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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아람 하차투리안
안무 유리 그리고로비치
무대 시몬 바르살라즈
의상 시몬 바르살라즈
초연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 볼쇼이 발레단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 Vladimir Vasiliev
예카테리나 막시모바 Ekaterina Maximova
마리스 리예파 Maris Liepa
니나 티모페예바 Nina Timofeyeva)
<1977 볼쇼이 극장 / 92분>
아람 하차투리안 작곡 / 유리 그리고로비치 안무
볼쇼이 발레단 & 볼쇼이 오케스트라 연주 / 알지스 추라티스 지휘 / 바딤 데르베네프 연출(볼쇼이 프로덕션)
스파르타쿠스.....노예 검투사.................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
크라수스...........로마의 장군.................마리스 리에파
프리기아...........스파르타쿠스의 연인.....나탈리아 베스메르트노바
에기나..............크라수스의 아내...........니나 티모페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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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안무를 맡은 <스파르타쿠스>는 발레에 있어 영웅적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혁신적인 작품이다. 그의 지휘 하에 바실리예프, 베스메르트노바, 리에파라고 하는 쟁쟁한 스타들과 볼쇼이 발레단 사상 최고의 무용가들이 포진하고 있는 이 영상물은 발레사에 기리 남을 명작이다. 바실리예프는 이상주의적 영웅의 모습인 스파르타쿠스를 잘 표현해 이 역할의 대표 무용수가 되었고, 67세의 나이로 별세한 스파르타쿠스 부인역의 나탈리아 베스메르트노바는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실제 부인이며, 볼쇼이 발레단에서 30년간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약하였다. 이 영상물에서는 비극적이면서도 여성 발레의 경지를 뛰어넘는 실력을 보여준다.
* 보너스 트랙 : 바실리예프 & 플리세츠카야 <곱추 망아지> 중 마지막 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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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모스크바 볼쇼이발레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음악은 아람 하탸투랸(Aram Khachaturian)이, 무대장치는 시몬 비르살라드제(Simon Virsaladze)가 담당하였다. 초연에는 무용수로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Vladimir Vasiliev), 예카테리나 막시모바(Ekaterina Maximova), 마리스 리예파(Maris Liepa), 니나 티모페예바(Nina Timofeyeva)가 출연하였다.
로마제국 말기에 이탈리아의 카푸아에서 스파르타쿠스라는 검투사의 주도로 일어난 노예반란에 대한 실화를 기초로, 검투 장면의 광경을 그대로 재현하여 인기를 얻었다. 스파르타쿠스와 부인 프리지아, 부패한 로마의 장군 크라수스, 그리고 로마의 사악한 매춘부 에기나 등 4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며, 빠른 전개와 강렬한 주제 의식, 관객을 압도하는 연출법이 돋보인다.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출처 : 국립발레단 제170회 정기공연(2017.06.23~25)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음악 아람 하차투리안 (Aram Khachaturian)
안무 유리 그리가로비치 (Yuri Grigorovich)
무대 사이몬 바르살라즈 (Simon Virsaladze)
의상 사이몬 바르살라즈 (Simon Virsaladze)
조명 미하일 서칼로프 (Mikhail Sokolov)
지휘 (미정)
연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Korean Symphony Orchestra)
예술감독 강수진 (Kang Sue Jin)
시놉시스
1막1장_ 침략
트라키아를 정복한 로마 군단이 로마 점령지의 대장 크랏수스의 지휘 아래 그들이 거치는 곳마다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잔인하고도 승리에 가득찬 행진을 하고 있다. 포로들 중에는 사슬에 묶인 스파르타쿠스와 프리기아도 있다. 그들은 이제 노예가 된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독백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있다. 자유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이제 사슬에 묶인 노예가 된 것이다.
1막 2장_노예시장
노예상인들이 부유한 로마의 귀족들에게 포로들을 노예로 팔기 위해 남녀를 갈라놓는다. 스파르타쿠스와 프리기아도 이별을 한다.
프리기아의 독백
행복을 빼앗긴 프리기아는 한숨을 쉬고 그녀 앞에 놓일 무서운 시련을 생각한다.
1막 3장_향락
무언배우와 창녀들이 손님들 앞에서 여흥을 펼치고 크랏수스는 노예가 된 프리기아에게 수작을 건다. 술과 여흥에 취한 크랏수스가 구경거리를 대령하라고 호통을 치자 투구로 눈이 가려진 두명의 검투사들이 들어온다. 그들은 서로를 보지 못하고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승리자가 투구를 벗었다. 그가 바로 스파르타쿠스다.
스파르타쿠스의 독백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파르타쿠스는 살인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노예를 죽인 것이다. 이러한 비극이 그의 분노와 저항심을 불태운다. 그는 포로가 되어 속박되어 있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하나, 바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1막 4장_검투사의 막사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들에게 반란을 일으키자고 설득한다. 한 마음이 된 검투사들은 스파르타쿠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자유를 향해 막사를 탈출한다.
2막 1장_아피아 가도
막사에서 탈출한 검투사들은 아피아 가도에서 목동들과 만나게 된다. 검투사들은 목동들에게 그들과 함께 할 것을 권유한다. 스파르타쿠스가 그들의 지도자로 추대된다.
스파르타쿠스의 독백
스파르타쿠스는 프리기아가 걱정된다. 그는 오직 프리기아에 대한 생각 뿐이다.
2막 2장_크랏수스의 빌라
프리기아를 찾기 위해 스파르타쿠스는 크랏수스의 빌라로 잠입한다. 마침내 스파르타쿠스와 프리기아가 해후의 기쁨을 나눈다. 그것도 잠시, 예기나가 크랏수스의 참모진과 함께 나타나자 재빠르게 숨는다.
예기나의 독백
오랫동안 예기나는 크랏수스를 유혹해서 권력을 얻기를 열망해왔다. 그녀의 목표는 그를 통해 합법적으로 로마 귀족 사회에 합류하는 것이다.
2막 3장_크랏수스 빌라에서의 향연
크랏수스는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참모진은 크랏수스를 예찬한다. 향연이 절정에 다다를 즈음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크랏수스의 빌라를 포위했다는 소식이 전달된다. 향연에 참가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크랏수스와 예기나도 함께 도망간다. 이때 스파르타쿠스가 빌라로 침입한다.
스파르타쿠스의 독백
승리한 스파르타쿠스는 이제 그의 반란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2막 4장_스파르타쿠스의 승리
검투사들이 크랏수스를 붙잡아 스파르타쿠스에게 끌고온다. 검투사들은 그를 처형하자고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핏빛의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크랏수스에게 일대일 전투를 제안한다. 크랏수스는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만, 이 대결은 스파르타쿠스의 승리로 끝난다. 스파르타쿠스는 그를 죽이지 않고 놓아주어, 크랏수스가 굴욕감을 느끼도록 한다. 검투사들은 기뻐하며 스파르타쿠스를 칭송한다.
3막1장_크랏수스의 복수
굴욕감에 가득찬 크랏수스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있다. 예기나는 그에게 복수하도록 부추긴다. 크랏수스는 점령지의 군대들을 소집하여 반항하는 검투사들을 죽이기로 한다. 예기나는 전장으로 나가는 크랏수스를 배웅한다.
예기나의 독백
스파르타쿠스는 예기나의 적이기도 하다. 크랏수스의 패배는 그녀의 몰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기나는 계략을 생각해내어 스파르타쿠스 진영에 불화의 씨를 뿌릴 계획이다.
3막2장_스파르타쿠스의 막사
스파르타쿠스와 프리기아는 함께 있다는 행복감에 가득 차 있다. 그때 갑자기 그의 참모들이 걱정스러운 소식을 전달한다. 크랏수스가 대 군단을 이끌고 행진해 온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가 전투에 나갈 준비를 하자, 그의 참모진 중 대부분이 나약함을 보이며 탈주한다.
스파르타쿠스의 독백
스파르타쿠스는 곧 있을 전투가 비극적인 결과를 낳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전투에서 죽을지라도 속박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보여주는 병사들은 그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3막 3장_내분
예기나는 스파르타쿠스를 배반한 비겁한 검투사들의 진영으로 은밀히 잠입한다. 그녀는 그들이 스파르타쿠스에게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녀는 창녀들을 거느리고 술과 고혹적인 춤으로 검투사들을 현혹시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잊게 한다. 예기나는 그들을 유인하여 크랏수스 앞에 대령시킨다.
크랏수스의 독백
크랏수스는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있다. 스파르타쿠스는 크랏수스를 욕보인 대가로 크랏수스의 손에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3막 4장_마지막 전투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로마군에게 포위당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충성스런 병사들은 이 불공평한 전투에서 하나 둘 죽게 된다. 부상당한 스파르타쿠스는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며 싸우지만 결국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창에 찔려 전사한다.
레퀴엠
프리기아가 전쟁터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시신을 찾는다. 그녀는 슬픔과 비통에 잠겨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든 프리기아는 영웅적인 스파르타쿠스의 정신이 영원히 기억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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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다음 클래식 백과 / 정이은 글>
스파르타쿠스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
발레 모음곡 〈스파르타쿠스〉는 하차투리안이 생애 작곡한 3곡의 발레곡 중 〈스파르타쿠스〉의 곡을 모았다. 화려하고 묵직한 선율이 영웅 스파르타쿠스를 떠오르게 한다.
소련 정부가 예술가들에게 바랐던 바로 그 이야기
하차투리안이 발레음악 〈스파르타쿠스〉를 위해 곡을 쓴 것은 1950년대 초반이었지만, 그는 나중에 이 발레음악에서 몇몇 곡들을 뽑아서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으로 만든다. 오늘날 더 자주 연주되는 것은 〈스파르타쿠스 모음곡〉이다. 그는 이 작품 안에 총 네 개의 모음곡을 남겼는데 그 중 ‘모음곡 1번’부터 ‘3번’은 1955년에서 1957년에, ‘모음곡 4번’은 1967년에 작곡되었다. 1967년 그는 〈스파르타쿠스〉 전체에 대한 개정작업을 단행했고, ‘모음곡 4번’은 개정버전이다. 하차투리안이 이 곡에 왜 이렇게 큰 에너지를 썼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스파르타쿠스〉의 원작 이야기 때문인 듯하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의 전사로, 로마에 대항하여 노예들을 이끌고 자신들의 요새를 구축하였지만, 크라수스와 폼페이에서의 엄청난 전투 끝에 패하고 말았다. 6,000명의 노예들이 이후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노예들이 억압적인 군주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이야기는, 당시 소련의 상황에 비추었을 때 다른 소련의 예술가들도 다뤄주었으면 하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앙아시아적인 감성이 곳곳에
발레 〈스파르타쿠스〉의 절반이 넘는 음악이 〈스파르타쿠스 모음곡〉의 1번부터 4번에 사용되었다. 전체 발레음악은 50개 정도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때로 그의 모음곡은 몇몇 곡들을 합쳐놓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상 절반의 발레음악이 나중에 재활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파르타쿠스〉에서 들어볼만 한 부분들은 이 곡이 가지고 있는 중앙아시아적인 정취이다. 이는 아르메니아 출신 작곡가 하차투리안의 장기이기도 했다. 가령 ‘모음곡 3번’의 2번, ‘이집트 소녀의 춤’이나, ‘모음곡 2번’의 4번 곡, ‘해적들의 춤’에서 들을 수 있는 발레음악 〈가야네〉의 유명한 ‘칼춤’과 비슷한 분위기에서 우리는 중앙아시아적인 정취를 흠뻑 만끽할 수 있다.
모음곡 2번의 1악장, 스파르타쿠스와 프리지아의 사랑의 장면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명한 장면은 스파르타쿠스와 프리지아와의 사랑의 장면일 것이다. 이 둘 사이의 로맨스에도 이국주의적인 정서가 서려있다. 어딘가 모르게 매끈하게 가다듬어진 것 같은 이러한 이국주의는 스파르타쿠스와 프리지아의 사랑의 장면을 보다 로맨틱하게 만들어주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잔잔한 파도가 이는 듯한 현악기의 반주를 타고 애상적이면서도 구슬픈 오보에의 선율은 이 장면을 〈스파르타쿠스〉의 명장면으로 만들고 있다. 이로 인해 이 곡은 발레음악에서 분리하여 하나의 완성된 곡으로 영화 〈스파타커스〉(1960)의 러브스토리 테마로도 사용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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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서울교육대학교 함규진 교수 글>
인물세계사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검투사 출신으로 노예반란을 일으킨
? ~ B.C.71
“가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몇 백 년 만에 한 번 온 세상을 향해 외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몇 세기가 또 지나가고, 세상이 계속 돌아가도, 이 사람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바로 얼마 전 이 사람은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 … ) 지금 그는 거의 5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그 군대는 역사상 최강의 군대다.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의미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군대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군대가 있었다. 그 군대들은 국가, 도시, 부, 전리품, 권력 또는 어떤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싸웠다. 그러나 여기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있다.” 1950년, 미국의 작가 하워드 패스트는 매카시즘의 광풍에 휘말려 사상범으로 갇혀 있던 감옥에서 쓰던 소설, [스파르타쿠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마, 승자의 그늘
기원전 3세기, 로마는 수백 년의 전란 끝에 이탈리아 반도를 하나로 통일했다. 그리고 다시 백 년이 지나는 동안, 그 영토는 무려 다섯 배 이상 늘어났다. 동방에서는 헬레니즘 국가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발칸 반도를 차지하고 중동 지역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서방에서는 포에니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를 무너뜨리고 에스파냐와 북부 아프리카를 손에 넣었다. 지중해의 거의 대부분의 해안선이 로마에게 장악된 것이다. 바야흐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전역에서 약탈한 보물, 강제하는 세금, 그리고 막대한 숫자의 전쟁포로, 즉 노예의 공급으로 로마는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부를 누리며 번영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어두운 그림자도 가져왔다. 경제성장이 급속할수록 빈부격차도 심해지기 마련인데, 노예무역을 포함한 지중해 무역에 뛰어들어 거액을 챙긴 졸부들은 다시 부동산을 널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소유주가 오랜 해외원정에 가 있느라 버려져 있던 소규모 자영농의 농지들이 이들에게 헐값으로 넘어갔으며, 정복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도 자영농의 자립기반을 무너뜨렸다. 이로써 라티푼디움, 대농장이 로마 곳곳에 나타났다. 이 대농장의 소유주는 넓은 토지와 많은 노예들 위에 군림하며 작은 나라의 왕처럼 살았으며, 이들에게 농지를 잃은 참전용사들은 도시로 흘러들어 빈민이 되었다. 그들이나, 외국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불만과 원한이 심각했음은 당연하다.
사치풍조와 배금주의가 판을 치면서 검소함과 근면함을 숭상했던 로마 고유의 미덕도 사라졌다. 옛날에 세워진 법질서는 농업 위주의 도시국가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라, 새로운 세상에는 맞지 않았다. 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그 대표가 기원전 134년부터 기원전 122년까지 진행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었다. 이들은 민회를 중심으로 원로원의 보수계층과 신흥 부유층의 기득권을 억제하고 서민들의 복리를 증진하려고 했으나, 둘 다 처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사람이 마리우스였는데, 전쟁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기원전 100년에 집정관이 되고는 ‘병제개혁’을 실시했다. 스스로 군비를 마련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만이 군인이 되는 도시국가의 원칙을 깨고, 도시 빈민들도 군대에 자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정복전쟁으로 얻은 토지가 분배되었다. 이로써 도시 빈민의 살 길을 마련함은 물론 로마의 장기적인 병력 수요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빈민들을 모집, 무장시키고 토지를 분배해 주는 결정권자가 국가가 아닌 개별 장군이었으므로, 이로써 로마 군대는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개별 장군들의 사병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체제에 따라 마리우스, 술라, 그리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등 거대한 군벌이 나타났고, 이들은 차츰 황제의 지위를 꿈꾸게 된다.
이렇게 공화정이 지나친 번영의 결과 역설적인 몰락의 길을 밟아가고 있을 때, 그나마 서민으로서의 대접도 받지 못했던 자들, 노예들의 반란이 터져나왔다. 그 중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대규모였던 것은 세 차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기원전 135년에 에우누스에 의해 시칠리아에서, 두 번째는 기원전 104년에 역시 시칠리아에서 아테니온과 트리폰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정말로 로마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전쟁은 기원전 73년, 이탈리아 본토에서 일어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었다.
트라키아에서 온 노예 검투사
문헌에 나타난 스파르타쿠스의 생애는 자세하지 않고 문헌마다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많은데, 트라키아 출신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이나 그 소설을 기본으로 해서 1960년에 만들어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는 스파르타쿠스를 대대로 노예였으며 광산에서 일하다가 검투사로 뽑힌 것으로 그렸지만, 문헌에 따르면 그는 로마 군에 소속되었다가 탈영하고, 그 때문에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무예가 뛰어났기에 검투사가 되어, 카푸아 근교에 바티아투스가 소유한 검투사 양성소에서 지내게 된다. 그가 본래는 트라키아의 왕족이었다는 문헌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여느 노예들과는 달리 유식했으며, 냉철하고 신중했다고 전한다.
검투사 경기 역시 로마가 포에니 전쟁 이후 급속도로 번영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하지만(에트루리아의 장례 예식 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다), ‘국민 오락’이 될 정도로 널리 퍼진 것은 자극적인 오락거리를 찾는 부유층과 불만에 찬 서민층, 그리고 넘칠 만큼 많은 노예들 때문에 가능했다. 정치가나 장군들도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검투사 시합을 종종 개최했다.
검투사는 오늘날의 프로 격투기 선수라고도 볼 수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시합의 보수도, 가족도, 생명도 보장되지 않았다. 훈련을 마친 검투사는 “나는 기꺼이 채찍으로 맞고, 불에 태워지고, 칼에 찔려 죽겠습니다.”라고 맹세해야 했다. 그리고 아무런 영광도 보답도 없는 싸움터로 나갔다. 그래도 검투사가 되면 잘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검투사를 자원하는 노예도 없지 않았으나, 결국 동료의 손에 찔려 경기장에서 죽어갈 운명이었다. 일부 용맹한 검투사는 팬을 끌어모으기도 했지만, 죽고 나면 검투사 전용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매장될 뿐이었다.
도망이 아닌 전쟁을 선택하다
스파르타쿠스는 약 70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바티아투스의 양성소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면,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 일은 없었으리라. 스파르타쿠스는 도망이 아닌 “전쟁”을 선택했다. 카푸아 일대를 누비며 검투사들뿐 아니라 농장 노예, 광산 노예들에게도 합류를 권유했고, 그래서 수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루었다.
당연히 로마가 그들을 내버려둘 리 없었다. 지방총독 가이우스 클라리우스가 이끄는 3천 명의 병력이 출동했으나 스파르타쿠스 군은 그들의 야영지를 야습, 진압군은 전투도 제대로 못 해보고 전멸한다. 로마는 다시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에게 1만 2천의 병력을 맡겨 파병했으나, 이들 역시 스파르타쿠스에게 격파되고 만다. 이후 그의 군대는 세 차례의 큰 전투에서 승리하며 3년 동안 이탈리아를 휩쓸고 다녔다.
어떻게 “인간 이하의” 노예들의 군대가 세계 최강의 로마군을 연거푸 쓰러뜨릴 수 있었을까? 당시 반란을 일으킨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느라, 로마군의 주력이 폼페이우스의 지휘 하에 에스파냐에 가 있었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검투사들은 일대 일의 전투라면 군인들보다도 전문가였고, 여기에 한때 로마군에 있었기에 로마군의 전법을 잘 알고 있었던 스파르타쿠스의 탁월한 전술과 지도력이 더해지면서 큰 효과를 보았을 것도 같다. 하지만 하워드 패스트의 말처럼 다른 어떤 군대보다 달랐던 이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쌓이고 쌓인 원한과 울분, 노예로 살기보다 전사로서 죽겠다는 결의, 그런 정신에 불타고 있던 이 노예군단에게, 사치에 찌든 귀족 자제들의 보병대나 돈을 바라고 군대에 들어간 군단병들은 사기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6천 개의 십자가
문제는 스파르타쿠스의 목표가 과연 무엇이었느냐는 점이다. 게르만족 출신이라는 동료 크릭수스는 로마로 쳐들어가자고 했으나, 스파르타쿠스는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크릭수스는 3만의 병력과 함께 스파르타쿠스와 따로 행동하다가 로마군에게 패배한다.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카푸아에서 한동안 남하하다가, 방향을 돌려 이탈리아 반도를 타고 오르며 계속 북진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게르만의 땅으로 가려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알프스를 목전에 두고, 그는 다시 남하하기 시작한다. 오던 길을 되짚어 반도 서남단인 레기움까지 이르렀는데, 여기서 배를 타고 노예반란이 먼저 일어났던 시칠리아로 건너가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미리 돈을 주어 선박을 대기시키기로 했던 해적들이 더 많은 돈을 주겠다는 로마의 유혹에 넘어가 배반해 버린다. 발이 묶인 그를 향해 새로운 로마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처럼 3년이나 걸려 이탈리아를 남북으로 오르내린 까닭을 두고 역사가들의 해석은 분분하다. 단순히 지도부의 의견 통일이 되지 않았다거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움직인 것이라고도 한다. 한편 약 150년 전, 역시 이탈리아 반도를 오랫동안 종횡하며 “로마에 반대하는 도시들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한니발처럼 스파르타쿠스도 뭔가를 기다린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도 있다. 혹시 로마의 모든 노예들이 자신들처럼 복종을 거부하고, 무기를 들어 자신들의 주인에 맞서기를 기다린 게 아닐까? 그래서 로마라는 도시가 아니라 로마라는 거대한 세계를, 아니 노예의 희생에 기대는 체제 자체를 없애버리려 하지 않았을까?
스파르타쿠스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거듭된 패배에 넋이 나간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에게 로마로 돌아오라고 요청하는 한편 크라수스에게 진압을 부탁했고, 그가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크라수스는 당시 로마에서도 굴지의 부자였다. 그가 원정군 사령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재력으로 순식간에 대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처음에는 스파르타쿠스에게 패했다. 그러나 패주한 병사들을 일렬로 세우고는 열 번째 줄에 서 있는 병사들을 본보기로 처형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의 군대는 공포감 때문에 열심히 싸우는 군대로 거듭났다. 그리하여 결사적인 노예군단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남하를 계속하던 스파르타쿠스가 레기움에 발이 묶이자, 크라수스는 이를 놓치지 않고 압도적인 병력을 집결시켰다. 스파르타쿠스는 접전 끝에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지만 1만 2천의 병력을 잃었다. 북쪽에서는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로 들어오고 있었고, 동쪽 해안으로 가는 길목은 루쿨루스가 철통 같이 지키고 있었다.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동쪽으로 가던 끝에 실라루스 강가에서 크라수스군을 맞아 최후의 전투를 치렀다.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마지막 순간 그는 혼자서 황금빛 독수리의 깃발을 향해, 사령관의 표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십 명의 로마 병사가 그를 둘러쌌다. 그는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다.”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을 돈으로 사는 일을 혐오하여 일어섰던 자가, 돈으로 가장 많은 인간을 살 수 있었던 자에게 패했다.
로마에서 인기가 좋았던 폼페이우스는 실라루스에서 패배해 달아나던 스파르타쿠스군의 잔당을 처리했을 뿐이었는데, 승리의 주역인양 화려하게 개선식을 했다. 분통이 터진 크라수스는 나름대로 분풀이를 했다. 포로가 된 노예군 6천 명을 반란의 시작지인 카푸아에서 로마에 이르는 길목에다 줄줄이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이다. 인간이 되고자 했던 노예들은 극심한 고통 끝에 숨지고, 시체는 독수리의 밥이 되었다.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스파르타쿠스는 사상가나 웅변가가 아니었다. 진승은 “왕후장상에 어찌 따로 씨가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고, 존 볼은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베를 짤 때, 귀족이 어디 있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지만, 그에 걸맞은 스파르타쿠스의 말은 남아 있지 않다. 아니, 아마 그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노예들은 글을 몰랐고, 말을 전하기 전에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래도 스파르타쿠스의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뚜렷한 말로, 거대한 “외침”으로 남았고, 그들의 마비된 양심을 뒤흔들었다. 고전고대의 모든 사상은 인간은 어째서 평등하지 않은가를 설명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의 본성을 가진 사람과 귀족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했고, 공자와 맹자는 소수의 군자를 다수의 소인이 먹여살리는 일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노예로 태어난 것도 신의 뜻이므로 불평하지 말라고 했으며,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귀족이든 노예든 모두 덧없는 환상이므로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외침은 비로소 이 모든 가르침에 거대한 의문 부호를 던졌던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지 않느냐는.
스파르타쿠스를 죽인 크라수스는 대표적인 군벌의 하나로 성장해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삼두정치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이후 제국으로 바뀐 로마도, 검투사 시합도, 노예제도도 모두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기억은 더 오래 살아남았다. 18세기 말 아이티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노예 출신의 투생루베르튀르는 “검은 스파르타쿠스”라고 불렸고, 20세기 초 독일에서는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혁명가들이 “스파르타쿠스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칼 마르크스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스파르타쿠스를 꼽았다. 체 게바라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도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다. 인간은 영원히 평등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스파르타쿠스의 이름도 영원할 것이다. 칼릴 지브란의 말을 비틀면, 또 다른 여인이 스파르타쿠스를 낳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 검투사 출신으로 노예반란을 일으킨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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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이채훈의 힐링 클래식 / 2015년 1월 27일자 미디어오늘>
MBC가 권성민 PD를 해고했다는 소식에 한숨이 나온다. 권 PD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양심과 열정과 순수를 지닌 후배가 분명하다. 불의한 경영진을 비판하고, 모순된 현실을 고발해서 불이익을 받았으니 말이다. 권 PD는 ‘자유와 창의과 책임’으로 요약되는 MBC PD의 전통을 이어갈 자랑스런 후배다.
권 PD의 고교시절 은사님이 ‘해고 철회’ 서명을 제안하며 묘사한 권 PD는 참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인 듯하다. 수능이 끝난 뒤 교회에서 뮤지컬을 연출했고, 대학시절엔 고교 후배들의 연극을 다듬어 주었고, 군 복무 중에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한 우물 파주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은사님은 권 PD를 “제자라기보다 젊은 벗”이라 불렀고, 이런 그가 ‘오늘의 유머’에 올린 웹툰 때문에 해고됐다는 소식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MBC 경영진은 이미 정직 6개월을 받은 권 PD가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 했으니 해고가 불가피하다는 형식논리에 갇혀 있는 듯하다. 똑같은 형식논리로, 정직 6개월이 부당징계였다면 이번 해고 조치는 더 부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재판으로 가면 부당해고 판결이 나올 게 확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언론사 내의 표현의 자유는 일반 기업보다 더 넓게 인정돼야 한다는 판례도 있다. 하지만 MBC 경영진은 일단 해고하면 임기 중에는 권 PD를 안 볼 수 있다고 계산한 것 같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격언을 실감케 한다. MBC 경영진은 자기 인생이 하루살이처럼 가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1월 28일 재심에서 해고 조치를 백지화하는 게 모두를 위해 좋지 않겠는가?
MBC 경영진은 짧고, PD의 연출 인생은 길다. 권 PD는 시청자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는 게 사명인 예능 PD다. “삶의 비극적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 진정 유쾌한 사람”이란 말이 있다. 작금의 시련은 권 PD가 더욱 뛰어난 예능 PD로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후배 권성민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과 함께 발레 <스파르타쿠스>를 보낸다.
1954년, 소련의 인민예술가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이 음악을 만들고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안무하여 발레 <스파르타쿠스>가 탄생했다. 이 발레는 웅장한 남성 군무가 장관이다. 크라수스 군대의 도도한 춤과 노예들의 고통스런 몸짓에 이어 검투사 대결 장면이 펼쳐진다. 향락과 사치에 빠진 로마 지배층은 노예끼리 결투를 시키고, 이를 즐겼다. 노예들은 자기가 살려면 동료를 죽여야 했다. 이기면 당장은 살아남지만 언젠가는 모두 죽을 운명이다. 동료를 찔러 죽인 스파르타쿠스는 더 이상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결심한다. 스파르타쿠스의 고통스런 독무에 이어, 쇠사슬을 끊고 떨쳐 일어나는 노예들의 군무가 이어진다.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자”라고 정의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순간 자유인으로 거듭났다. 1950년, 미국의 작가 하워드 패스트는 소설 <스파르타쿠스>에서 이렇게 썼다.
“바로 얼마 전, 이 사람은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금 그는 5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 그 군대는 역사상 최강의 군대다. 쉽게 말해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군대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군대가 있었다. 그 군대들은 국가, 도시, 전리품, 권력, 특정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싸웠다. 그러나 여기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있다.”
스파르타쿠스(BC 109 ~ BC 71)는 BC 73년, 70여명의 노예들과 함께 카푸아 근교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 로마 각지의 농노와 광부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로마 정부가 보낸 진압군을 두 차례나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로마 지배층을 공포에 떨게 했다. 로마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로 더욱 강력해진 그의 군대는 최대 12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BC 71년 원로원이 파견한 크라수스의 대군에게 패배하여 죽음을 맞았다. 이때 병사 6,000명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됐다고 하니, 예수가 십자가에서 희생된 것보다 훨씬 더 큰 사건이었다.
발레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무장 봉기는 성공하는 듯 보인다. 크라수스와의 첫 대결에서 그를 생포한 것.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를 용서하고 풀어준다. 자존심이 상한 크라수스는 복수를 꿈꾼다. 아내 에기나가 간계를 꾸민다. 여자들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 진영에 잠입, 반란군들을 유혹하여 술을 먹이는 것이다. 모두 환락에 취해 넋을 놓은 틈을 타서 진압군이 반란군 캠프를 급습한다. 반란군은 무자비하게 살육되고, 스파르타쿠스는 수십 개의 창에 찔려 숨을 거둔다.
애도의 합창이 울려 퍼지면 프리기아가 비탄에 잠겨 처절하게 춤춘다. 눈물을 억제할 수 없는 비극적 결말이다. 죽은 스파르타쿠스의 가슴에서 프리기아가 꽃처럼 피어난다.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스파르타쿠스의 이상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프리기아는 스파르타쿠스가 사용했던 방패를 그의 가슴에 얹어 준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리 평등하지는 않다. 서민들의 주머니를 샅샅이 털어가고, 이에 항의하면 종북 딱지를 붙여 침묵을 강요한다. 갑질이 전 사회에 독버섯처럼 퍼져가고, 사람다운 사람은 해고를 각오해야 한다. 스파르타쿠스는 시대를 너머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가슴에 불꽃을 일으켜 왔다.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앞으로도 이 비극적인 발레 속에 오래도록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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