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해 봅시다.
수필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사실성, 진정성(진실) 핍진성을 알아봅시다. (*핍진성이란 말은 최근에 많이 함으로)
수필론에서 내용이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문학이 하나의 장르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른 장르와 특징적인 차이가 있어야 한다. 수필은 적접 경험한 사실을 쓰는 것이고, 수필이 4촌 격인 소설은 허구로 꾸며 낸 이야기이다.
사실이라면 실제로 일어났거나, 현재 진행중인 사건을 가르킨다. 또 하나는 관찰이나 경험을 통해서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실재의 사살과 사실이라고 믿어지는 어떤 사실과 구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을 확정지을 능력이 없으면서도 사실이라고 믿어지는 가능성만으로 사실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스필을 쓰면 수필에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 보다는 조금 느슨한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논리정연하여야 할 이유은 ㄴ없다.,사실이 무엇든지간에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수필 평에 사실성 여부보다느 '진정성이 있다.' 를 말한다. 수필을 쓰는 작가가 사실이라고 믿고, 독자가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때(공감할 때) 는 허구의 내용이라도 '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쓰기 - 읽기를 '믿는 체 하기 놀이'라고 말한다.
핍진성은 진실과 거짓이 분명하지 않을 때 객관적인 관찰자(독자)가 진실에 가'갑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ㅇ르 가진다. 문학의 핒빈성은 이야기(작품)로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느냐느이 문제이다.
작품 보기
김귀선의 '구름'
병실을 나온 아버님이 나무 그늘 벤치에 풀썩 앉았다. 되는대로 몸을 부려놓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아버님을 따라 나온 나도 옆 벤치에 앉는다. 늦여름 하늘에는 둥그스름함 구름 한덩이가 소나무 위에 떠 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아버님의 모습은 환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내내 우울해하셨던 아버님이다. 당신에게 언제 그런 우울한 일이 있었느냐는 듯 오늘은 이런저런 농담까지 하시며 호탕하게 웃기까지 하셨다. 무엇보다 고모님에게 화해를 하러 가는 길이었으니 마음이 가벼우신 듯했다.
오 년 전 아버님은 사소한 대화 끝에 고모님과 비틀어졌다. 매듭을 풀어주려 주위에서 몇 번을 시도했으나 아버님은 자신의 누님을 완강히 피했다.
“자꾸 둘이 붙일라 카지 마라. 내한테 그렇게 야멸차게 말하는 사람이 무신 누님이고.”
다시는 안 볼 듯 화해의 말을 끄집어내지도 못하게 했다. 고모님의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말을 듣고도, 큰 동생을 한 번 보고 싶다는 말을 고모님의 간절한 마음을 전해 듣고도 변함 없었다. 쇠심줄 같던 그 마음이 오늘에야 조금 여러졌나 보다.
하지만, 요양원 병실을 들어선 아버님과 난 망부석처럼 서고 말았다. 공간에 맞춰 방향을 달리한 여섯 개의 침대에는 숨을 쉬기에 힘겨운 할머니들이 누워 계셨ᄃᆞ. 낯선 인기척에도 반응은커녕 살아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얇은 이불이 주기적으로 떨리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했다. 무거운 시간이 흘렀다. 그것은 이승과의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모든 미련을 끊게 해달라는 할머니들의 엄숙한 기도 의식 같았다.
가라앉은 이 공기 속에 그토록 활달하신 고모님이 계신다는 것일까. 병실을 잘못 찾아온 것이길 바라며 음료수 박스를 든 체 침대마다 살폈다. 환자가 돌아누운 방향으로 아버님도 몸을 기울이며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고모님은 안 계셨다. 길에서 출발할 때 병실을 확인 했는데 그 사이 다른 곳으로 옮기기라도 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침대의 이름표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어찌 이럴 수가
맨 처음 본 입구 쪽의 환자가 고모님이실 줄이야. 몇 달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물기를 줄이고도 떨어지지 못한 나뭇잎처럼 시들대로 시든 처량한 모습이었다. 우묵하게 들어간 두 볼은 맙붙을 듯하고 힘없이 놓인 팔다리는 뼈를 그저 이리저리 걸쳐 놓은 듯했다. 큰소리만 질러도 으스러질 것 같았다. 어쩌다 빤히 처다보실 때는 우리를 아시는 듯도 했다. 다시 희멀건 해진 눈동자는 나사 빠진 바퀴처럼 제멋대로 굴렀다.
아버님은 말이 없으셨다. 입담 좋으신 당신도 할 말을 잃으셨다. 고모님의 모습만 눈으로 흝어셨다. 흘러내리지도 않는 안경을 자주 만지면서 연달아 한숨을 쉬셨다. 그러다 조심스레 고모님의 손을 한 번 잡아보셨다. 마른 비늘 같은 손을 잡자마자 못 만질 것을 만진 듯 곧바로 슬며시 놓았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한숨만 병실 바닥에 쌓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님요, 저 왔심더. 예?”
절규 섞인 아버님의 목소리가 병실 바닥에 내동댕이처녔다. 연달아 고모님을 불러보지만, 답답한 제 가슴을 두드리듯 병실만 왕왕거릴 뿐이다. 통곡한들 흘러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아무리 고함쳐 불러도 반가이 맞아줄 줄 알았던 당신의 누님은 목석처럼 누워있으니 보다 못한 아버님을 병실을 훌쩍 나완 것이었다.
아버님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있다. 아버님의 시선 따라 하늘을 올려다 본다. 좀 전 소나무 위 둥그스럼하게 떠 있던 구름이 모양도 없이 흐트러진 체 느티나무 위에 떠있다. 수많은 말을 아래로 보내며 병원 건물 뒤쪽으로 아주 천천히 넘어가고 있다.
첫댓글 지난 시간에 논의하였던 것을, 수필의 사실성 여부,를 계속하여 논의 해 봅시다.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욜렸습니다.
곧 수필도 한 편 올리겠습니다.
화자는 3인칭 화법으로 말한다 이 글의 주인공은 화자가 아니고 3인칭 인물인 아버님이다. 이 수필에서는 아버님이 실질적인 주인공이다.이런 구조의 글이라면 소설 형식이다. 그러나 작품으로는 수필이다.
수필을 쓰는 우리 선생님에게 참고가 될 듯 하여 '보기 글'로 가져왔습니다.
글쓰기에 참고 하십시오.;
저는 오늘 약간 다른 각도에서
선생님의 말씀에 답해보겠습니다
ㅡ소설은 허구ㅡ라는 명제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소설을 정말 허상이라 생각한다면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자전적 소설이 있을뿐만 아니라
일정부분 사실의 조사와 경험으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으니
허구라는 것은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있었을 이야기가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모든 소설이 저는 허구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필은 사실, 소설은 허구
이런 정의나 논의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다 출발은 경험이나 사실일것이며
사실성이 없더라도 진정성이 있다면 독자는
허구라고 하지 않을것입니다
글이란
필자가 아무리 사실을 썼더라도 독자가 진정성을 못 받아드리면 허구가 될 수도 있다는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진실은 바뀔 수 없지만
모든 글은 어차피 필자와 독자의 관계 아닐까 싶습니다
정홍표 선생님이 결론까지 내려 주셨습니다. 사실 여부는 작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독자가 믿지 않으면 사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프로이드 책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유대인 A가 경주에 사실로 가면서 B에게 '나는 경주로 갑니다.'라고 말한다. B는 그 말을 듣고 '예 그렇습니까' 라고 말을 한다. 속으로는 나를 따돌리려고 거짓말을 하구나 라면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 문제에 관하여 수많은 사례들이 나옵니다. 재미있는 논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끔
저녁약속을 하면 대부분 사무실에서 40분 거리인 약속장소세 한시간 전에 출발합니다
거의 약속 시간전에 도착하지만 가끔 신천대로 정체가 길어지면 10분 정도 늦을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늘 ㅡ 죄송합니다 사무실에서 출발이 늦었습니다 ㅡ 라고 말합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도로가 정체되어 늦었다고 하면 믿지 않거나 변명으로 들릴것같아서 입니다
평소보다 정체가 심했지만 상대가 믿지 않으면 진실의 역할을 못하는거라고 생각힙니다
또한 제가 ㅡ사무실에서 늦게 출발하였다ㅡ는 것도 언뜻 거짓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차량정체를 예상하고 더 이른 시간에 출발했어야 한다는 명제가 선행되면 거짓이 아닌거 같습니다
따라서 글에서도 독자가 동의하면
모든게 진실로 존재하는곳이 있을거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재미있는 사유를 하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김귀선의 수필을 가져온 것은 , 이 수필에서는 작가가 주인공이 아나고, 아버님이 주인공입니다.(소설의 기법입니다.) 김귀선이 서술하는 아버님의 심정을 김귀선은 사살이라는 전제에서 말을 하자민 , 아버님이 그대로 생각하는지는 모른 일입니다.
우리는 수필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수필 이론을 공부하는 중입니다. 그 점 참작하시고 읽어주십시오.
김귀선 수필가의 구름이라는 작품처럼 화자가 3인칭의 소설 형식을 빌면 수필의 핍진성에 상당히 불리할 것 같습니다. 당장 비근한 예로 "작가가 그 당시의 아버지의 마음을 정확히 어떻게 안다는 말이오"이렇게 물으면 대답하기가 궁색해지지 않을까요? 독자 중에 한명이라도 아버지는 다르게 생각했다고 우기면 반론하기가 여의치 않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1인칭으로 쓰면 내가 진실이라고 말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김재화 선생님이 말을 들으니까. 내가 표현의 어려움을 겪을 때 인칭을 살짝 바꿔보는 것도 방법이 되겠네요ㅣ
우리는 수필 글을 쓰면서, 더 이상 글이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잖습니까. 김재화 선생님의 말대로 인칭을 바꾸는 것도 방법이 되겠습니다.
사실과 허구 핍진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과정은
필수였네요.
더불어
작가의 글을 아우르는 핍진성의 중요함은
독자에게는 개연성을 웃도는 하나의 과제로
여겨집니다.
한줄의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글자 하나하나의 무게를 생각하게 됩니다
재밌네요. 글에 대한 공부는.
어렵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