 말씀드리건대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의 행위를 보면,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임과 사람으로서의 처세의 사이에서 보고, 비워버릴 수 있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내버려두었으면 곧 내버려두어서 생각조차도 다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최소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비록 성공(性空)의 경계는 아니지만 공(空)을 행하는 행문(行門)입니다. 들어 올릴 수 있고 놓아버릴 수 있으며, 놓아버렸으면 놓아버린 겁니다. 그저께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내가 힘들게 번 일백만원이 그렇게 없어져 버렸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탐욕 부린 겁니다!’ 그는 부인하면서 말하기를 단지 이자놀이를 좀 해서 밥을 먹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이것이 탐욕부린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 조금이라도 탐욕입니다! 탐욕을 하게 되면 과보가 있게 마련입니다. 알고 보면 그 백만 원도 본래는 역시 없었던 것인데 무슨 희귀할 게 있겠습니까!’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은 이렇게 놓아버릴 수 없다면 적어도 공을 행해야 합니다. 본래에 온갖 것이 모두 공합니다[一切皆空].
그렇지만 한 가지 점이 있습니다. 당신이 최후에 진공(眞空)을 증득하고 나면, 편공(偏空)의 과위인 소승나한 성문에게는 큰 병폐가 하나 있는데,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공덕을 닦으려 하지 않고 행을 감히 일으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공(空)에 도달하면 즐겁고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즐거움의 경계는 아마 여러분들 청년 학우들은 이해할 길이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공에 거의 가까운 것으로서 공의 그림자가 좀 있는 것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배우고 싶습니까? 배우고 싶습니다. 푹 잠을 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진공이 아닙니다만 정말 편안하고 일어나기 귀찮습니다. 사실 잠자는 것은 아직은 공이 아닙니다. 공의 제3중 그림자라고만 할 수 있을 뿐이며 제2중 반영(反映)도 아닙니다. 사람이 잠을 자게 되면 일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하물며 진정으로 공을 증득한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定)에 탐착하고 공(空)에 탐착하는 것은 보살의 계율을 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도는 행을 일으키는 것이며 세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간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비록 3계에 출입하지만, 법성(法性)을 파괴하지 않는 것[雖行三界, 而不壞法性].’입니다. 모든 보살은 공을 증득하면 첫째로 공에 의하여 잘못되지 않을 것이며 공의 경계에 탐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공(性空)은 용(用)을 일으켜야 합니다. 진공은 묘유(妙有)를 일으켜야 합니다. 두 번째로 공쪽으로 치우쳐서 완공(頑空) 속에 떨어져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지[撥無因果]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비록 공(空)을 행하지만, 온갖 선근공덕을 증식하는 것[雖行於空, 而殖衆德本].’입니다. 이 ‘식(殖)’자는 번식한다는 ‘식’자임에 주의하십시오. 이 ‘식’자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세균배양, 물고기 기르기, 소 키우기, 양을 키우기는 더욱 많이 태어나게 하는데, 이게 ‘식’입니다. 어떻게 번식시킬까요? 바로 ‘어떤 악행도 하지 말고 온갖 선행을 하는 것[諸惡莫作, 眾善奉行]’입니다. ‘선은 작다고 해서 하지 않지 말고, 악은 작더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莫以善小而不爲, 莫以惡小而爲之].’입니다. 작은 선행을 버리지 말고 언행상의 작은 선도 잘 수지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생각 생각마다 공(空)으로 돌아가야 하며 또 걸음걸음마다 유(有)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을 잘 보호해서[善護念]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일 때 공덕을 두루 행해야 합니다. 만사를 상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일을 상관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간에 들어가 ‘온갖 선근공덕을 증식하기[殖衆德本]’ 때문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