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67
1월11일[연중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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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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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551yHJCCPY (신기훈 그레고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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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Go and Stop!>
어촌의 겨울은 무척이나 황량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바다에 나가봐야 별 소득이 없습니다. 그리도 우글거리던 우럭이며 놀래미, 쭈꾸미나 낙지가 귀신처럼 사라져버립니다. 강풍까지 불어오면 체감온도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다 아무도 찾는 이마저 없다면 쓸쓸 허전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며, 피정객이며 방문객들로 왁자지껄하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집니다. 공동체 전체가 활기를 띱니다. 다들 바쁘게 움직입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이른 새벽 눈뜰 때부터 늦은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으니 몸이 천근만근입니다. 그러나 사목자로서 참으로 행복한 순간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아마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일상은 말씀의 선포, 치유와 구마,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 그리고 그들을 위한 기도 등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홀로 떨어져 지내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가난한 백성들, 죄인인 인간들 사이에서 굳건히 현존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길어봐야 3년! 마음이 초조해지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강도 높은 사도직 활동이 끝나면 한 며칠 만사 제쳐놓고 휴가도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또 다른 고을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깃을 붙들었습니다. 제발 이곳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계속 머물러 달라고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안타깝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다음 고장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코 복음 1장 36절)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의 행적에는 또 다른 독특한 측면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Go and Stop!’ 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무작정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않으셨습니다. 적당한 순간 멈출 줄 아셨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코 복음 1장 35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닌 모든 역량과 에너지, 카리스마와 능력을 총동원해서 사도직 활동에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병자가 치유되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죄인이 회개했으며 구원의 길로 돌아섰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요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쭐대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요란한 함성을 뒤로하고 또다시 한적한 것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며 지친 심신을 달랬고, 원기를 충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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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바다와 같은 사람>
제가 25세가 되었을 때, 신학교에 갈 것인지 아니면 지금 가던 길을 계속 갈 것인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대답을 주지 않을 때 대천 앞바다에 옷을 입은 채 그대로 뛰어들었습니다. 겨울이었고 밤이었고 술 한잔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다는 대답을 해 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자살하러 물속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 추운 겨울에 저와 함께 갔던 사람들이 옷을 입은 채 절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신학생 때 무작정 떠나고 싶은 적이 있었습니다. 방학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즐겁게 놀아도 무언가 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다였습니다.
부모님께 말도 안 하고 그냥 가방을 메고 무작정 강릉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도착하니 너무 늦은 밤이라 숙소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경포대 해변에서 아침을 기다리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동이 터 올 무렵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불덩이가 바다에서 치솟았습니다. 모래사장 위에서 아침 성무일도를 바쳤습니다. 기도의 맛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을 떠나 바다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다를 보는 눈은 인생을 보는 눈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도 합니다. 아침 녘 바다를 좋아하면 인생의 시련을 많이 겪은 사람이고, 석양 무렵 바다를 좋아하면 인생을 낭만적으로 여기는 사람이고, 밤바다를 좋아하면 인생에 당당하고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참조: 내 인생의 화양연화, 123]
그러니까 바다는 인생의 어려움을 뚫고 힘겹게 도착한 사람에게도 인생을 낭만적으로 산 사람에게도 모험하며 산 사람에게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바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바다의 모양은 수없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해도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혹은 기쁠 때도,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도 사람들은 바다를 찾습니다. 왜 바다는 그렇게 사랑을 받는 것일까요? 아마도 모두를 품어줄 수 있는 넓은 가슴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도 보니까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찾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 주시고 고통받는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즉 행복한 소식을 전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다 품에 안으셨습니다. 바다와 같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가장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저는 신자분들이 저를 만나기를 원한다면 언제든 오라고 합니다. 마음이 넓어서라기보다는 본당을 더 이상 맡지 않기 때문에 혼자가 될까 두려운 마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나를 잊고 찾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그러나 실상은 많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라고 하시지 않고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쫓아다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외로워질까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바다는 그냥 바다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좋아해 주고 찾아 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을 많은 이들이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일을 합시다.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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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영화 아바타(물의 길)에서는 인간이면서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한 명은 나비족과 함께 살면서 나비족의 철학과 가치를 배운 제이크입니다. 다른 한 명은 나비족이 되었지만 인간의 가치와 철학을 간직한 마일즈입니다. 제이크는 나비족의 여인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고, 자연을 사랑하며 가족들 돌보는 나비족이 되었습니다. 마일즈는 몸은 나비족이 되었습니다. 큰 키와 강한 힘을 지녔지만 그 힘으로 나비족을 탄압하고, 나비족의 마을을 불살랐습니다. 마일즈가 나비족이 된 것은 자연을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자원을 빼앗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제이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겉모습이 닮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과 함께 내면의 모습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질책하시면서 무엇이 깨끗한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들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탐욕, 분노, 질투, 음탕, 시기, 교만, 게으름, 원망’이 우리의 마음에서 나와 우리의 몸을 부정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상석에 앉으려 하는 사람,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 단식한다는 표시를 드러내는 사람,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부정하셨기 때문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죄에 물들었기 때문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품격이 높아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는 하느님의 아들이 무슨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셨습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의 품격을 높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세례도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면서 우리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썩을 몸도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예수님의 치유가 여러 마을에 전해지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또한 겉모습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우리의 삶으로 온전히 전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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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9-39: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시몬의 장모와 비슷한 상태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옆에 와 계신다. 아파서 누워있는 우리의 침대 옆에 이미 와 계시다. 그분께서 와 계신데도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믿음으로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분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시몬의 장모는 침대에 누워 자기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고, 그분을 뵈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자 자비로우신 의사께서 그 침대 곁으로 가셨다.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셨던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31절) 당신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주셨다. 당신 손으로 그 여인을 고쳐 주셨다.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어 우리를 깨끗이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안식일에는 짐을 지거나 가지고 거리를 지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저녁에 해지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율법은 하늘에 별이 3개가 나타나면 그날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여 안식일도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해가 지고,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그러한 그들을 예수님은 모두 고쳐 주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항상 기도하셨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다. 우리도 늘 기도하면 그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 하셨다. 우리도 그러니 늘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38절)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 구석구석에 빛을 비춘다. 그분의 구원 의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해당하는 것이며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빛은 곳곳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을 비추어야 하는 빛이기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면 그 빛을 우리도 전하는 도구가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감사로 응답을 드리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잘못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에서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기억되고 사랑받으시고 찬미와 감사를 받아야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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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그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29-3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으로서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사로서 병을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서 병을 쫓아내셨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을 꾸짖으셔서 쫓아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4,39)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이야기 바로 앞에 어떤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간청했고(마태 8,8),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감탄하시면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마태 8,10)
백인대장이 한 말은, “주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병이 떠나고 제 종이 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이 믿은 것처럼 한 마디 말씀만으로 그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2-34)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서 사람들을 악에서 구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질병과 마귀는 모두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악’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마귀 들린 일이 병의 일종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고, 병을 마귀의 소행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라는 말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입니다.(마태 8,16)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4,40).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도 차별하지도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똑같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앞에서는 개인이 전체에 묻혀서 잊히는 일이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한 존재로 대우받습니다.> 이 말에서 ‘목자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끌어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요한 10,3ㄴ-4ㄱ)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모두 하나하나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기도를 하나하나 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말은, 치유의 은총에 아무런 조건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으라는 요구도 하지 않으셨고,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도 않으셨습니다.
<7장에 나오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거절하는 것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마르 7,27), 그것은 그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고 있는 ‘강아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자녀로 변화된 뒤에는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마귀들이 당신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하는 것을 막으려고 그것들이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라는 뜻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존재입니다. 믿기는커녕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적대자들입니다. 따라서 마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한 일입니다.>
사람들 경우에도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을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만나야 하는 분이고, 믿음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5-39)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증언입니다.(요한 18,36) 제자들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것만 보고서 예수님의 활동을 성공적인 일로 생각했지만, 그들이 생각한 것은 ‘세속적인 성공’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요구를 들어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영적으로’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병자 처지에서는 치유 자체가 구원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몸의 치유는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구원이 완성됩니다. 몸이 치유된 것으로만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나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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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회당에서 악령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그곳에서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는 기적이 오늘 복음이 전하는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앞선 구마와 치유 기적에 이어 예수님의 업적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세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은 6장 46절과 14장 32-42절(겟세마니에서 기도)에서도 언급됩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요약해서 전하는 가운데 표현된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소는 ‘외딴곳’으로 표현되는데 이 또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복음서에서 사용하는 전형적인 낱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복음선포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의 활동을 정리한 모음집과도 같습니다. 그분의 활동은 치유, 구마, 기도와 복음선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모든 활동 가운데 중심이 됩니다. 치유나 구마도 하느님의 힘이 드러나는 업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말씀을 통해서만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활동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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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기도해 줄 사람이 있으십니까?>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 59)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가며, 보속할 것이 남은 사람은 연옥에 간다고 들어 알고 있으며 믿고 있지요. 연옥에서 죄의 대가를 다 치르지 않고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 말씀대로 살아생전의 용서와 화해가 죄를 없애는 길이고 연옥 벌을 줄이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서 우리는 수시로 묵주기도를 하고 화살기도를 바치며, 매번 식사 후에는 반드시 죽은 영혼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지요.
이렇게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나의 기도를 통해서 연옥 영혼의 벌이 사해지고 천국에 가기를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생전에 죽은 사람을 위하여 봉헌하고 기도하는 이 모든 행위는 내가 죽어서 연옥에 갔을 때 나를 위한 기도로 다시 응답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생전에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사람이 있는가?'
내가 죽었을 때 기도해줄 사람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요. 자식이 있더라도 냉담을 하거나 종교가 다르거나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없다면 내가 죽어서 아무리 연옥에서 고생을 하고 있더라도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었을 때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사람이 있고 없음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녀의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죽은 후에 기도할 수 있고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자녀가 냉담을 하거나 아예 신앙을 갖지 않거나 신앙이 다를 때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살아생전에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죽은 후에 나를 위해서 기도드리고 또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줄 사람이 많은 것처럼 축복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살아생전에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내가 지은 벌을 없애고, 혹시라도 남은 부분이 있다면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으며 나의 기일에 연도를 바치고 미사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위로이자 행복일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삶을 평상시에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하고 자식을 위한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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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열병으로 누워있었는데>
그 무렵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어가셨다. 때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께 알렸다. 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악령 들린 사람에게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셨다.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놀라는 모습을 보았다.
권위 있는 말씀으로 치유받은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여 주신다.
즉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오늘 복음에서 열병으로 누워있던 부인이 일어나 시중을 드는 모습으로 보여 주신다.
예수님이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는데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야 할 부인이 열병으로 누워있는 상황이었다. 일어나서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야겠는데 몸이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상황이다.
시몬의 장모가 무슨 병으로 열이 나서 누워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손님이 오셨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것이다.
누워있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열병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하나의 악이다.
우리도 열이 나서 자리에 누워있을 때가 있었는가? 언제 또 무엇 때문에 열병을 앓았는가? 열병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반당했을 때, 부부 싸움을 했을 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화가 났을 때, 또는 질투심이나 이기심 등 여러 가지 이유로도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육체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로 열병을 앓을 때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심하게 열병을 앓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이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하신 후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툰 일이 있다.(마르 9, 33 참조)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일종의 시기심, 질투심이요, 그것 때문에 자기들 안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더러운 영은 우리를 열병으로 누워있게 만든다. 정신적인 대부분 열병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 의한 삶을 살지 아니하고 더러운 영의 노예가 되어 생활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떤 열병이든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래서 자리에 눕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악이다.
악은 사람을 점점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들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기에 어떤 열병이든 그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반드시 치유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열병을 앓아서도 안 되고, 또 다른 사람이 열병을 앓게 원인 제공을 해서도 안 된다.
이런 모든 악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또는 잘못된 주위 환경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앓고 있는 열병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능력을 갖추고 계신 예수님이 사람들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무심코 읽고 지나칠 수 있지만 그 당시 사정을 안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닌 굉장히 개혁적인 일이다.
그 당시에 여인의 존재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증인으로 내세울 수도 없었다. 거기에다가 늙고 열병으로 누워있는 보잘것없는 여인이라면 얼마든지 무시해버릴 수도 있는 여인을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로써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코전1,26)
라는 말씀대로 가장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마르코 복음이 모두 600여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100여 문장이 여인에 관한 문장이며 그것도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여인이 등장한다.
그만큼 예수님은 여인의 위치를 존중해주셨고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고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3-35)라고 말씀하신 대로 복음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신다.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 무슨 뜻인지,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 무엇인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보여 주신다.
복음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는 다르다. 높고 화려하고 힘 있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관점과는 정반대되는 가장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고 봉사 받는 삶이 아니라 봉사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셨다.
이렇게 인간적인 사고와 가치관에서 복음적인 사고와 가치관으로 바뀔 때 비로소 우리는 ‘복음에 눈을 떴다’라고 말할 수 있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삶을 산다고 감히 말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실현해야 할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복음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삶은 힘 있고 가진 이들만이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장 보잘것없는 연약한 인간도 실현시킬 수 있고 건설할 수 있는 나라이다. 가장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복음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가장 위대한 일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 열병으로 앓고 있는 병자들이 생활하고 있는 나라와 열병에서 치유되어 일어나 봉사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와는 같은 나라가 아니다. 이런 새로운 삶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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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하루의 마감과 시작인 기도>
오늘 복음도 아직은 ’예수님의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9)에 속한다. 아직 카파르나움의 하루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거기 있던 악령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께서 회당을 막 나서시자 하셔야 할 일들이 태산같이 그분을 반겼다.
우선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러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님을 고쳐 주셨고, 해가 저물어 문밖에 모여든 수많은 병자와 마귀 들린 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늦게까지 일하신 예수께서 잠시 눈을 붙이시고 먼동이 트기 전에 외딴곳에서 기도하신 후 복음선포의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셨다.
회당에서의 예배, 예수님의 설교와 구마활동이 끝났을 때가 아마 늦은 점심시간쯤 되었을 것이다.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생각에 점심을 드실 곳이 마땅치 않아 시몬의 집을 찾아가신 것 같다. 그런데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누워있다고 한다.
열병(熱病)이라면 온몸에 열이 나서 두통, 한기, 식욕부진, 수면 부족 등을 증세를 보였을 것이다.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어떤 장면에 이르러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많은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이 구절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시몬이 누구인가? 이미 결혼을 하여 처자식과 장모까지 변변찮은 어부의 직업으로 먹여 살려야 했던 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가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웬 낯선 사람의 "나를 따라오너라."(1,17)라는 말에 즉각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졌으니, 장모의 마음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이 화병(火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1절)고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두 사람의 마주친 시선과 짧은 접촉은 늘 많은 생각을 주는 장면이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 사람들이 가능한 모든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을 시몬의 집 앞에 데려왔고, 동네 사람들까지도 모두 모여들었다.(32-33절) 해가 지고 난 뒤에 사람들이 이 일들을 한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라."(탈출 20,8)라는 모세의 율법은 안식일에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어야 하며, 병자들이나 짐을 들것에 실어 옮기지 못하는 등 많은 안식(安息)의 규정을 두고 있다.(예레 17,21-22; 요한 5,10)
그런데 유대인들은 해가 지고 나면 이미 다음 날이 되는 관습을 따른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우리가 두 손에 무엇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 더 받을 수 없으나, 빈손으로 있다면 가득 받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수께 몰려온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는 ‘빈손의 사람들’이었다.
카파르나움에서 하루가 저물어간다. 그것은 해가 지고 밤이 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하루는 새벽까지 계속된다. 바로 동이 트기도 전, 이른 새벽까지가 예수님의 하루 마감이며, 동시에 새날의 시작이다. 그 기준은 바로 기도이다.
종일 가르침과 치유 활동으로 지친 몸은 휴식과 잠으로 풀 수 있겠지만, 복음선포의 원동력은 아버지와의 만남과 대화, 즉 기도로 회복된다. 이점을 예수는 잊지 않고 있다.
기도는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견인(牽引)하는 원동력이며, 하루의 마감이자 시작이다. 시몬과 그 일행도 예수님을 찾아다니지만 말고(36절), 제자 됨의 기본인 기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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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강길웅 세례자 요한 신부님]
<병마를 쫓아 내시는 예수님>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부귀와 건강은 하느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질병은 하느님의 징벌이었습니다. 따라서 병에 걸린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은 그 자체의 고통보다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부끄러움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허망한 현실에 대해 인생을 슬프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재산도 많았고 자녀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다 잃고는 알거지가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욥 자신이 나병에 걸려 잿더미 위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전혀 제공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욥에게 있어 인생은 실로 고역이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의 시대에도 병은 무섭습니다. 암이나 에이즈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감기에 이르기까지 의학이 정복하지 못하는 분야는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일단 병에 걸렸다 하면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 정신적인 고통도 뒤따르게 되며 또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시간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손실을 주게 됩니다.
옛말에 '우환이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환이 강도'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회당에서 설교하신 후에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뿐 아니라 당신을 찾아온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또한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병이 낫고 마귀가 쫓겨난다는 것은 메시아가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로서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열광하게 됩니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병이 들었다 하는 것은 마귀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훼방을 놓고 장난을 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마귀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으며 단지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면 마귀의 모든 세력이 꺾여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생의 새 지평선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질병, 혹은 자기 죄로 인해서 지옥에 갇혔던 인생들에 이르기까지도 예수님은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어떤 형제가 간질병을 남모르게 가지고 있었는데 병으로 인해서 그 인생이 점점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우울증으로 비관하면서 고통을 겪다가 나중엔 과격한 행동으로 폭력을 휘두르게 되어 주위의 사람들을 자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으나 병에 마음이 묶여진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새 인생을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형제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자신만이 몹쓸 병을 앓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이 컸고 세상이 저주스러웠으나 예수님의 고난과 성모님의 통고를 알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진실로 사랑해 주시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자 그는 실로 축복받는 인생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현대에도 치유의 기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인생은 절대로 고역이 아닙니다. 불행의 대명사였던 고통은 이제 더는 불행이 아니며 오히려 축복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징검다리로서 그 자체가 하느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예수님 친히 그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고통의 의미가 그토록 크다는 것이며 죽음의 세계에까지 들어가셨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도 새 세상을 여는 관문이 된다는 것을 자신의 부활로써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질병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병들고 생활이 부패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의 악습에서 여전히 뉘우칠 줄을 모르고 헛되게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치유하게 됩니다.
아니, 예수님은 그들을 애정으로 항상 찾아 나서십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시는 것이 그분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병자나 죄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다만 그분은 우리도 당신을 찾아 주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으며 또한 치유되지 못할 병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능력은 그보다 훨씬 크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께 나가도록 합시다. 슬프고 괴로울 때 그분 앞에 나아가 진실을 말씀드리도록 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놀라운 은총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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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와 벗>
마르코 1,29-39 (시몬의 병든 장모와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기도와 벗>
벗과 함께하러
기도하고
기도하러
벗과 함께합니다
벗과 함께하니
기도하고
기도하니
벗과 함께합니다
벗에게로
기도는 이끌고
기도에로
벗은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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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부님]
<기적의 분위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고에 시달리는 부인의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언제부터 병증이 시작되었는지, 치료를 위해 그동안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그러나 병세는 좋아지지 않았고 결국은 자리에 몸져누워버린 그녀를 꼭 좀 도와주십사 하고 애원했습니다.
건강을 되찾는다면 그녀와 이런저런 활동을 다시 함께하고 싶다는 짧지 않은 이야기를 예수님은 귀 기울여 들으셨습니다. 자기들이 겪는 증상처럼 힘주어 실감나게 설명하던 이들의 표정이 중간에 바뀌고 있었습니다. 관심을 붙들고 싶어서 시작할 때는 걱정으로 어두웠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을 마주하니 그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시몬의 장모는 그 즉시 섬김에 참여했고 기적을 믿는 분위기가 공간을 채웠습니다. 저녁이 되고 어두워졌지만, 그들이 병든 이들을 찾아 데려왔는데 고을 사람 모두가 온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들 마음에 그 마을 안에 병고에 시달리는, 도움이 꼭 필요한 이들의 명단이 각자의 사연과 함께 새겨져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표정을 읽은 사람들은 그렇게 고통의 중재자가 되어 힘든 이들의 사연을 밤이 새도록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활동을 축복해주시고 이웃 고을로 떠나셨습니다.(생활성서 2023년 1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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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지니고 마귀를 쫓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고,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신 후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능력의 원천인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공을 돌리고 그분께 의지하십니다. 기도는 나의 바람을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제자들이 찾아와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알아주는 추종자들 곁에 머물기를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기에 인기나 유명세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고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려면 외딴곳을 찾아 고요속에 기도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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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비신학생을 보면서 과연 신학교에 보내는 것이 맞느냐는 생각을 들게 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선 가장 큰 장점은 ‘착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점도 ‘착하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성적도 낮고, 자기 주관이 없고, 또 자존감도 너무 낮았습니다. 이 상태로 어려운 신학교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지, 또 자존감 없이 신학교 기숙사 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성소자가 매우 부족하고, 또 신학교에 들어가서 바뀌지 않을까 싶어 추천했지만, 신학교 입학한 학생 대부분은 결국 사제가 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었습니다. 착하기는 엄청 착한데, 왜 사제가 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둘까요?
이런 고민을 하던 중, 스페인 성지순례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빌라에서 데레사 성녀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수도자가 너무 착하고 온순해서는 내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내적으로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착해 보이지 않고 또 온순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적으로 강한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또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다른 이웃 고을로 이동하셨습니다. 바쁜 전교 활동의 일과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늘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기도하러 외딴곳에 가신 예수님을 찾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당신 뜻을 세워 다른 고장으로 가십니다. 악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착하기만 한 점을 보였다면, 마귀들이 말하는 것도 경청해주고 당신을 찾고 있는 사람도 만나주면서 그 고장에 더 머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하느님 뜻에 맞춰 사는 내적으로 성장하는 삶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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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살인적인 일정을 초인적인 힘으로>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오늘 복음은 꼭 어느 한 날 있었던 얘기가 아닙니다. 매일 이런 일정을 소화해내는 주님의 일상이라는 얘깁니다. 외딴곳에 가서 기도하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새날이 되면 다른 곳으로 가시는 일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일상을 보면서 우리의 일상, 저의 일상은 어떤 것인지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저의 일상은 여러분이 대개 아시듯이 주님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도 주님처럼 새벽 아직 컴컴할 때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지는 않고 제 방에서 복음 묵상 겸 기도하고 강론을 쓰고 올립니다.
그리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답할 것이 있으면 답합니다. 그런 다음 현장에 나가게 되면 새벽 미사와 기도를 혼자 바치고 새벽 5시에 일 나가 저녁 7시면 돌아와 씻고 저녁기도와 식사하고 잡니다.
요즘처럼 일이 없어 일을 안 나가면 강의 준비하고 밀린 일을 하고, 운동도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휴식 시간도 빼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각종 회의나 만남이나 강의와 사목으로 바쁘고요.
그러니까 주님과 저의 차이는 쉼과 운동이 저한테는 있고 주님께는 없다는 것인데 쉼이나 운동 없이 주님께서는 그 살인적인 일정을 어떻게 초인적으로 버티셨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정은 가히 살인적입니다. 일정이 빡빡하고 쉴 시간이 없다는 면에서 살인적일 뿐 아니라 가르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병자를 치유하고 악령을 퇴치하는 것이 얼마나 힘을 빼는 일인데 그 많은 병자와 부마자를 대하시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초인적이지 않으면 살인적인 일정을 해낼 수 없는 것인데 그 초인적인 힘이 어디서 난 것입니까?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게 그런 거라고 하면 얘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겠지만 우리는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주님도 우리와 같이 피와 살을 나누시고, 모든 점에서 같아지셔서 유혹까지 받으신 분이기에 얘기할 게 있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은 주님의 그 초인적인 힘의 원천을 우리가 잘 압니다. 삼손이 머리를 길러서 하느님의 힘을 지녔듯이 하느님으로부터 그 힘을 받았다는 것과 그것이 기도라는 것을.
그렇습니다. 현명한 사람에게 기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겁니다. 뭣 하러 받지 않고 힘 빠지게 뭣을 합니까? 기도한다면 받기 위해서 하지요.
사실 우리도 가진 것이 없기에 받기 위해 기도를 많이 하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재물이거나 병의 치유거나 합니다. 그런 것들도 청해 받아야겠지만 오늘 우리가 주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힘을 받는 것이고, 그것은 뭘 하는 것이기보다는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뜨거운 물에 잠기고 편백나무 휴양림에 머물 듯 이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거야 하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면 그것이 기도이고 그 기도 안에서 우리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어렵지 않고 쉽고, 힘들지 않게 힘을 얻습니다. 이것을 주님께 배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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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본질에 충실한 삶>
- 중심과 질서 -
“거룩하신 주님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시편105,3)
아직은 겨울이지만 큰 추위는 지난 듯 왠지 모를 봄기운도 느껴집니다. 밤공기도 상쾌하고 밤하늘의 별들도 또렷합니다. 우선 숙소를 나와 맨 먼저 바라보는 밤하늘의 북두칠성 그리고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이렇게 또 선물 같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하루생활의 윤곽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본질에 충실한 100%의 삶, 온전히 하느님과 이웃에 활짝 열린 삶, 오로지 이웃을 위한 삶이었음을 봅니다. 아마도 하루하루 날마다 본질에 충실한 반복적 삶이었을 것입니다.
똑같이 선물로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입니다. 과연 하루하루 몇 %의 삶을 살고 있는지요? 오늘 예수님의 일과가 참 치열합니다. 본질에 충실한, 아주 중심과 질서 잡힌 삶입니다. 혼란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아주 물 흐르듯 순조롭게 전개되는 단순하고 투명한 삶입니다. 마침 충실한 일상을 살아내는 어느 자매의 카톡을 받았습니다. 힘든 중에도 깨어 의식 있는 삶을 살아가는, 정말 살 줄 하는 자매입니다.
“지난 12월 초 김대건 ‘탄생’ 영화와 성탄절 오후 비오씨와 함께 ‘영웅’을 관람하면서 신앙과 참부모 역할, 진정한 애국과 거룩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며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게 올바른 삶인데 많이 찌질이로 사는 저희의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연말이었습니다.”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이 정도의 삶이면 평범한 일상을 알차게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는 장면, 2.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 3.전도여행을 떠나시는 장면으로 온전히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100% 삶이요, 아마도 예수님은 하루하루 날마다 이렇게 반복적 삶을,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의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삶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중심과 질서잡힌 본질에 충실한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한결같이 외딴곳에서 바친 기도일 것이며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다음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바로 날마다 외딴곳에서의 이 새벽 기도가 예수님 삶의 중심이자 모든 활력의 원천이었음을 봅니다. 이런 삶의 중심 없이, 하느님 의식 없이 일상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고, 잊고 유령같이 헛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어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의 주석을 읽을 때 다음 평범한 대목이 깊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죽음, 즉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영원히 분리시키는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악의 세력이다.”
살아있다 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어도 주님과 무관無關한, 주님을 잊은 삶이라면 살아있다 할 수 없습니다. 사막교부들 역시 늘 명심했던 바,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하느님 중심의 ‘참으로 살아 있는 삶,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중의 인기에 편승하거나 일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음도 바로 기도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외딴곳에서 기도하시자 즉시 예수님께 유혹이 뒤따릅니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마자 전하는 말입니다.
“모두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들의 유혹에 반응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계속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사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자세가 단호하고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가 예수님의 본질에 충실한 참 멋진 삶을 요약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날마다 외딴곳에서 기도하며 삶의 중심을 잡고 복음선포의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활동묘사도 아름답고 멋집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복음선포에 곧장 이어지는 구원의 치유활동입니다. 참으로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복음선포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의 자랑과 고마움은 파스카의 예수님과 늘 함께 살면서 하느님 중심의 본질에 충실한 질서 잡힌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참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우리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복음입니까! 이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악마를 파멸시킨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할 때 천하무적의 삶이겠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겸손한 사랑이 참 은혜롭고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분께서는 천사들이 아닌,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우리를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신 주님과 함께할 때 인생 광야 순례 여정도 성공적일 수 있겠습니다. 바로 하루하루 날마다 외딴곳에서의 이 거룩한 성전미사 은총이 우리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고 본질적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을 생각하라, 그 권능을 생각하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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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1,34)
<치유의 중재자가 되자!>
오늘 복음(마르1,29-39)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는 말씀'과 '많은 병자을 고치시는 말씀'과 '전도 여행을 떠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와 온 고을에서 몰려온 많은 병자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곧 누군가가 아픈 이들을 예수님께로 연결시켰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시몬의 장모 사정을 예수님께 알렸고, 누군가가 아픈 이들을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픈 이들을 주님께로 데려가는 '치유의 중재자'가 되자는 묵상 나눔을 합니다. 이는 곧 '내가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고, '너에게 아픈 이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의 아픔이 너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성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성직자들에게 조차도 자신이나 너의 아픔을 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시몬의 장모가 아프다는 사정을 예수님께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시려고 다른 고을들로 떠나십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2,18)
예수님께서 새벽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픈 이들을 위한 기도 부탁도 잘하는 그런 '치유의 중재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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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73QKRXD7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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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 35)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삶의 깊은 맛은
기도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하루를
충만케 한 것은
분명 기도였습니다.
도와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보게됩니다.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중심을
잡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걸어야 할
가장 본질적인
길입니다.
기도로
연결되어 있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치유와 정화
복음선포는 기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사랑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분주한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기도로 하루를
여셨습니다.
우리의 삶또한
기도가 중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있는 우리를
더욱 살아있게
하는 것이 기도임을
믿습니다.
다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시간속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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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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