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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세 가지 이유로 감사합시다./ 시편 136:1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jNLT70g1tRs
여러분의 기도로 32명의 대만 기도여행 팀은 사역 잘하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무지개를 띄워주셨고 모든 것을 잘해주셨습니다. 차 안에서 마음껏 기도하며 대만 땅을 밟았습니다. 대만의 명동 서문정 거리에서는 찬양으로 버스킹을 하며 거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 제게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찬양이 있습니다. <예배자>라는 찬양입니다. 함께 부르겠습니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곳에서/ 주를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 주를 찬양하리라/ 누구도 헌신하지 않는 그곳에서/ 주께 헌신하리라/ 누구도 증거 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 주를 증거하리라/ 내가 밟는 모든 땅/ 주를 예배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덮어지게 하소서/ 내가 선 이곳 주의 거룩한 곳 되게 하소서/ 주의 향기로 물들이소서” 우리는 정말 아무도 예배하지 않았던 곳에서 찬양하며 예배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우리가 감사할 이유 세 가지를 나누겠습니다. 시 136편은 저자나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없는 감사 예배시입니다. 저자는 시편 136편에서 몇 가지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②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③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우리도 좋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시편기자처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감사하면 조금 행복하고 많이 감사하면 많이 행복한 것입니다.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의 행복의 분량은 엄청난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늘 행복하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이유는 많습니다. “송축해 내 영혼”이라는 찬양에는 “수많은 이유로 나 노래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원곡에는 “만 가지 이유로 나 노래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해야 할 이유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만 가지가 넘는 감사의 제목 중에서 세 가지만 나누겠습니다.
1. 시대적인 축복입니다.
시대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다윗의 시대와 솔로몬의 시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화와 풍요를 누리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유다가 멸망하던 시대처럼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대적인 복을 주실 때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범죄 하므로 하나님께서 시대적인 복을 거두실 때는 그 시대 사람들은 괴롭고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2:20,21입니다.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멸망할 당시의 상황을 보면서 탄식했습니다. 그때에 여인들이 먹을 것이 없으니 자기 자식을 잡아먹었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하거나 설교를 했던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노인들과 젊은이들, 남자와 여자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칼에 맞아 길에서 죽었고 적들에게 도륙 당했습니다. 시대적인 저주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대한민국에 사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헬 조선’이라고 하는데 어의가 없습니다. 이 시대의 대한민국을 지옥이라고 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하는 말인지, 그리고 다른 나라를 가보기나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 5천년 역사 중에서 가장 풍요롭고 가장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적인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경제는 풍요롭습니다. 제가 가끔 “우리는 세종대왕님보다 더 잘 먹고 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풍요롭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들, 우리가 입는 의복들, 우리가 타는 교통수단들은 인류역사에서 최고의 것들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만이 아닙니다. 세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우리는 너무나 잘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잘사는지 아십니까?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국가 6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미국 매체 US뉴스는 전 세계 1만7000여 명이 내린 85개국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2022년 전 세계 최고의 국가'를 선정했습니다. 국력 부문은 전 세계에 정치·경제·외교·군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국가로, 전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에 빈번히 오르는 등 세계무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 순위를 집계했습니다. 전 세계 국력 1위는 미국이었으며 2위는 중국, 3위는 러시아였습니다. 이어 4위는 독일, 5위는 영국이었고 우리나라가 프랑스와 일본을 제치고 6위에 올랐습니다. 우리는 시대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조선시대 때 노비 비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아십니까? 조선시대에 노비 비율은 30~40%였습니다. 17세기에는 노비 비율이 약 60%였습니다. 10명 중에 6명은 노비였습니다. 그 당시 노비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다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적인 복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약 14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이 땅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임했습니다. 5천년 역사 가운데 약 1천 번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전쟁은 무섭습니다. 이겨도 고통이고 저도 고통입니다. 우리는 전쟁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대적인 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나 6.25 때 살았다면 우리는 그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 가운데서 지금이 제일 좋은 때입니다. 우리는 시대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2. 장소적인 축복입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유다가 멸망할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바벨론에 항복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가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욕보였고 에스겔을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이 있기 원하시는 장소에 있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바벨론에 간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곧 자리를 잡고 평안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장소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선지자들의 말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에 남거나 애굽으로 갔던 자들은 멸망했습니다. 그들은 장소적인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북한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다면 우리의 형편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김일성 김정일 동상 앞에 절해야 합니다. 집집마다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를 걸어놔야 합니다. 여름에는 그 초상화에 선풍기를 틀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이 살아야 합니다. 자유롭게 여행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수도 없습니다. 성경만 가지고 있어도 총살당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드라마도 볼 수 없습니다. 보다가 걸리면 교화소에 가야 합니다. 직업 선택도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당에서 정해주는 직장에 가서 일해야 합니다. 일하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저는 군대생활을 30개월 했습니다. 30개월은 참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 남자들은 군생활을 10년이나 해야 합니다. 여자도 7년입니다. 군부대에 식량 보급도 잘 안 되기 때문에 자급자족해야 합니다. 북한에서 살면 신문지 쓰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닥에 앉을 때 신문을 깔고 앉았는데 김정은 얼굴 있는 부분을 깔고 앉았다가 끌려갔다고 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일종의 장소적인 저주입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면 우리는 전쟁의 포화와 두려움과 궁핍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많은 여자들이 다른 나라로 팔려가고 있답니다. 돈 몇 푼 때문에 몸을 파는 여성들도 많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자구책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장소적인 저주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장소적인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태어나면 주민등록증에 종교를 기록합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종교는 당연히 이슬람입니다. 8천5백만의 인구 중에 크리스천은 0.2에 불과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그의 주민등록증에 기독교인이라고 기록을 해야 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에게는 고난이 찾아옵니다. 취직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어느 국가에서는 경찰이 여자를 채찍으로 때리기도 합니다. 여자가 반항도 못합니다. 여자들이 남편에게 참혹하게 구타당하며 살아갑니다. 약 10년 전에 아프카니스탄에서 남편에 의해 두 귀와 코가 잘린 두 여인이 미국에 망명하여 코 이식수술을 받았습니다. 여자들은 남자 없이는 집 밖에도 못나갑니다. 운전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장소적인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일본의 막부가 기독교를 박해할 때 대마도에서도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나가사키 지역에서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이 대마도로 피난했다가 순교했습니다. 당시 일본 막부가 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후미에라는 예수님의 상을 밟게 했습니다. 모든 대마도 사람들에게 후미에를 밟게 했습니다. 이 때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차마 후미에를 밟지 못하여 끌려가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우리의 신앙을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장소적인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장소적인 축복을 주신 것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3. 영적 축복입니다.
세상의 어떤 축복보다 중요한 것이 영적 축복입니다. 영적 축복은 목숨보다 중요하고 물질보다 중요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님과 아들 주광조 장로님의 사연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한 지 1년 4개월 만에 나라가 해방되었습니다. 당시 사모님은 위암으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정도로 쇠약해지셨습니다. 하루는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찾아와 사모님에게 돈과 적산가옥문서 그리고 논밭문서를 내놓았습니다. 항일투사 주기철목사님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해 김일성이 보낸 포상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모님은 “주목사님은 세상의 포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순교했으니 하나님의 상을 받기를 바랄뿐이요”라며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아들은 갈등이 생기더랍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 험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 재산이 꼭 필요한데...’
사모님은 그들이 돌아간 다음 주장로님을 앉혀놓고 시편 37:25-26을 읽게 하셨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이 말씀을 읽은 후에 사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롭게 산 자가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들이 구걸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항상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 자손들이 복을 받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가.” 주기철 목사님이 남겨 준 유산이라곤 배고픔과 절망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모님이 놓치지 않았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거기에 감사가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엄청난 유혹 앞에서도 집과 땅문서를 뿌리치셨습니다. 왜냐하면 목숨보다 그리고 물질보다 영적인 축복이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죄를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은 죽음 후에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고통당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멸망 받아야 할 사람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택한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때가 되면 세상의 심판자로써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알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영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영적인 축복에는 믿음의 복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이 있으며, 영원한 천국의 시민권자가 되는 복이 있고, 기도 응답의 복이 있습니다. 영적인 복을 받은 사람들은 영생을 얻었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죽어서는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서 영원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복이 있지만 영적인 복만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어도 영적인 복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천한 삶을 산다할지라도 영적인 복을 받았다면 그는 영원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영적인 축복을 받아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찬송가 3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가는 존 뉴턴입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헐값에 사서 백인들에게 팔아넘기는 노예를 실어 나르는 배의 선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나 배가 파선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뉴턴은 문득 어머니의 기도가 생각났고,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애타는 마음에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며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어 배가 파선된 후 4주 만에 뉴턴과 선원들이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뉴턴은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고, 그동안 해왔던 노예무역도 그만 두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노예선의 선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일을 하는 믿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주인공 윌리엄 윌버포스의 멘토가 되어 영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었고, 43년간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믿었고, 그 복음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영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보통 11월 셋째 주일에 지키는데 우리 교회는 11월 첫째 주일에 지키다가 이제 10월 셋째 주일에 지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서 지난 1년을 지켜주셨고, 1년간 소득을 주셨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의 유례를 보면 영적인 축복 때문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에 그들에게 절기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애굽에서 해방 된 것을 감사하는 유월절과 그 해 처음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맥추절 그리고 그 해 추수한 것을 저장한 후에 감사하는 수장절입니다. 수장절에는 곡식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난 후에 7일 동안 광야로 나가 초막을 짓고 삽니다. 그래서 수장절을 초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당시에 조상이 걸어왔던 광야의 생활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결국 영적인 축복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런 성경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청교도들이 드린 추수감사절 예배입니다. 추수감사절은 겉으로 볼 때는 물질적인 복 때문에 감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영적인 축복 때문에 감사했던 것입니다. 16세기 중반에 영국 성공회는 개신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순교했습니다. 극심한 핍박 때문에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처음에는 네덜란드로 갔다가 그곳에서도 만족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1620년 8월 14일 스피드웰호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02명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스피드웰호가 고장 나서 모든 사람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2월에 매사츄세츠 플리머스 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나무를 베어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 집보다 교회를 먼저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학교를 짓고, 마지막으로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필이면 겨울에 도착하여, 살인적인 추위와 굶주림과 풍토병으로 44명이 목숨을 잃었고 58명만 살았습니다. 그 이듬해 봄에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가을에 추수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처음으로 거둔 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잔치했습니다. 그리고 추위와 질병에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 총을 들고 사냥 나간 사람이 칠면조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먹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이것은 단순히 추수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절반 이상이 죽은 상황에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감사 예배를 드렸다는 자체가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세운 교회에는 “Think and Thank God 생각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라.”라는 현판을 붙였습니다. 그들의 감사절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감사했던 것은 물질적인 풍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청교도들의 생활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의식주 그 어떤 것도 풍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감사는 물질적인 풍성함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지켜주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지켜주신 것도 감사했겠지만 그 정도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1년은 그들에게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102명 중에 44명이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주된 이유는 영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려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편안한 생활을 하려고 간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 간 이유는 신앙생활을 바로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하여 하나님께 자유롭게 예배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축복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1년 이라는 세월 동안 비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추수는 했으나 궁핍했었지만 이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받은 영적인 축복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영적인 축복에 감사하는 절기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혼이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이제 영원한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는 1년 간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뛰어넘고, 1년간 필요를 채워주신 것을 뛰어넘어서 최선을 다해서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어렸을 때는 음악을 하고 싶으셨답니다. 그분은 노래를 잘 불러서 KBS <누가 누가 잘 하나?>에 나가서 일등도 하셨습니다. 그분이 전임 전도사가 되어 월급을 받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가 전축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분의 월급과 생활수준을 생각하면 전축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니 결국은 전축을 사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분의 월급이 13만 원이었는데 65만 원 짜리 전축을 샀습니다. 다섯 달 월급을 주고 전축을 산 것은 거의 미친 짓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13만 원 월급을 받으면서도 65만 원짜리 하나님의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신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남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입만 열면 주변 사람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하며 밝게 살아갑니다. 항상 주변을 기분 좋게 합니다. 그는 매일 기분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입만 열면 불평입니다. 짜증입니다. 불만만 토합니다. 항상 주변 사람들을 신경질 나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장이라면 누구를 고용하겠습니까? 우리가 결혼을 앞둔 여자라면 누구와 결혼하겠습니다. 우리가 돈을 대고 여행을 같이 간다면 누구와 여행을 가겠습니까? 우리에게 먹을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 먹으라고 내밀겠습니까? 이제 감사절을 맞으며 불평을 버리고 감사합시다. 감사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