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단국대학교 토목공학과 82학번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스크랩 펌 시라소니 이성순의 아들 이의현이 만든 시라소니 연표
김용인 추천 0 조회 196 08.01.25 13: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의 주먹 황제, 시라소니 이성순.  알 사람들은 알테고, 모르는 사람들은 모를테지만, 낭만주먹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는 사상 최강의 주먹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주먹왕은 김두한이 아니었나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언제나 혼자서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길 즐겼고 상대가 몇 명이든, 어떤  무기를 들고 덤벼오든 오직 혼자서 맨몸으로 싸웠다. 그리고 그 모든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의 평생, 그는 독불장군으로 아무 조직도 받쳐주는 이도 없었으면서  홀로 당당하고 자유로운 행로를 걸었고, 그 누구도 감히 가로 막지 못했다. 신마적과 상하이 박등 쟁쟁한 주먹들도 그와의 대결을 피하기 바빳고 김두한도 종로, 그것도 자신의 정식 나와바리 우미관에서 시라소니에게 아니키(형님)이라 부르며 무릎을 꿇었다.

모두가 그를 세계 최고의 주먹으로 또 큰 형님으로 여긴것이다.

 

 

낭만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이정재 사단의 집단린치 이후,

시라소니는 그 생애 그 단 한번의 패배 끝에 주먹계에서 은퇴하게 되지만, 이정재 사단의 오른팔 이었던 유지광은 훗날의 자서전을 통해서 그를 아시아 최고의 주먹 황제라 칭한다.

 

홀홀 단신으로 만주와 북경 상하이 한반도를 휩쓸며

마적들과 왜병들마져도 두려움에 떨게 하였던

주먹 황제 시라소니.

 

앉은 자리에서 3미터를 뛰어넘고, 도움닫기로 밭 한고랑을 넘었으며 조그만 집이나 정자와 같은 건물을 가볍게 뛰어 넘어다녔다 한다. 시라소니는 6.25 당시 미군 특전부대에서 잠시 소속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미군 한명이 사람 5명을 엎드리게 하고 그것을 뛰어넘자, 시라소니가 사람 9명을 세워놓고 거의 제자리에서 뛰어넘어 미군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의 대표적인 일화들은 여러가지가 있느나 그 모두가 감히 인간으로서 가능한 정도의 일들인가 싶을 정도의 것들이다

만주와 북경 상하이 등을 홀로 떠돌며 전설을 만들어 낸 그는

중국, 만주 일대의 모든 무술인, 야쿠자 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최강의 주먹이으로 인정받았다.

 

봉천에서 깡패 40명과 싸우기도 하고.

천진에서는 그 마을을 지배하고 횡포를 부리던 야쿠자 조직에게 친구가 잡혀가자 혼자서 찾아가 조직하나를 박살내기도 했다. 그 강함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들 뿐이지만 그가 싸움을 정말 잘하긴 잘 햇엇나 보다.

 

김두한이 주먹을 떠나고 동대문은 전국을 통일할 생각으로 과거 김두한이 통일했던 지역의 70% 이상을 손에 쥐고 그 전성기를 떨치는데,  그와 유일하게 맞서고 있었던 곳이 바로 서북 청년 모임인 명동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낭만주먹의 계보를 지키고 있다 믿었기 때문에 정치권의 세력을 등에 업은동대문과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그러나 숫적으로나 여러 모로 명동은 동대문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동대문이 명동을 쳐들어 오지 못한것이 바로 시라소니의 존재 이유였다.

 

그 혼자서 명동의 전체 힘에 5할에 해당한다고 했을 정도...

시라소니가 있기에 동대문은 감히 명동에 선전포고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대문에서 시라소니를 얼마나 무서워 했는지 나오는 대목이 있는데 시라소니가 집단 린치 이후에 국회의원조봉암씨의 보디가드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조봉암씨는 자유당에 의해 심한 견제를 받았는데 그 선장이 동대문의 이정재였다.

이때도 역시  이정재가 조봉암이 연설하는 것을 방해하기위해 트럭 세대에 부하들을 실어 습격하기로 했는데 그 30~40명이 넘는 그 사람들이 조봉암 옆에 졸린 듯 서 잇는 시라소니를 보고 바로 습격을 포기한체 도망갓다고 한다.

린치 이후에도 그를 보고 도망?으니 그 강함은 진짜 였나 보다.

 

 

<결혼사진>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과연 말이냐 되느냐고

생각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별로 말이 안 될 것도 없다.

1대 다수의 싸움. 혼자서 30~40명씩을 상대하는 일.

 

이건 의외로 간단하다. 최대한 적게 맞으면서

단 한방씩만으로 상대를 쓰러트리면 된다.

인간의 몸이란 너무나 간단하여 급소를 제대로 한방만 맞으면 쓰러지게 되 있다.

그러니 그런 급소에 단 한방씩만 맞혀 쓰러트릴 수 있다면

일대 다수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의 일화는

모두 단 한방만으로, 또, 한번에 3~4명이 나가 떨어졌다는

식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집 같은 건물을 훌쩍 뛰어 다닌다 했는데

이는 성룡의 영화를 보면 성룡이  높은 벽같은 곳도 훌쩍 넘어 다니는 걸 떠올리는 간단할 것이다.

시라소니의 전설과 같은 일화들은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되지만 불가능하다 매도할 일도 아니다.

 

 

참고로 난 이 시라소니 이성순님의 아들인 이의현 목사님이

만든 시라소니 홈페이지에도 가입해 제일 먼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느 인간을 신으로도 만들어 추앙 하는 건 바로 인간 스스로다. 요즘엔 이 시라소니를 추앙하는 이들이 역사에나 등장하는 관우와도 장비와도 싸워 이길 거라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최배달과 또는 이소룡과 시라소니의 가상 대결을

그리며 논쟁을 토한다.

 

물론 나도 그것을 믿어 의심치는 않으나 그런 유치한

쓸데없는 논쟁엔 눈이 찌뿌려진다.

그래서 그 홈페이지엔 이런 정말 갖지도 않는 논쟁들이 너무나도 많아 발길을 끈었지만, 중요한건

어디까지나 난 그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시라소니 일대기를 다룬 글을 첨부하여 올린다.

저글은 내가 아닌 다른 님이 쓰신 글로

이미 넷상에는 꽤 퍼졌을 듯한 글이다


 


 

 
시라소니 이성순의 아들 이의현이 만든 시라소니 연표

1916년

2월 29일 평안북도 신의주 미륵동에서 출생

1929년

불곰과의 대결 승리

1932년

밀무역에 뛰어 듦

기차

헌병대와의 싸움

명견 도비와의 싸움

1933년

정경봉(독종 꽈리 주둥이)과의 결투 승리

1934년

누님이 계신 상해를 다녀오다.

친구를 때린 진남포 깡패들과의 싸움 승리

1935년

도박장 습격

1936년

평양 최고의 주먹 박두성을 찾아가 결투, 승리

1937년

신의주 청송회관 용심봉 장손과의 대결

기차도주 때 일본 헌병 때려눕힘

7월7일 대동아 전쟁

군부반장 하야시(검도3단)와의 대결

4개월후 신의주 일시귀국 어련공판장 중개인 보스와 시비, 항복 받아 냄

1938년

외환 관리법 사건

6월 천진 도박장 도미나 까페에서 일본헌병 3명을 때려뉘다

8월 신마적과의 대결 승리

마약장사 야마모토 사건과 18기의 명인 북경의 마오와 대결 승리

1939년

상하이 까페에서 헌병대장과 대결 승리

새끼 손가락 사건

이상대와의 대결 승리

1940년

국제 도박장사건

상해 프랑스 조계지 미국인 탈영병과의 격투

1941년

북경일번지까페에서 일본여인 지혜꼬에 관한 사건

1942년

개봉 용정유원지에서 일본 특무 대원과의 결투

1943년

친구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

일본 꼬구라 형무소수감 중 일본 최고의 주먹 이즈마 누임

1945년

7월 해방 15일전 천지외교 공장에서 카네미야 패거리 40명과 대결 승리

8월 15일 해방

1946년

1월 남하 개성당도

2월 종로 우미관에서 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만남

      명동파 행동대장 무먹을 누름

3월 인천행 인천주먹들 정복사-지금도 시라소니떴다라는 소문에 우는  아이들도 조용

11월 서북청년단이 조직 됨

1948년

봄 인천떠나 서울도착 서북 청년단 감찰부장이 되다

       10월 동국대부근 일본인 아파트

1949년

이진옥과의 결혼

백범김구 당시 국군 장교이던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

1950년

6월 25일 전쟁(아내 임신4개월)

호림부대(비 정규부대)창설

9월 대원활약 15일 인천 상륙 작전

북상하는 아군부대 최 선방 활약

10월 묵호산간 대관령 적군 30명 기습섬멸 함흥까지 북진

11월 26일 중공군 대공세

1951년

1.4후퇴

봄 부산에서 10명패거리에 매맞는 이정재 구해줌

1952년

김일환과 만나 제주도로 장도영 만남

조봉암 선거 개입 땃벌 때 물리 침

아내와의 재회

1952년

8월 4일 오후 조봉암 김성주와 헤어짐

황병관 살해한 마사이찌 혼냄

3.1부대창설(현공수부대) 부부대장으로 활약 미군장교와의 대결

1953년

이정재와의 사건

종로5가 보령약국자리 반도병원-필동단칸 집-백병원 입원

1954년

초봄 백병원 나섬

북쪽으로 발길 옮김 팔당 산기슭에서 복수를 준비(칼쓰기, 사격연습, 무술연마)

몇번이나 저격권안에 들어온 이정재, 하나님이 살려 줌

1955년

인천행 질서 부두를 바로잡다

1956년

장면 박사로부터 편지 옛 소공동에서 자리잡은 경향신문 사옥에서 만남 선거운동

당선 후 헤어짐

1958년

조병옥 선거운동

1960년

2월2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 서거

이승만 3월의 대통령과부통령 선거에서 야당 대통령 입후보자인 조병옥이 병으로 죽음으로써

쉽게 당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데모

4월 19일 4.19의거

4월 21일 전 국무위원 사표 제출

4월 25일 대학 교수단 데모,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발표,

4월 27일 이승만대통령 국회에 사표 제출

4월 28일 과도 내각 수립, 4월 28일 이기붕 일가 자살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 망명으로 끝나게 된다.

1960년

7월 21일 아들 이의현 태어나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한 군인들이 반공과 부패, 부정의 일소 및 국가 재건을 내세우며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혁명.

5월 21일 이정재 등 깡패 200여명, 서울 시내 가두에서 군인들이 조리돌림

명현 교회 나가 이장수 목사님에게 권총과 칼을 바침

5월 22일 최고회의, 용공분자 2천여명, 깡패 4천2백여명 검거 발표.

6월 4일 깡패 965명, 국토개발사업장에 작업 동원

8월 17일 이정재(李丁載)에게 사형이 선고되다. 사형은 9월 19일 집행되었다

.

.

.

.

.

.

1983년


2월 25일 시라소니 이성순님 사망

출처 : http://www.sirasoni.org/index.php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 주먹의 황제 김두한

 

 

 

                          김두한의 가족들(가운데 따님 김을동)

 

                                     김두한의 결혼식 사진

 

                                                        김두한

                                          민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김두한

 

                               박정희 소장과 함께

 

                                        그 당시 우미관 식구들

 

 졸린 눈에 팔자걸음? 이 사람이 바로 전설의 싸움꾼 시라소니

 

 

 

 

 이 사람이 바로 정치 깡패  이정재 (박정희의  혁명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