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0일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Lor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him, and said, “I do will it. Be made clean.” And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는 세상을 이긴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있다고 증언한다. 믿는 이는 이 증언을 마음에 간직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주십사 간청하는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신다. 그리고 소문을 내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증거가 되게 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분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퍼져 나간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나병’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에서 매우 인상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병으로 여겨져 그 병을 앓고 있는 이는 참으로 비참한 처지의 삶을 이어 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의 깊은 연민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 대한 그분의 자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병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제가 처음 느낀 것은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극장에서 본 ‘벤허’라는 영화에서였습니다. 주인공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린 장면이 나오는데, 이들이 동굴에 숨어 살고 또 온몸이 종기투성이여서 사람들이 피하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며 본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한하운이라는 나환자 시인의 시를 배우며 그의 기구한 인생에 먹먹해지기도 했고, 고등학생 때에는 경남 산청에 있는 음성 나환자촌에서 봉사 활동을 한 기억도 있습니다.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보살폈던 오스트리아 수녀님들의 미담을 언론을 통해 보고 듣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유럽에 가서는 학생 때 전기를 읽었던 ‘나환자의 성자’ 다미안 신부님의 출신지인 루뱅이라는 벨기에의 작은 도시를 들러 그분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니, 저에게 나병 환자란 그저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에서 애처롭게 여기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깊이 그들의 고통과 처절함에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당사자와 주님께서만 아시는 고통이 얼마나 많겠는지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피상적인 이해와 말로 그 아픔의 무게를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대하였는지 저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첫 번째 펭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펭귄들은 바다에 뛰어들기 전에 서로 눈치를 보면서 한참 동안 머뭇거립니다. 그러다가 한 펭귄이 바다에 뛰어들면 비로소 그 뒤를 수백 수천 마리가 바다로 다이빙을 하는 장관이 연출되는 것이지요.
펭귄들이 주저하는 까닭은 천적 때문이라고 합니다. 섣불리 바다에 들어갔다가는 바다표범이나 물개에 잡아먹힐 수도 있습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한시라도 빨리 바다에 들어가 먹이를 잡고 싶지만, 물속에 있는 천적들에 대한 걱정으로 감히 뛰어들지 못하고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전히 확인되기 전까지는 눈치 보기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마리가 과감하게 바다에 뛰어들 때, 이때다 싶어 모든 펭귄이 바다로 함께 뛰어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바다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펭귄이 없으면, 그들은 한참동안을 굶주리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펭귄들이 바다로 들어가게끔 만드는 가장 먼저 바다로 뛰어 든 첫 번째 펭귄처럼,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용기를 도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첫 번째 펭귄’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과연 ‘첫 번째 펭귄’처럼 살고 있을까요?
사실 우리의 인생도 이 펭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 역시 펭귄처럼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남들의 눈치를 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해야 그때 가서야 행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도 남들도 하지 않는다면서 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다에 뛰어 들어가지 않음으로 인해 굶주릴 수밖에 없는 펭귄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얻을 수 있고 또한 마땅히 얻어야 할 것들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나병을 치유해 주시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나병 환자의 커다란 용기가 숨어있습니다. 당시 나병은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벌을 받은 가장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지요. 이런 나병 환자가 과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그랬듯이, 나병 환자가 나타나면 돌을 던져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사람들을 벗어나 척박한 땅에서 나병 환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 수밖에 없었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찾아온 나병 환자가 얼마나 큰 용기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도 전에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지긋지긋한 나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용기 내어 예수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용기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 용기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만듭니다.
인생을 향해 미소지으면 미소의 반은 자신의 얼굴에, 나머지 반은 타인의 얼굴에 나타난다(티베트 속담).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작은 자로 남으십시오>
어미개가 새끼를 낳을 때 마다 아이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입니다. 학교 돌아오자마자 책가방 휙 던지고는 개집 주변을 떠날 줄을 모릅니다. 좋아 죽습니다. 안고, 쓰다듬고, 머리 높이 까지 올렸다가 내렸다가...
한 동안 덩치 큰 개들은 찬밥입니다. 아이들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때로 어리다는 것, 작다는 것,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나이가 7-8세 되고, 체격도 어른만한 큰개는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습니다. 누구도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예뻐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녀석들 커졌을 뿐만 아니라 그간 세상 살아오느라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가는 법도 다 터득했고, 노련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보잘 것 없고, 말썽 많고, 때로 배은망덕한 우리를 이토록 극진히 사랑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어딘가가 잘 나서 그럴까요? 특출해서 그럴까요? 아니면 우리가 쌓아올린 선행이나 공적을 보시고 사랑하실까요? 우리가 큰 인물, 대단한 인물이라서 그럴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측은함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작음, 우리의 가련함, 우리의 기가 한풀 크게 꺾인 모습, 우리의 비참함 때문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 인간의 작음과 측은함이 하느님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가 구원이라는 진리를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환우, 그의 인생은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나병이 깊어져 온 몸으로 번졌습니다. 마땅한 치료약도 없던 시절, 그의 하루하루는 정말 혹독했습니다. 비참한 하루를 끝내고 차디찬 동굴 안에 몸을 눕히면서 드는 생각은 어떤 생각이었겠습니까?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빨리 하느님께서 나를 데려가셨으면...” 다른 한편으로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말짱한 몸으로 가족들에게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여지없이 아침 해는 떠오르고, 강물에 비친 얼굴은 어제보다 더 심해진 상태로 죽음 같은 하루를 또 다시 맞이하곤 했습니다.
이런 나환우의 고통을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모른 척 하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 한 마디로 그를 죽음과도 같은 투병생활을 끝내게 하십니다. 보송보송한 태초의 피부로 되돌려주십니다.
인간의 불행 앞에 절대로 가만있지 못하시는 자비의 하느님 그 실체를 명확히 볼 수 있는 참으로 은혜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요즘 와서 자주 드는 생각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절대로 큰 사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절대로 높은 사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절대로 기대치를 높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니까요.
낮은 곳에 서 있다 보면 좋은 것 한 가지는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냉대에도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은 끝까지 작은 자로 남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치유 받은 나환우처럼 하느님 앞에 우리의 허물과 나약함, 죄와 고통을 낱낱이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유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더러워졌기에 깨끗해졌다
-남상근 신부-
천형의 질병으로 여겨지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차마 자신을 주님께 보일 수는 없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더럽고 추하고 버림받은 몸을 들키지 않으려는 심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올 수는 있었으나 보일 수는 없는 처지, 그것은 지독하게 가련하고 애달픈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십니다. 치유의 행위로 주님께서는 접촉을 마다하지 않으시지요. 뭇사람들이 불결하다고 여기고 꺼리던 존재를 그분은 매만지십니다. 정결하지 못한 행위라고 빈축을 사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정말 사랑하면 상대편이 더러울 때 나만 깨끗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너를 완전히 수용하고자 할 때 약점과 결함은 너의 것만이 아니라 나의 것도 됩니다. 엄마는 아이를 씻기면서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매맞음으로 우리는 나음 받았고, 당신의 피 흘림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
- 최견우-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기적을 접하고 있습니다.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벌 (天刑) 이라고 생각했고, 나병 환자는 하느님과 공동체에서 거부된 소외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으나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찍혔으며 실제로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자신도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집니다. 부정한 사람이었고 전염성 병균을 소유한 자였기 때문에 고을에 들어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그처럼 그는 치유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같은 루카복음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 (17, 11 – 19) 을 보면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주님을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제한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단순하게 말씀하신 것과 달리, 이 구절에서는 구원의 힘을 지닌 주님의 손이 나병 환자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주님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예수님의 이러한 접촉은 깨끗한 사람도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율법보다 나병 환자의 치유를 더 우선하며, 율법 본래의 정신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이 치유 기적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인간관계에 금이 간 우리한테도 해당됩니다.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건넬 수 없는 우리의 이기심은 그 어떤 질병도 낫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깨끗해질 수 있다면 우리의 손이 더러워진다고 해서 그리 문제될 것이 있을까요 ?
세상을 이기는 힘
-김찬선신부-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어제의 요한의 편지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는데 어떻게 이기냐 하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얘기합니다. 요한의 편지는 오늘도 세상을 이기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드님은 물과 피로써 세상에 오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인간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며, 지배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고,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의 힘이 물보다 세기에 칼이 세상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까? 굴복시키고,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진정 세상을 이기는 것이고, 죽이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진정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이는 칼은 없는 것이 좋지만 우리를 살리는 물은 없으면 안 됩니다.
피를 흘리게 하는 칼이 더 힘이 있는 것 같지만 피를 흘리는 사랑이 더 힘이 있습니다. 칼은 죽이는 힘이지만 사랑은 살리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가면 칼도 무뎌지고 버려지게 되겠지만 세월이 가도 사랑은 영원히 힘이 있고 끝없이 기려집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마구 휘둘러대는 세상 권력을 보면서도 하느님의 지배하심을 봅니다. 그 권력 끌어봐야 5년이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물과 피로서 오셨습니다. 물과 피로서 우리를 씻으십니다. 물과 피로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요한의 편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칼을 휘두른 헤로데가 이긴 것이 아니라 구유에 천진난만하게 누워계신 아기 예수가 세상을 이긴 것이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가 이긴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 신앙 공동체를 꾸리는 이들
- 이영선 신부-
신앙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두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의탁입니다. 이는 온 우주가 그분한테서 비롯했음을 믿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신뢰와 의탁을 드러내는 방법은 감사와 찬미입니다. 또 한 길은 그러므로 그분한테서 비롯한 온 생명과 조화롭게 살며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를 드러내는 방법은 공동체를 꾸리며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드러내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와 찬미는 늘 사람과 온 생명을 향해 있어야 제대로 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공동체이신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아름다운 공동체로 사는 길에서 두 길은 하나의 삶을 이룹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길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너와 좋은 관계에 있기 위해 마음을 쓰고 그 마음 씀을 드러내면서 시작합니다. 너를 향한 이 마음이 깨끗한 마음입니다. 나병이 나은 깨끗한 영혼입니다. 시인은 "호수가 산을 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안을 수 있는 것은 가슴이 넓어서가 아니라 영혼이 맑아서입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내 영혼이 너를 담을 수 있을 만큼 맑고 깨끗한지 살펴봅니다. 맑은 호수가 산을 제대로 품기 위해선 고요해야 합니다. 영혼의 고요함을 위해 그리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의 영혼을 담기 위해 외딴곳으로 물러가신 예수님을 오늘 배웁니다. 함께 있기 위해 홀로 있음과 영혼의 고요함을 위해 물러남을 배웁니다. 오늘 너와 더 깊이 함께 있기 위해 외딴곳으로, 영혼의 고요함을 위해 고요히 머물러 있고 싶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정찬호-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모범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애의 중요한 순간에 앞서 늘 기도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기도 안에 머물러 계셨고(3,21), 열두 제자를 뽑기 전에는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기 전에 홀로 기도하셨습니다(9,18). 그리고 십자가에서 숨지기 직전에도 아버지를 향해 기도하셨습니다(23,46). 예수님께서는 진정 ‘기도하는 분(Homo Orans)’이셨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특히 ‘일상 안에서의 기도’를 강조하십니다. “장터에서나 혼자 산책할 때에도 자주 그리고 열심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중에도, 또는 요리를 하는 중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인은 기도 안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 기도에 맛 들이는 과정을 돌이켜보니, 약간의 연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딱 열 번만 예수님을 떠올리기! 아침에 일어나서, 운전하면서, 토론 중에, 길을 걸으면서, 그리고 가끔은 유혹의 순간에…. 지금 이 순간도, 저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작품인 다비드 상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다비드 상이 드디어 피렌체의 시민에게 선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후원자였던 피렌체의 귀족이 다비드 상을 바라보면서 미켈란젤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아무리 봐도 코가 좀 두툼한 것 같지 않소?”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연장을 집어 들고 곧바로 조각상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코를 깎아내는 척 하면서 가지고 갔던 대리석 부스러기를 조금씩 아래로 흘려보냈지요. 결국 다비드 상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코를 깎는 흉내만 낸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아래로 내려온 미켈란젤로에게 귀족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주 좋소! 이제 완벽하오.”
인간의 눈이란 이렇게 불완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것도 완벽하게 옳다 그르다 판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 인간의 눈만을 믿고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기준만을 따르고 판단하려 합니다. 불완전하게 보이는 것을 따르다보니 당연히 잘못된 판단과 함께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남기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준은 인간의 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하느님의 눈, 즉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판단에 철저히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땅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주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병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제발 저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이 병만 낫게 해주신다면 제가 당신을 열심히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는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말을 하지요. 그래서 주님의 뜻에 맡기는 말인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에 맡기는 이 나병환자를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면서, 당신의 뜻을 나병환자의 소원에 맞추어 치유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기준은 어디에 맞추어져 있는가를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는 주님의 눈에 기준을 따를 때에만,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않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한 가족이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셨다.”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며칠 전 신문을 봤습니다. 두바이의 세계 최고층 빌딩에 관한 기사입니다. 신비주의의 전술을 그들이 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딩이 얼마나 높은지에 대해서 비밀로 하는 것이지요.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 궁금하게 됩니다. 보일락말락해야 더 궁금하고 보고 싶고 알고 싶지 다 까발리면 신비감이 사라지고 그래서 궁금증도 관심도 사라집니다.
예수님도 이런 신비주의의 전술을 쓰신 것일까요? 만일 그런 것이라면 예수님은 고차원적인 사기꾼이고 보통 사람들처럼 당신을 드러내려는 속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분명 당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느님 은총이 드러나는 것도 원치 않으셨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드러나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행하신 기적을 말하지 말라 하심은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도록 당신을 숨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들수록 기도 안으로 숨으십니다.
하느님 은총의 진정한 관리자는 이러해야 합니다. 하느님 은총을 까발리면 보물이 똥으로 변합니다. 보물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내보이지 않고 깊이 간직하고 그 귀함을 감상해야 하듯이 하느님 은총도 기도 안에서 더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전삼용신부-
제가 가장 외로움을 느꼈을 때를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집이 평택 시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는 수원으로 통학하여서 친구들이라고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만난 아이들이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 한 수원 토박이 싸움 짱이 저에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물론 그 전에 제가 장난을 좀 심하게 치기는 했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 싸움 짱 친구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 때 왕따 되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껴보았습니다.
아이들 때는 이렇게 친구가 소중합니다. 그들이 없으면 고독하게 홀로 남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사람이 주위에 있어도 외롭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주위에 있지만 그것 때문에 더 외로움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대학교 때, 성당 청년들이 술집에서 저의 생일잔치를 마련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노래도 불러주고 케이크의 불도 끄고 또 케이크를 먹지는 않고 손으로 집어서 저의 얼굴 머리등에 마구 칠하고 샴페인으로 목욕을 시켜주었습니다. 그 때는 참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씻기 위해 화장실에 혼자 들어가 있을 때나 또 한참동안 혼자 씻고 나와 보니 친구들은 내가 없어도 즐겁게 웃고 떠들며 놀고 있었습니다. 내가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내가 빠져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혼자 생일을 지내는 것이 덜 외로울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으로는 절대 나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빈자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없을 때보다 더 외로움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결혼을 해도 어머니 아버지 자식들은 각자가 서로 외로워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으로는 나의 외로움을 채울 수 없습니다. 나의 공허한 빈자리는 영혼이 자신의 고향인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도 당신께 모여드는 모든 사람들을 뿌리치고 홀로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이시지만 부산한 곳에서는 하느님과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기에 홀로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물론 개인적인 기도와 이웃 사랑의 실천 중 무엇을 해야 할지 갈등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복음전파를 마치고 예수님께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드셔서 쉬는 것을 포기하고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또 타볼산에서의 변모에서는 개인적인 기도에만 머물러 있으려는 베드로를 이끌고 산을 내려와 세상으로 돌아오십니다.
물론 이렇게 기도에서 얻는 에너지는 반드시 이웃사랑으로 쓰여야합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으실 때나 수난 전날 밤 등에 혼자 산에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은 특별히 당신을 찾는 이들을 뿌리치고 홀로 외딴 곳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이는 너무 기도에만 매달려서 이웃사랑의 실천에 게을러서도 안 되고, 또 이웃사랑 실천을 핑계 삼아 개인적인 묵상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가끔 기도하다보면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다가도 문득문득, ‘정말 여기 예수님이 계신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합니다. 함께 있음을 느끼는 것이 기도의 시작인데도 그분이 정말 계시다는 생각에 문득문득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깊은 관계란 단 둘이 함께 있음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애인이 둘이 만나기를 원하지 않고 계속 다른 친구들을 데이트에 함께 데려온다면, 그 둘의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함께 만나는 것과 단 둘이 만나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전례 상 미사나 성무일도 등 많은 것들이 공동으로 하게 되어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둘 이상이 모인 곳에는 당신도 함께 있겠다고 하신 것에서, 주님은 신앙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칫 잘못하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하도 많아 상대적으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거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사제들조차도 홀로 주님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굳이 찾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주례하는 것 자체가 큰 기도이기 때문에 그것에 만족하고 홀로 기도할 필요를 못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도 말씀드렸듯이 홀로 만나는 시간을 꾸준히 갖고 있지 못하다면 사실은 그 분과 깊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애인을 만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나고 있는 경우일 수 있는 것입니다.
홀로 만나서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가 참으로 깊은 관계이고 이는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바쁜 와중에서도 홀로 기도할 시간을 찾았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여야 하겠습니다. 이웃과의 좋은 관계도 중요하겠지만 먼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을 꼭 갖도록 합시다. 그것이 없으면 이웃을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 만나려고 해서 결국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아 외톨이가 되거나, 혹은 이웃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그 안에서 더 큰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밝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 위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대 위의 나를 스포트라이트가 환히 비추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대에서 잘 연기할 수 있도록, 그래서 멋진 모습들을 잘 보이게끔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 무대 위에서 객석을 바라보면 무엇이 보일까요? 까만 점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객석에 아무도 없는 것일까요?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이 전혀 없는 것처럼 까만 점으로만 보이는 객석이지만, 약간의 소리도 들리고 또한 인기척을 통해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까만 점을 향해서 무대 위의 배우들은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주님이 보이십니까? 그래서 당신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실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또한 멋진 모습들을 잘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환하게 비춰주실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환하게 비춰만 주다 보니 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각종 성사를 통해서 또한 성경의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그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계시는 주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예수님께 대해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치료하지 못하는 병, 그래서 그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 나병에 걸린 이 사람은 예수님께 이러한 말씀을 던지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말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시지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이 되어라.”
그리고 실제로 이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 잘 살 수 있도록 환하게 비춰만 주시는 주님이기에 그 때문에 오히려 주님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모습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거두는 순간, 주님과 멀어지게 되어 더욱 더 이 세상을 힘들게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비추어주시는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야 어둠 속에 계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소유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공간과 거리를 유지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멜라니 게이슬리)
예수님의 측은지심
-류충희 신부-
성경에서는 문둥병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고 합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강해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예루살렘과 기타 성곽도시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곳에 격리되어 살았습니다(레위 13,45-46). 유다인들은 나병이 죽음처럼 회복될 수 없는 병이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이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나병 환자를 측은히 여겨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4장 2-32절의 규정을 따라 고침을 받은 나병 환자에게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것을 보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나병을 고쳐주신 사실을 유다인들에게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람들만이 나병 환자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민수 12,9-15 : 모세; 2열왕 5,1-27 : 엘리사). 그런데 하느님의 사람들인 모세나 엘리사는 모두 하느님께 간청하여 나병 환자를 고쳐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전권을 물려받으신 하느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교회는 하느님 아빠의 뜻을 따라 이 땅에서 멸시당하는 불행한 사람들을 각별히 아끼시고 측은히 여기신 예수님의 처신을 본받아 소외된 이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려면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가 주님께 나아옵니다. 나병환자가 주님께 나아오는 데는 두 가지 믿음이 전제되어있습니다. 하나는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거절하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능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의 말은 듣기에 따라 신앙고백이 아니라 고도의 심리적 언사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언사 말입니다. 어렸을 때 어떤 친구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할 때 두 가지 방법을 쓰곤 했습니다. 하나는 “얘는 이것 못해!”하고 약을 올리면 그 친구는 자존심 때문에 할 생각이 전혀 없던 일도 하고 자기 힘에 부치는 일도 무리를 하면서 합니다. 다른 방법은 “얘는 이것 잘 하니까 할 거야!”하고 추어주면 그 친구는 체면 때문에 하기 싫은 것도 하고 자기 힘에 부치는 것도 무리를 하여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나환자는 주님을 심리적으로 이용할 만큼 예수님보다 우세한 입장에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최 약자로서 사람들 가운데 끼이지도 못하는 처지였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낼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은 뭇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무릅쓸 정도의 절박한 사정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대면은 이렇게 인간의 시선을 초월해야 합니다. 인간의 시선을 신경 쓰는 한 대면은커녕 하느님 옷자락도 못 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나의 시선을 뺏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나의 시선을 사람들에게 뺏기지 않으려면 나환자처럼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진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인간의 평가와 시선을 신경 쓰기에 인간의 시선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배가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로서 염치불구하고, 체면불구하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능력에만 절대적인 희망을 걸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희망이 믿게 하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것에서 희망이 어긋났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의탁합니다. 이 의탁이 믿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치유의 수단이 많으면 어느 치유도 믿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믿음이 부족합니다. 간경화로 세상을 뜬 제 친구의 경험이 있습니다. 간신히 사제로 서품되었지만 한 번도 신자들과 미사를 드릴 수 없었기에 이를 아는 많은 신자들이 너무 안타까워하였고 사랑의 마음으로 이게 좋다, 저게 좋다고 갖가지 치료법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새로운 치료법이 소개될 때마다 지금까지 하던 치료법을 불신하게 되었고, 결국 어떤 치료법도 믿지 못하고 어떤 치료도 꾸준히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 치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다른 것에 대한 희망을 과감히 끊어내야 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의 선의를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의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 청하기만 하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싫어하시고 귀찮아하신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덜 좋은 것은 거절할지언정 진정 우리에게 좋고 필요한 것을 거절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면 아마 그것이 하느님께 대한 가장 큰 모욕이 될 것입니다.
소문을 퍼뜨려야 합니다
- 이건복 신부-
◆‘전국 노래자랑의 장수 비결’이란 제목의 글을 인터넷을 통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글을 쓴 이는 이 프로그램의 장수 비결을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째, 서민의 삶, 애환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 둘째,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고 있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송 해 선생님의 후덕한 진행 솜씨. 셋째, 공연문화가 별로 없는 지방을 직접 찾아가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점. 넷째, 끼와 재능이 있는 연예 지망생들의 등용문이 된다는 점. 이렇게 정리된 글을 읽으면서 충분히 성공할 준비가 된 프로그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열한 방송 프로그램의 경쟁에서 장수할 수 있는 이유에서 저는 전교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 공생활 시기에 예수님을 만나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처럼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당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곧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삶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을 통해 예수님의 존재와 가치를 입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적 삶을 살게 될 때 세상에서 줄 수 없는 가치와 행복한 삶을 얻게 된다는 기대감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성지에서 일하는 저도 깊이 반성해 봅니다. 과연 고통스러워 찾아온 순례객들의 상처와 애환을 어루만져 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후덕한 이웃집 아저씨같이 편안하고 따뜻하게 순례객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꿈과 목표를 이루는데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참된 삶의 비전을 발견한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께 모여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예수님과 함께하는 행복한 삶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소문을 퍼뜨려야 합니다.
-정연동신부-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삶 밖에 없다. 한 가지는 기적 같은 건 없다고 믿는 삶. 또 한 가지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는 삶. 내가 생각하는 인생은 후자이다.”<모치즈키 도시타카의 ‘당신의 소중한 꿈을 이루는 보물지도’ 중에서>
오늘 나는 기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기적 같은 건 없다? 모든 것이 기적이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되는 기적이야기를 접합니다.
무엇이 기적입니까? 병이 치유되는 그것입니까?
예수님을 만나 삶이 바뀌는 것이 기적입니다. 참된 기적은 변화에 있습니다.
소외된 삶에서 공동체의 안으로.
슬픔과 절망에서 기쁨과 희망으로.
내 안에 갇힌 삶에서 너를 향한 개방의 삶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지만, 자신의 인생을 기적으로 바꾸는 사람은 드뭅니다.
자신을 인정하고, 변하고픈 강렬한 열망이 없다면, 기적은 우리에게 요원한 것입니다.
겸손하되 용기가 없다면, 기적은 없습니다.
굳은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기적은 내 삶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나는 기적을 원합니까? 변화되기를 꿈꿉니까?
그렇다면, 겸손되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
문득!
이 세상 기적 아닌 것이 있는가?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만나 기적 같은 나날이 기쁜 날 되시기를 빕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병고를 친구처럼>
이 세상 살다보면 누구나 하나씩 감추고 싶은 상처를 몸에 지니게 되지요. 제 왼쪽 발목 아래쪽에도 큼지막한 상흔이 하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엄청나게 부잡했던 저였습니다. 동짓날 천방지축으로 나대다가 그만 펄펄 끓는 팥죽 솥에 왼발 전체를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팥죽에 살짝 데친 이후 생긴 화상자국이지요.
특별한 조치는 기대할 수 없던 시절이라 세월이 흘러도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단지 보기만 흉할 뿐이지 불편함이 없기에 전혀 문제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끔씩 차분히 앉아서 발을 씻고 있노라면 당시의 끔찍했던 기억들, 두려움, 무지막지했던 통증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오늘 상처를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유 중에서 가장 우선적인 치유, 중요한 치유는 내면의 치유, 마음의 치유라는 생각 말입니다. 끔찍한 참사를 겪고 난 환자들, 그로 인해 쇼크 상태를 체험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외과적인 치료 못지않게 정신과적인 치료가 아주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병으로부터 빨리 회복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 가운데, 환자 본인의 마음가짐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지요. 아무리 첨단설비가 갖춰진 현대식 병원에서, 또 명의로부터 치료를 받는다하더라도 반드시 회복되겠다는 환자의 투병의지가 전혀 없다면 퇴원은 요원합니다. 아무리 중한 병, 아무리 악조건 속에서라도 환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기적도 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여러 번 눈으로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내게 다가온 병고를 친구처럼 맞이하고, 기꺼이 병고와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넓은 마음이 치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내게 다가온 병고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투덜대고, "왜 하필 나한테" 하는 마음으로 짜증내며 지낸다면 자연치유력은 급격히 떨어집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우리에게 다가온 병고를 보다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격 예민한 친구 다루듯이 부드럽게, 조심조심 우리의 병고를 다루면서 따뜻하게 감싸 안을 때 우리는 병고와 화해하는 것이고, 그 순간이야말로 내적인 치유가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이 한세상 살아가는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기쁨과 환희의 순간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젠가 슬픔의 순간, 고통의 순간, 죽음의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이 고통 반드시 의미가 있을거야" 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반드시 이 병고를 잘 극복해서 하느님의 영광과 자비를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마음으로 투병생활에 임할 때 하느님께서도 반드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런 내면으로부터의 기적이 먼저 일어나야 외적인 기적이 동반됩니다.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된 나병환자 역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내면의 치유-병고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외적, 실제적인 치유의 과정을 겪었으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나병환자는 치유의 은총을 입기까지 나름대로 잘 준비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 앞서 나병환자는 이미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육체의 치유는 일시적인 것임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나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말끔히 치유시켜주실 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나병환자였기에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오시자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환자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또 많은 불치병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실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투병중인 모든 형제자매들이 오늘 다시 한번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임을 통해 내적인 치유를 시작하시길 빕니다. 투병생활이 아무리 고통스럽다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힘을 주시길 기원합니다. 다시 한번 자신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제 책을 좀 보려고 서점에 갔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꼬마 아이 하나가 어떤 책을 집더니만 “이 책 갖고 싶다. 이 책이 집에 있으면 정말로 좋겠다.”를 계속해서 중얼거리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누구한테 말하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요. 이 아이의 근처에는 저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지요.
‘아니, 이 아이가 나한테 이 책을 사달라고 조르는 건가?’
생전 처음 보는 아이이기에 저는 모른 척 했지요. 그런데 잠시 뒤에 이 꼬마 아이는 자기가 간절히 원하는 책을 들고는 건너편 책장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말합니다.
“엄마. 나 이 책 사 주세요. 이 책 있으면 정말로 행복할 것 같아요.”
아이의 엄마가 건너편 책장에 있었지요. 그런데 엄마는 아이가 사달라는 책을 사줄 수 없다고 말했나 봅니다. 울상이 되어서 그 책을 들고서 제 옆으로 다시 왔거든요. 그리고는 또 다시 말합니다.
“이 책 갖고 싶다. 이 책이 집에 있으면 정말로 좋겠다. 이 책 있으면 정말로 행복할 텐데…….”
잠시 뒤, 이 아이는 다시 그 책을 가지고 엄마에게 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큰 소리로 말합니다.
“엄마! 이 책 꼭 사 주세요. 이 책 꼭 가지고 싶어요. 대신 제가 엄마 말 잘 들을게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엄마는 조르는 아이가 원하는 책을 사주었고,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요.
혼자 중얼거릴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기에 그 아이는 엄마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간절함을 보면서, 우리의 기도도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기도 그리고 성의 없는 기도가 아니라, 간절한 마음이 담긴 진실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병이 걸린 사람은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나병은 전염성이 크고 고치기가 어려워서 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공동체로부터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근처를 지날 때면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쳐야 했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이 없고서는 불가능했겠지요.
바로 이 간절한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습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깨닫게 됩니다.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 이것만이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를 바쳐봅시다.
하느님의 권능, 사람의 믿음
-박기호 신부-
‘소록도’는 나병환자의 섬으로 필자의 고향과 가까운 곳입니다. 어릴 적엔 학교에서 나환우의 탈출 소식을 공지하며 짝지어 귀가하도록 주의를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문둥이들이 보리밭에서 어린아이 간을 꺼내 먹었다’는 속설도 있어서 무서워했습니다. 나병은 치유약이 없었기에 천병(天病)으로 불렸습니다. 명화 ‘벤허’에서 본 바와도 같이 예수님 시대에도 불치의 전염병으로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소외의 극치가 되는 천형으로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만은 천병도 능히 낫게 하실 수 있음을 고백한 나환우의 믿음은 정말이지 놀라운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자신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해결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문제 앞에서 하느님의 권능에 호소하고 내맡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본당에서 아주 열심히 하던 교우가 갑자기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가정적으로 또는 사업에서 우환을 만났다는 말을 전해 듣습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다가 정작 자신의 어려운 문제가 생기니 믿음도 기도도 내버리고 혼자 안달해야 하나요? 바로 그때야말로 예수님을 부르며 뛰어가 고백할 때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하시고자만 하시면 제 집안의 문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매달릴 때입니다.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일거리를 드리는 것이 축복의 길입니다.
소문을 내세요
-박영-
인천 화수동에는 허름하고 좁은 ‘민들레 국숫집’이 있다. 서영남 형님이 주인장이고 손님은 주로 노숙자들이다. 국숫집이지만 국수가 아니라 밥을 공짜로 나누는 식당이다. 지금은 꽤 소문이 나서 멀리 서울에서도 손님이 찾아온다.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된 적이 있지만 아직도 각종 언론에서 민들레 국숫집을 소개하고 있다. 막 언론에 소개되기 시작할 무렵 서영남 형님이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언론 취재를 허락하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착한 일을 할 때 쥐도 새도 모르게 하라는 스승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난 주제넘게 이렇게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도 거의 모든 무료 식당에서 사람들을 줄 세워 밥을 주잖아요. 손님이 아니라 봉사하는 자기들 편하자고요. 그러니 다른 곳도 민들레 국숫집처럼 손님을 VIP로 환대하기 전까지 소문을 내세요. 민들레 국숫집 같은 집이 전국 곳곳에 생겨날 수 있도록 소문을 내세요.” 밥을 주는 건 민들레 국숫집이 하는 일의 시작일 뿐이다. 민들레 국숫집은 노숙자가 그 절망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다. 모든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이 세상에서 노숙자에게 열린 하나뿐인 비상구다. 굶주려 몸도 마음도 무너졌던 사람들이 국숫집을 통해 다시 일어나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가는 기적을 나는 여러 차례 지켜보았다. 이 기적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술에 절고 고약한 냄새가 나서 우리가 기겁하고 달아나는 노숙자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손님으로 환대하는 서영남 형님의 소박한 마음이 만들어 내고 있다.
주님 공현 후 금요일
- 김창환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을 치유해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병은 의학용어로 한센병이라고 합니다. 치유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이병을 하늘에서 내린 벌이라고 하여 ‘천형병(天刑病)’ 이라고 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들을 멀리하고 그들을 격리시켰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나병환자를 죄악시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었고, 사회적인 권리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즉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종교행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그를 만지는 사람도 불결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외딴 곳, 광야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이 나병환자는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즉 죽음과 함께하는 사람으로써/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평생을 죄인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치유 해주실 것을 믿고 간절히 바라면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직접 손을 그 나병환자에게 대시며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나병이 전염병이라는 이유로 나병환자 근처에 가는 일을 불결하게 여겼습니다. 더구나 그 사람들과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이 불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그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치유를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환자를 직접 만지시며 치유를 해 주셨겠습니까? 예수님이라면 손을 대시지 않으시고 말씀만으로도 그 병을 치유해 주실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시며, 즉 나병환자를 만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이 사회적 이목 때문에 꺼려하고, 회피하는 일들을 그분의 참된 사랑을 본받아 실천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소외된 사람들을 치유하고, 생명을 주시며, 인권을 세워주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도 참된 신앙인으로써 그분의 실천적인 사랑을 본받아 남들이 꺼려하고 회피하는 일도 스스럼없이 실천하도록 합시다.
참된 기도는 어떻게...
-상지종신부-
나병환자가 자신의 치유를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의 하나로 예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으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고쳐주셔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나병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사람들로부터 따돌림당하고 온갖 멸시를 받아왔는지 모릅니다."
치유 받고 싶은 간절한 심정을 담고 있기는 두 가지가 다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께 다가가는 자세는 정반대입니다. 첫 번째 것은 예수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자신 안에서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것은 예수님을 자신에게 짜 맞추는 것, 곧 자신의 뜻을 주님께 강요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 생활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기도를 잘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과연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기도하고 계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생활고에 지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가정 불화가 일어나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억울하게만 느껴집니다. 이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라면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그래서 가정의 평화를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겠습니까? 혹 이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고 해서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이 사람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주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몰라도 진정으로는 말입니다. 당장에는 몰라도 언제까지나 항상은 말입니다. 돈이 없었을 때나 돈이 생겼을 때나 돈의 노예로 사는 것은 마찬가지고 이 사람에게 참된 주님은 돈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평화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애시당초 가정의 평화라는 것이 물질적인 충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가난하기 때문에 가정의 불화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릇된 것입니다. 가난은 사람을 불편하게 할지는 몰라도 결코 사람을 갈라놓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가난을 핑계삼아 갈라 설 뿐이지요.
참된 신앙인이라면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까요?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가정의 평화를 이루려고 하지만, 가난 때문에, 아니 가난을 핑계삼아 제가 가족들에게 저의 입장만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금 저에게 주어진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십시오. 당장의 물질적인 이익보다 참 사랑을 주십시오.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말입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돈을 벌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기도 지향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돈으로부터 해방되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참으로 많은 기도를 바칩니다. 이 기도 안에 분명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운 현실이,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가, 삶의 보람과 기쁨 그리고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참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추함이 없으니까요.
참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거룩합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려 하니까요.
참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기뻐합니다. 주님께서는 참된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시니까요.
아름다운 기도, 거룩한 기도를 바침으로써 기쁨에 넘치는 나날의 삶을 사는 우리이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으십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나환자들이 겪었던 고통은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나병에 걸리면 특별한 치료약이 없었기에 즉시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말이 격리지 이 세상으로부터의 추방이었습니다.
매일 조금씩 녹아 내리는 자신의 뼈마디를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었던 환자들은 차라리 죽고만 심은 심정이었습니다. 개울물에 비쳐진 자신의 참담한 몰골에 매일 깜짝 놀라며 상심에 상심을 거듭해 갔습니다.
그런데 더욱 괴롭고 용납 못할 일이 한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병환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나병을 천형(天刑)으로 여겼습니다. 뭔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대가로 나병을 얻게 되었다는 인식, 나병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오는 벌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병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것만 해도 서러운데, "천벌 받은 사람"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자니 억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가족들과 강제로 생이별한 환자들은 성문 밖, 사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치유에 대한 일말의 희망도 없이 철저한 세상의 변방에서 나병환자들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삶,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삶을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들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나병환자들의 공통된 마음이었지요.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침이 밝아오고 눈이 떠지면 다시금 더욱 문드러져 가고 있는 자신의 삶을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나날이 나병환자들의 일상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꿈결조차 단 한번만이라도 예전의 보송보송했던 피부를 되찾아보는 일이 소원이었습니다.
이토록 삶 자체가 슬픔과 고통 덩어리였던 나환자들에게 주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 지긋지긋한 나병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나병 환자들에게 있어 치유는 단순히 치료적 행위를 넘어 삶을 되찾아주는 구원의 행위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다시 한번 생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치유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하느님의 자비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 자비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으십니다"고 고백할 수 있는 확고한 신뢰입니다.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 만물을 주재하시는 분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오랜 악습의 질곡에서 벗어날 사람, 죽음으로 향하는 불치병에서 회복될 사람, 자기 자신이라는 무덤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만능 백신 프로그램 안내???
-오상선신부-
컴을 사용하다보면
한번씩 바이러스를 먹어 고생해 본 경험은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여러 백신 프로그램들이 나와 있는데
예방과 치료에 그 목적이 있다.
때로 신종 바이러스가 등장하면
아직 업데이트 되지 않은 백신 프로그램으로는 어쩔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로부터 치유받은 나병환자 이야기가 나온다.
나병에 대해 많은 사람이 무지하지만
나병은 실제로 그렇게 무서운 병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균은 공기밖으로 나오게 되면 즉시 몇초만에 죽어버리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전염도가 아주 낮기 때문이다.
사람을 흉칭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무서울 뿐이다.
이 때문에
나병은 백신 개발이 어렵다.
완벽한 백신 개발을 하려면 바이러스를 연구해야 하는데
도데체가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나병이 인류 시작 때부터 아직까지 완치하지 못하는
긴 역사를 가진 병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음서에는
유난히도 나병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
그당시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았고 가장 흉칙한 병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병환자 이야기는
죄로 이그러진 영혼을 갖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
다시말해
우리 모두는 영혼의 나병환자란 말이다.
원죄 이후로 아직까지 죄라는 바이러스를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
죄의 예방을 위해 여러가지 예방약들이 나와있긴 하지만
가끔 신종 죄 바이러스들의 출현은 우리 모두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죄 바이러스들도 치유가 어려움은
나병이 갖고 있는 속성과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백신 개발이 그 만큼 어렵다.
뭇 성인들이 그러한 죄의 극복을 위한 백신 프로그램들을 공급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업데이트가 잘 안되기 때문에 신종 바이러스 치료는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신종 바이러스도 치료할 수 있는 백신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백신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그 어떠한 죄 바이러스도 말끔히 치료할 수 있는
만능 백신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구입해서
정식등록하여 쓰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같다.
베타판이나 구입해서 임시 방편적으로만 쓰는 사람은 더러 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이 백신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도 모른다.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은 바이러스에 문제 없습니까?
아니, 바이러스에 걸려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치료해야 할 지 마땅한 백신 프로그램을 못 찾았나요?
그렇다면
제가 자신있게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백신 프로그램을 정식 등록하여 사용하십시오.
<여러분이 원하기만 하면, 나병환자를 말끔히 치료해 주시듯이,
그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언제나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값이 얼마냐구요?
정식등록에는
예수의 제자로 가입만 하시면
무료로 항상 업데이트된 버전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광고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치료에 성공하신 분들은 사제에게 가서 고백성사를 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멘. 알렐루야!
지금 그리고 여기
-박상대신부-
루가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느 시점과 어느 장소에 제한하여 보지 않고 언제나 "지금과 여기"로 보았다.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집약된 예수님의 지금과 여기에서의 복음선포와 활동이 곧 그분의 공생활이며, 이 공생활은 바로 구원의 행위로서 언제나 "지금과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루가복음에서 "지금", 그리고 "여기" 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개념으로 존재하는 메시아의 구원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루가에 의하면 메시아의 구원은 어제 존재하였거나 내일 존재하지 않는다. 메시아의 구원은 늘 <지금과 여기>에 존재하며, 그것도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實存)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주변의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내가 나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나는 실존하게 되는 것이며, 주변의 존재 또한 나와의 관계를 통하여 실존하게 된다. 그저 존재함은 의미가 없다. 무엇이든 실존할 때 의미를 가지며, 존재해야 할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메시아의 구원 또한 독자적으로 존재할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주변과 관계를 맺고 실존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며,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나병환자들, 이는 자신의 피부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철저하게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 더 아프고 슬픈 사람들이다. 사람이 병을 얻어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로부터 간호라도 받는다면 그나마 행복한 처지이니 아쉬워할 것이 적다. 그러나 나병에 걸려 공공연히 "부정(不淨)한 자"로 낙인찍혀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소외되어 살아야 하는 아픔은 육체적 고통에 심리적 고통까지 더하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아픔이다.(레위 13-14장 참조) 예수께서 참다운 메시아이시라면 이러한 처지의 나병환자에게 첫째, 병의 치유와 둘째, 관계의 회복, 둘 다를 선사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메시아의 구원은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는 공존(共存)의 관계를 통하여 치유와 실존을 함께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메시아적 구원은 "지금과 여기" 라는 현실을 파고들어 새로운 관계의 실존을 구원의 대상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인도에 복음이 선포된 것은 1500년대 일이었다.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가 활약할 당시만 해도 인도는 유럽의 열강들이 선호하는 정열의 선교지역이었으나 17세기초부터 유럽교회 내부의 문제로 선교의 열정은 수그러들고 인도는 영국의 지배에 들게 된다. 1813년 영국령 인도가 선교사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미국인 선교사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 1885년에 인도에 도착한 메리 리드(Mary Reed)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할까 한다. 메리 리드 선교사는 본국을 떠나 인도에서 그리스도의 선한 사업에 힘쓰고 있었는데, 그녀는 한가지 고민으로 가슴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쌍한 처지에 있으며 비참한 생활을 해 나가는 나병 환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나병 환자를 구제할 변변한 방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메리 리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는데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나병환자 수용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병은 전혀 낫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선교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정밀 검진을 받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손가락은 점차 감각을 잃었고 얼굴에는 반점 하나가 생기더니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의사는 그녀의 질병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그녀는 나병에 걸린 것이었다. 이 사실을 메리 리드도 알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하는 안쓰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메리 리드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 제게 나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인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 있는 나병 환자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메리 리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녀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였던 인도의 나병환자들에게 돌아가 1943년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살았다. 이것이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아 있는 메시아적 구원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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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