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1153)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나는
― 박수호
이름만 불러도 시가 된다고 하네요
복수초 꽃마리 씀바귀 가시엉겅퀴 쑥부쟁이 벌개
미취
산수유 이팝나무 천리향 아그배나무 수수꽃다리
자귀 쥐똥나무 배롱나무
이름은 이름에서 시작해서 이름으로 이어진다는
말을
꽃과 꽃, 나무에서 나무로
눈길을 건너가며 듣고 있습니다
내영이 청계 구철이 미정이 영수 부식이 보경이
명옥이 열래 정선이 로담 정민이 정희 영숙이
상문 영춘이 규한 기자 정수 인덕이 양수 화담이
흥순이 창용이 정록이 병호 영자 영현이 공님이 영
희 춘환이 석천이 승덕이 길호 석용이……
그리고 너 나 우리
입가에 밥풀처럼 묻어 있던 웃음들
윤이 하린이 지혜 완이 지정이 진규
이쯤 되면 이름을 부르는 일이
꽃 같다고, 시 같다고
하여도 될는지 모르겠네요
남김없이 피고 지는 꽃처럼
이름은 저마다의 생각을 굴리며 가겠지요
햇살 부산하여
이 고요를 눈치채지 못하듯
새소리 꽃가지를 옮겨 다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 특정 어구 혹은 단어와 같은 표현에 무릎을 치게 된다. 이 경우 독자들은 어떤 시의 특정 구절을 잘 기억하게 된다.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지’란 감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주제의식이나 표현과는 상관없이 이를 전달하는 형식, 즉 시의 구성과 관련한 현란한 기법에 무릎을 치기도 한다. 행갈이를 어느 부분에서 했느냐 혹은 연 구분이나 각 연의 배치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주제의식을 좀 더 명확하게 전하기도 한다.
박수호의 시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나는>은 그런 면에서 형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전체 아홉 개의 연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2, 4, 7 연은 여러 종류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특히 2연과 4연은 이름들뿐이다. 우선 연을 따라가며 읽어 보자.
1연에서 ‘이름만 불러도 시가 된다’고 전제를 하고 2연에서 이름을 부른다. 2행으로 된 2연은 꽃, 나무, 풀 들의 이름이다. 행갈이를 계절별로 한 것도 아니요 꽃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배열한 것도 아니다. ‘이름만 불러도 시’가 되기에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일 뿐이다. 3연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름은 이름에서 시작해서 이름으로 이어진다’는 또 다른 전제를 통해 꽃 이름에서 꽃 이름으로, 나무 이름에서 나무 이름으로 옮겨졌을 뿐이란다.
화자는 이렇게 이름이 옮겨지는 것을 ‘눈길을 건너가며 듣고 있’다는데, 여기서 ‘눈길’은 중의적이다. 눈(雪) 내린 길이기도 하지만 시선(視線) 즉 눈으로 바라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물론 시 내용의 흐름으로 보면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렇게 이름이 불린 꽃, 나무 혹은 풀 들로 시선을 옮겨가며 부르는 이름을 듣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2행으로 열거된 꽃, 나무, 풀 이름들은 화자에게 다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4연은 사람 이름이다. 3행으로 이루어진 인명(人名)은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1행과 2행은 이름 숫자가 같지만 3행은 너무 많아 행이 넘어간다. 시인이 접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등교사로 퇴임하고 시창작 교실을 운영했으니 제자는 물론이거니와 수강생들이 오죽 많았겠는가. 거기에 사회활동 혹은 문단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사람 또한 많을 것이다. 그렇게 시인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불러보는 것이다.
5, 6, 7 연은 이어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된다. 4연에서 부른 이름들은 바로 ‘너 나 우리’가 되고 그렇게 이름을 부르다 보니 ‘입가에 밥풀처럼 묻어 있던 웃음들’도 보이는 것 같으리라. 그리고 다시 이름을 부르는데, 7연 1행의 이름들은 앞의 인명보다 시인과 더 가까운 혹은 특별한 사이로 느껴진다. 그렇게 이름을 부르다 보니 ‘이름을 부르는 일이 / 꽃 같다고, 시 같다’ 해도 되겠단다. 바로 꽃에서 꽃으로, 나무에서 나무로 그리고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이름들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이다. ‘이름은 이름에서 시작해서 이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이름들이 ‘피고 지는 꽃처럼’ 각각의 이름 ‘저마다의 생각을 굴리며 가’는 게 보인다. 그렇게 생각에서 생각으로 이어지는 행위는 소리가 없다. 그러니 ‘햇살 부산하’지만 ‘이 고요를 눈치채지 못하듯’ 한다. 그런데 마지막 연이 동떨어져 있다. 왜 그럴까. 추정컨대 이 시의 마지막 두 행은 초고에 이렇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나는
새소리 꽃가지를 옮겨 다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야 바로 앞의 행 ‘이 고요를 눈치채지 못하듯’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라고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렇게 되면 꽃, 햇살, 꽃잎, 바람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나는’ ‘새소리 꽃가지를 옮겨 다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표현이 있다. 초고의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나는’처럼 중간에 쉼표가 오면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동작과 나의 행위는 독립된 별개의 행동이 된다. 즉 쉼표가 있으면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동작과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행위는 전연 별개의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풍경을 바라보는 나 그리고 나의 행위는 꽃, 햇살, 꽃잎, 바람… 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이자 행위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시인이 마지막 두 번째 행을 뚝 떼어 제목으로 올려놓으며 본디 말하고자 한 내용이 좀 다르게 나타난다. 즉 제목처럼 쉼표를 없애면 나의 ‘바라보고 있습니다’란 행위는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동작에 이어지는 행동이 된다. 흔히 말하는 ‘그리고’로 이어지는 순접이다. 즉 꽃잎의 움직임과 나의 행위가 열거되면서 두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으로 표현된다.
전혀 다른 두 행위, 1연에서부터 8연까지 이어진 행위들 – 이름을 부르는 행위, 그렇게 불린 꽃, 나무, 풀, 사람 이름들이 이름에서 이름으로 연결되며 생각이 이어지지만, 그 생각들은 바로 ‘꽃잎은 바람에 날리’듯이 그저 조용히 이어질 뿐이고 나는 그런 모습 - ‘새소리 꽃가지를 옮겨 다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란 뜻이다.
시 속 화자의 이런 행위 – 초연(超然)하다거나 아니면 유유자적(悠悠自適)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어찌 읽으면 넋두리 같지만 실은 꽃, 나무, 풀 들은 물론이요 그간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까지 화자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꽃, 나무, 풀, 사람 들로부터 나온 생각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다만, 그 생각들로부터 화자는 초연한 상태, 흔히 말하는 ‘무연(憮然)’의 상태이다. 나쁘게 말하면 아무런 생각이나 뜻 혹은 의지가 없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그간 살아온 궤적이나 일상으로부터 초연한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읽힌다.
그래서일까.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해맑은 미소가 떠오른다. 세상사에 무심한 듯, 아니 그런 일로부터 초연한 마음 상태에서 나오는 웃음이지 싶다. 나는 언제쯤 그런 평정심을 갖게 될까. 시인의 마음 상태가 부럽기 그지없다. ♣
―http://blog.naver.com/lby56(이병렬 교수의 블로그, 현산서재)
첫댓글 문득 이병렬 교수님의 시감상있어서
이곳에 옮깁니다.
이 글은 이병렬교수님의 블로그 <현산서재>에 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시 와 해설이 좋습니다. ^^
이교수님께서 제 시를 읽고 나서 느낌을 말해 줍니다
어쩌면 내가 시속에서 전하고 싶어했던 느낌을 꼭 찝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시를 통해 알리고 싶었던 느낌이나 메시지를
'숨은 그림찾기'처럼 나름 잘 드러나지 않게 숨겨두는데
그것이 이교수님 눈에는 다 보이나 봅니다.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그렇게 다 읽어내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겸손하게
"정서적 코드가 같아서가 아닐까요?"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교수님은
'박수호의 시는 쉽게 읽힙니다'
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나는 잘 모릅니다.
사실 그런 것이 궁금하더라도 함부로 이야기는 그렇습니다.
내가 써서 발표하는 이후에는
읽는 분이 어떻게 느끼건 그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인연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의 "단풍잎"이란 시를 해석해주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때가 그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