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92]섬진강길 걷기와 운조루雲鳥樓
지난 금요일 오후, 2월에 정년퇴직하는 전주 모대학의 교수친구가 불쑥 전화를 했다. 지인들과 섬진강 길 걷기를 시작했는데, 그날의 코스는 압록鴨綠-구례구역求禮口驛이었다. 예약해 놓은 펜션은 있지만, 우리집 사랑방이 생각나 가도 되냐는 것이다. 이러할 때를 위하여 만들어놓은 거라며 반색을 하니, 곧장 들이닥쳤다. 멤버들이 대충 또래인지라 말도 잘 통하고 나쁠 이유가 없었다. 55년생 2명, 나를 포함해 57년생 3명, 62년생 2명. 덕분에 긴 밤이 외롭지 않았다. 한데서 고기도 구워먹으니 더욱 별미이다. 한 친구는 바둑 고수였다. 프로와 석 점을 놓고 버틴다해 깜짝 놀라 두 점을 깔았다. 접바둑인데도 용호상박, 자존심은 상해도 실력차이가 뚜렷하니 어찌할 것인가.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그러니 어느 경우에나 겸손謙遜해야 할 일이다. 겸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청敬聽. 고담준론도 이어지니 밤이 즐거웠다.
다음날, 구례구역에서 운조루雲鳥樓까지 걸을 예정인데, 같이 가지 않겠냐한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왜냐하면 운조루의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쓰여진 뒤주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여 아무 준비없이 따라나섰다. 섬진강蟾津江 뚝방 길을 따라, 사성암四聖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약 15km, 날씨가 변화무쌍이다. 섬진강의 유래를 아시리라(글 말미 참조하시압). 두꺼비 섬蟾자이다. 섬진蟾津, 두꺼비나루터. 엄청 큰 두꺼비 조형물도 만들어놓았다. 어느 구간은 흰 구름이 흐르는 쾌청이었다. 어느 길은 바람이 거세었다. 하이라이트는 진눈깨비가 흩뿌리고 춥기까지 했다. 운조루에 대한 사전지식은 좀 있었기에 안내판은 읽지 않아도 됐지만, 문화해설사를 자청한 택시기사의 잘난체가 밉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에서 구름 운雲자와 새 조鳥자를 따온 것이라 한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하고) 鳥倦飛以知還조권비이지환(이라). 구름은 무심코 뫼부리에서 피어오르고, 날기에 지친 새는 둥지로 돌아오네. 금환낙지金環落地(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곳)라는 명당에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1726-1797)라는 분이 6년에 걸쳐 1776년(영조 52년) 지은 전형적인 조선조 양반집 99칸. 유이주는 경북 안동사람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담대한 선비였던가보다. 호랑이가죽은 임금님에 진상하고, 호랑이뼈 2개를 소슬대문 위에 걸쳐놓았다(누군가 그 뼈를 훔쳐가 지금 걸려있는 것은 말뼈라 한다). 궁궐은 100칸間을 지을 수 있지만, 영의정도 99칸밖에는 못짓는다. 칸은 한 채가 아니고, 기둥과 기둥사이가 한 칸이다. 전면이 5칸이고 옆면이 두 칸이면 열 칸건물인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합한 게 99칸.
드디어 소슬대문 앞의 ‘타인능해’ 뒤주를 보았다. “누구라도(타인他人) 열(해解) 수 있다(능能)”는 뜻이다. 배고픈 사람들은 주인의 눈치 보지 않고 뒤주의 빗장을 당겨 쌀을 가져가라는 것. 굴뚝도 아주 낮은 게 특색인데, 연기가 밑으로 기어 높이 솟지 않게 하는 배려이다. 아름다운 마음씨다. 경상도 경주에 ‘최부자집’이 있으니 전라도에도 ‘운조루 뒤주’가 있다. 2가마 반이 들어가는 뒤주, 1년에 36가마를 내놓은 것인데, 1년 소출의 20%를 차지했다던가. 지금 대문앞에 놓여있는 뒤주는 모조품이고, 원 뒤주는 유물전시관에 있다. 당초 사랑채의 당호인 운조루 현판도 보관돼 있는 유물전시관에는 유이주의 홍패교지敎旨(병과5등 합격)도 있고, 그, 후손(운조루 주인)들의 족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아 이채롭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운조루 뒤 안채 등은 복원중이어서 볼만한 것이 없어, 유물전시관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그 후손 중에 대학교수 유응교는 운조루의 정신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놓았다. 첫째가 ‘적선積善하는 정신’이고, 둘째가 ‘기록정신’이다. 후손들의 기록이 채곡채곡 쌓여 있다. 셋째가 ‘풍류정신’이고 넷째가 ‘효도정신’이며, 마지막이 ‘분수에 맞게 사는 정신’이란다. 멋지다. 18세기에 유이주라는 분이 운조루를 폼으로 지은 게 아니다. 멋과 낭만을 아는 풍류맨인데다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는, 철학이 뚜렷한, 이른바 뼈대 깊은 양반이었던 모양이다. 마침 운조루가 있는 마을 이름이 오미동이다. 다섯 가지가 아름답다는 오미五美는 무엇인가. 물과 샘이 풍족하고, 풍토가 질박하며 터와 집들이 살아가기에 좋다는 뜻이란다.
풍수가 무엇인지 모르나, 금환낙지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또 멋지다. 지리산에 사는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를 감으려다 금가락지(金環)을 떨어뜨린 곳이 ‘오미동’이었다 한다. 구라를 피려면 이 정도로 펴야 할 것이다. 그때 금비녀(금잠金簪)도 떨어뜨려 ‘금잠낙지’라고도 한다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리.
아무튼, 모처럼 섬진강 둑방을 따라 15km를 지인들과 즐겁게,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데, 봄이 오는 색깔을 봤다면 거짓말같은가. 강가에 무성한 버들개지들이 멀리서 보니 약간 연두빛을 띤 것같다. 확실히 봄이 오고 있다는 방증일 터. 조만간 아지랑이도 피어날 것이다.
다음날 일요일, 일행은 순창 채계산釵笄山(비녀 채, 비녀 계. 책을 쌓아놓은 것같다하여 책여산冊如山이라고도 한다)의 출렁다리(길이 270m)를 왕복한 후, 동계 장군목(요강바위)를 찾았다. 용궐산의 잔도마저 올랐다면 금상첨화였으련만. 농한기 콧바람을 씌워준 일행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 섬진강의 유래가 어찌 한두 개만 될까. 고려말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심했는데, 한번은 왜구들이 강 하구로부터 침입해 오자 진상면 섬거에 살던 두꺼비 수 십만 마리가 나루터로 몰려와 울부짖어 왜구들이 놀라 물러갔다고도 하고, 또 한번은 강 동편에서 왜구들에 쫒긴 우리 병사들이 나루 건너편에서 잡힐 위기에 두꺼비 떼들이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병사들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왜구들도 두꺼비 등을 타고 강을 건너던 중 강 한가운데에서 두꺼비들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버려 왜구들이 모두 빠져죽었다는 설도 있다. 또는 어느 처녀가 두꺼비에게 먹이를 주며 보살펴줬는데, 큰 홍수가 나 처녀가 물에 떠내려가 죽게 되자, 두꺼비가 등에 태워 살려주고 자신은 지쳐 죽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믿거나말거나 설화說話는 이래서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