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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묵상글 (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 귀가(歸家)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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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가(歸家)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그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저는 우리 삶을 귀가의 여정으로 정의합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여정같지만 죽음은 바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예수님의 고별기도에 나왔던 말마디도 기억할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시 최종목적지 산티아고 대성전이 가까워질수록 마음 설레며 빨라졌던 발걸음의 기억도 선명합니다.
예수님은 물론 순교적 삶을 살았던 대부분 성인들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여겼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 하느님 아버지이기에 저는 희망의 여정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도원 피정오는 분들에게 맨처음 공통적으로 하는 피정강의 내용이며, 어제도 단체피정자들에게 이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이 순교자들 역시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 미사에서 시복을 선언했습니다. 당시 저는 장충동 수도원에서 안식년중이었지만 이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윤지충(1759-1791)은 유교식 제사를 거부하다 처음으로 순교한 조선후기 신자입니다. 124위 순교 시기를 보면 첫 대규모 박해로 기록된 신유박해(1801년) 순교자가 53명으로 가장 많고, 기해박해(1839년)를 전후로 37명, 병인박해(1866) 순교자 20명, 신유박해 이전 순교자가 14명입니다.
성인별 지역별 순교자 수는 서울이 38위, 경상도 29위, 전라도 24위, 충청도 18위, 강원도 3위입니다. 이들 순교자중 5위(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가 전라도 전주 숲정이에서 1839년 5월29일 순교했기에 이날을 기념일로 정해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대로 다음 복음 말씀처럼 예수님 뒤를 따른 순교성인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바로 내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순교적 삶을, 부단히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고 작아지는 겸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보다 더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순교적 삶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 했습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을 따라 순교했던 무수한 성인들의 순교의 죽음으로 오늘날 천주교회가 열매 풍성한 교회로 성장, 성숙했음을 믿습니다. 이런 순교영성의 유전자(DNA)는 오늘도 우리 안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으며, 비상한 순교만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자발적 기쁨으로 순교적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복음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누구든지’, 바로 믿는 이들 모두가 예외없이 순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값싼 은혜, 값싼 믿음은, 값싼 사랑, 값싼 희망은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발적 분투의 노력과 훈련이 필수입니다. 바로 하루하루 한결같이 주님 사랑에 자기를 비우고 버리고 주님을 추종함이 주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도 순조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의 주인공, 90세의 노순교자 엘아자르입니다. 평소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고결한 순교적 삶이 훈련되고 습관화되어 제2천성이 됐기에 이런 의연한 순교의 죽음입니다. 하루하루 귀가의 여정에 충실한 평소 일상의 삶 모두가 죽음의 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엘아자르의 감동적 고백을 일부 나눕니다.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는 나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당신께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이렇게 엘아자르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으니,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입니다. 사실 이런 죽음보다 후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이런 믿음도 삶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독일의 나치스 치하에서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입니다. 이분의 “옥중서간”은 제가 20대 시절 열광하며 수차례 애독했던 책입니다. 1945년 4월9일 처형된 본회퍼의 유언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였고, 그의 묘비명은 “디트리히 본회퍼-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비상한 순교의 죽음도 은총이지만 평범한 일상의 순교적 삶도 은총입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자발적 기쁨으로 제 십자가를 지고 책임을 다하며 묵묵히 자기를 비우고 버리며 주님을 따르는 사랑의 순교적 삶을 통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여정도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의 순교적 삶에, 귀가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제 사랑하는 좌우명 기도와 시편성구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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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같이 가는 길
오늘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축일인데
윤지충 바오로 순교자는 우리나라 첫 순교자였고,
그래서 오늘 축일의 대표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분에 대해서는 이전 강론에서 나눔을 하였기에
오늘은 다른 순교자들에 관해 나누고자 하는데
그중에서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그 가족들에 관해 나누고자 합니다.
윤지충 바오로 순교자가 첫 순교자가 되었지만
호남 지역에 가톨릭을 널리 알린 분은 유항검 복자이고,
그래서 유항검 복자를 호남의 사도라고 우리는 부르지요.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124분의 순교자 가운데는
유항검 복자 말고도 그분의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 조카 유중석과 며느리 이순이가
복자로 시복되었고, 비록 시복되지는 않았지만, 동생 유관검과 부인 신희까지
가족이 모두 순교하였으며 그래서 유항검 성인의 생가는 파가저택이 되었지요.
파가저택이란 큰 죄를 지어 죽은 가문을 아주 없애버리고,
멸문의 본보기로 삼고자 그 집마저 없애는 것을 말하는데
집을 허물고 그 집터를 아예 연못으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또 기념해야 할 것은
유항검 순교자의 아들 유중철과 며느리 이순이가
동정 부부로 4년여를 살다가 순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순이 순교자가 옥중 서한에서 적었듯이
그 4년여 동안 열 차례나 동정을 깰 뻔했지만
끝까지 동정 서약을 지키고 부부가 같이 순교까지 했으니
동정 순교 성인의 대표로 불리는 아네스 성인과 같이 우리가 공경해야겠지요.
그리고 또 참으로 대단한 것은, 그 가문이 모두 순교했다는 사실,
곧 아무도 배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지요.
가깝고 쉬운 길은 혼자서도 갈 수 있고 혼자 가는 것이 쉽지만
멀고도 험한 길은 같이 가야 감히 떠날 수 있고 그 길을 끝낼 수 있지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그 어떤 길보다 어려운 길이니
우리 또한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서 이 집안 신앙에서
교훈을 얻고 본보기 삼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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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그들 중 5위(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가 1839년 전라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날입니다. 이들은 한국초기교회의 순교자들로서, 시대로는 오히려 103위 성인보다도 앞서 사셨던 분들입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병인박해 순교자 103위를 시성했으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교회를 일궈낸 이들이 누락되었다가,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신해박해(179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의 1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된 것입니다.
(그들은 <순교시기별>로는 첫 대규모 박해로 기록된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 순교자가 14명, 신유박해 순교자가 53명, 기해박해(1839년)를 전후한 순교자 37명,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 20명이며, <지역별>로는 한양(서울)이 38위, 경상도 29위, 전라도 24위, 충청도 18위, 경기도 12위, 강원도 3위입니다. 124위 중 최연소자는 12세로 이봉금 순교자이며, 최고령자는 75세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순교자입니다.)
이들 가운데,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종사촌입니다. 전라도 진산 출신으로 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신주를 불사르고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렀다가 체포령을 내려지자 자수했습니다.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첫 성직자입니다. 구베아 주교의 파견으로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년 입국했습니다. 강완숙 집에 숨어 지내면서 성사를 집전해 6년 만에 조선교회 신자 수를 1만 명으로 늘리는 데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신유박해 때 귀국을 결심했다가 순교하기로 마음먹고 자수했고, 새남터에서 효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성 정하상 바오로와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의 아버지인데, 형 약전에게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에 입교했습니다.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2권을 집필해 주문모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보급했고, 평신도단체 '명도회' 초대 회장을 지내다 1801년 순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순교자들은 대부분 유해가 없습니다. 묘소 또한 있을 리 없습니다. 다만 박해에도 ‘죽음을 무릅쓴’ 동료와 가족들의 노력으로 수습된 순교 복자들의 유해는 비밀리에 매장됐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는 묘소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묘소가 남아 있는 복자들은 124위 중 18위(14.5%)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첫 기념일을 앞두고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주교님은 <특별담화문에서, 그들은 “신분 차별과 불평등, 가난이 일상화되었던 시대에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보여주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복자들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도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자.”고 권고하였습니다.
또한, 현재 “한국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최양업 토마스 사제’ 시복과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시복,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 시복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니, 아직 시복되지 않은 순교자들과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도 함께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윤지충 바오로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진산 군수가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자,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고, 또 다른 곳에 이송되어서도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고 문책하자,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는 그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는 말씀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곧 목숨을 바쳐 섬기는 순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곧 “순교”입니다. “섬김”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섬김의 순교”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계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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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로 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이시자 요한의 어머니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세례로 다시 태어난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어머니를 얻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관계가 물질적, 가시적 차원에서만 형성된다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어머니 마리아를 나의 어머니로 받아들여 영적인 관계를 맺는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박병규).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카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마태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 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했고(루카2,7). 또한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루카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 라고 외면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3-35)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 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에게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 안에서 어머니의 전구에 힘입어 우리도 신앙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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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공자는 인생의 3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입니다. 신학교에서 같이 배웠던 1년 선배 신부님이 뉴욕에 와서 3주간 있었습니다. 함께 미사하고, 함께 산보하고, 함께 식사하니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저는 32년, 선배는 33년을 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한바탕 꿈’과 같은 시간들이 쏜살처럼 지났습니다. 우린 둘 다 어느덧 반백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바둑에는 ‘복기’가 있듯이 우리는 산보하면서 우리들의 젊은 날을 회상하였습니다. 학창시절 우리가 존경했던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주로 하였습니다. 능력과 언변이 뛰어났던 신부님들의 이야기도 하였고, 속이 깊고 따뜻한 신부님들의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신학교에 보내 주셨던 아버지 신부님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버지 신부님께서는 은퇴 하신 후에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하셨습니다. 혼자서 장을 보시고, 혼자서 밥을 해서 드시고, 혼자서 청소와 빨래를 하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에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앞으로 은퇴 하는 사제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뉴욕에서 저도 홀로 사는 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지난 세월, 우리에게 기둥과 같았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무소유를 이야기 하였던 법정 스님이 있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였던 성철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멋진 글을 남겨 주었던 함석헌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며,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이라는 말을 하였던 김수환 추기경님이 있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겼던 자상하셨던 정진석 추기경님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해 맑은 웃음으로 사랑을 전해 주시는 드봉 주교님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들을 처음을 만났던 때에 그분들은 지금 저의 나이와 비슷하셨습니다. 지금 저를 만나는 후배들에게 저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분명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습니다. 번듯한 교회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예전보다 약해졌습니다. 신앙에 대한 확신도 예전보다 약해졌습니다. 어쩌면 성장과 발전이라는 허상에 취해서 복음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어른들이 남겨준 열매를 맛있게 먹으면서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데는 게을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대인들의 어른이었던 엘아자르의 이야기입니다. 엘아자르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2000년 동안 떠돌이로 지냈지만 지금 당당하게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았던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는 건물은 파괴될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혼이 살아있다면 성전은 언제든지 새로 세울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2014년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였고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식’을 봉헌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라는 신앙의 별이 있습니다. 오늘 순교자들의 전구를 청하면서 우리들 또한 후손들이 기쁘게 따를 수 있는 신앙의 별이 되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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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큰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없어도 작은 돌멩이에 넘어지는 사람은 많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큰 공감이 가는 속담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작은 돌멩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의 작은 일에 자주 넘어집니다.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고민이 너무 힘들어서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했지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남들도 다 겪는 거야.”
자신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하는 고민인데, 상대방은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고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민은 대부분 크지 않습니다. 작은 일상의 고통과 시련이 잠 못 이루게 하는 고민이 됩니다.
큰 바위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큰 고민은 정작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어떻게 할 수 없으니 포기하거나 다른 방향을 곧바로 찾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은 돌멩이처럼 보이는 작은 고민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작은 고민에 쉽게 넘어지고 맙니다. 또 워낙 작은 것이기에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계속된 넘어짐에 정신은 피폐해지고 몸도 망가집니다.
작은 돌멩이에도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합니다.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우리를 향한 큰 사랑 아래에서 작은 돌멩이인 고통과 시련을 가뿐하게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합니다. 이들은 1791년 신해박해 때부터 1888년 병인박해 때까지 순교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배교만 해도 살 수 있는데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삶보다도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나라에 정말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있기에, 과거처럼 주님을 배신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주님을 증거해야 하는 순간이 계속 주어집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때, 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때,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내세울 때가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계속된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져 주님께 멀어지게 됩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나’임을 기억하면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지혜와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과거 우리 순교자들이 보여 주셨던 모습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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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하는 것이다(벤 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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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제자를 보시고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더 큰 의미로는 교회의 어머니로 공표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을 생각하면 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씀은 성모님께서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셨다.’라는 말씀입니다.
성모님은 무엇을 평생 간직하며 사셨을까요? 간직하셨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걸까요?
저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늘 마음속에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다시 새기고, 또 다시 꺼내어 읽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운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간직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의지와 사랑을 간직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들 예수님도 가슴에 간직하십니다.
우리 어머니 성모님, 세상 어떤 사람보다 힘들고 아픈 길을 걸으셨지만 가슴속 하느님을 간직하고 태연히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의 지위를 얻으셨습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삶을, 우리가 가슴속에 간직할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의 대상
외국에서 언어 공부할 때 일입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다 작은 공터 그네에 앉았습니다.
그 공터는 모레로 이루어져 있었고, 유치원 아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넘어졌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바로 눈물을 흘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울지 않았습니다. 태연하게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남자아이는 자신이 찾은 선생님께 달려가기 시작했고
품에 안기자마자 울기 시작했습니다.
돌아오며 생각했습니다.
왜, 일어나자마자 울지 않고 선생님 품에서 울었을까….
그리고 알았습니다.
그 선생님이 남자아이에게 ‘믿음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과 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 앞에서 눈물 보이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 슬퍼하며 매달리고 눈물 보인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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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원히 남을 것들>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나는 사라지겠지만
외로운 벗을 품은
따스한 마음
그 벗 너머
누군가를 품어
영원히 남겠지요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나는 사라지겠지만
힘겨운 벗에게 건넨
환한 웃음
그 벗 너머
누군가에게 건네져
영원히 남겠지요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나는 사라지겠지만
아파하는 벗에게 내민
부드러운 손길
그 벗 너머
누군가에게 내밀어져
영원히 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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