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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4
#요한계시록 #Revelation 3:18-20
18 내가 너를 勸하노니 내게서 불로 鍊鍛한 金을 사서 富饒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羞恥를 보이지 않게 하고 眼藥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I counsel you to buy from me gold refined in the fire, so you can become rich; and white clothes to wear, so you can cover your shameful nakedness; and salve to put on your eyes, so you can see.
Suadeo tibi emere a me aurum ignitum probatum, ut locuples fias, et vestimentis albis induaris, et non appareat confusio nuditatis tuæ, et collyrio inunge oculos tuos ut videas.
συμβουλεύω σοι ἀγοράσαι παρ’ ἐμοῦ χρυσίον πεπυρωμένον ἐκ πυρὸς ἵνα πλουτήσῃς, καὶ ἱμάτια λευκὰ ἵνα περιβάλῃ καὶ μὴ φανερωθῇ ἡ αἰσχύνη τῆς γυμνότητός σου, καὶ κολλούριον ἐγχρῖσαι τοὺς ὀφθαλμούς σου ἵνα βλέπῃς.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者를 責望하여 懲戒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熱心을 내라 悔改하라
Those whom I love I rebuke and discipline. So be earnest and repent.
Ego quos amo, arguo, et castigo. Æmulare ergo, et pœnitentiam age.
ἐγὼ ὅσους ἐὰν φιλῶ ἐλέγχω καὶ παιδεύω· ζήλευε οὖν καὶ μετανόησον.
불로 연단한 금이란 공력을 시험할 성령의 불에 나무나 천이나 지푸라기처럼 태워져 소멸되지 않고 참된 복음과 신앙을 기반으로 굳건하게 버티고 이겨내어 남아있는 교회 사역의 성과를 의미한다. 에베소 교회가 거짓 사도들을 밝혀낸 것과 버가모 교회가 안디바의 순교 중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과 두아디라 교회가 사업을 처음보다 나중에 더 키운 것과 빌라델비아 교회가 작은 능력으로 믿음을 지킨 것들이 모두 주님께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산 것으로 인정받은 행위들이다. 이는 개별 성도들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교회 차원의 사역에 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강권하신 이유는 그들에게서는 성령의 불시험을 감당할만한 아무런 공력도 발견하시지를 못하셔서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서 차마 이 교회가 당신의 교회라고 증언하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흰 옷은 개별 성도의 선한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흰 옷은 사람이 스스로 마련할 수가 없으며 반드시 주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성도라고 인증을 하셔야만 마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왕자의 혼인잔치를 성대하게 베푼 왕은 강권하여 데려온 참석자들에게 예복을 나눠주었고 그 예복을 입은 사람들만이 왕의 잔치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왕으로부터 예복을 받지도 않고서 몰래 잔치에 잠입해서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다가 걸린 자는 군졸들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쫓겨나서 이를 갈게 될 뿐이다. 사데 교회의 몇몇 극소수의 참된 성도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이라는 예복이 더럽혀지지 않게 자신들의 선한 행실로 잘 간수했기 때문에 장차 주님께서 입혀주시는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거니는 상급을 받게 된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행위는 비록 겉으로는 매우 격식있고 세련되며 신사적이었어도 그것이 복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문화와 학습에 의한 것이어서 주님께로부터 선한 행실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주님께서는 이 흰 옷도 거저 주시지 않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직접 사야 된다고 하셨는데, 이는 라오디게아 교인 개개인은 사회에서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안심하거나 자랑하거나 안주해서는 안되고 자기들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사용해서 복음을 기반으로 선한 행실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전 재산을 팔아서 보화가 묻힌 밭을 사야했고 전 재산을 팔아서 극히 값진 진주를 손에 넣어야 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의 선행을 위해서 눈에 보이는 재물을 허비해야 했던 것이다. 눈에 바를 안약은 복음의 원리와 체계를 바로 깨달아 아는 지혜와 지식의 은혜와 방편을 의미한다. 이 성령의 안약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발라야 하는데 특별히 교회의 사자가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발라야 한다. 자기의 설교에서 철학과 역사와 학문과 과학과 정치와 간증과 예화를 모두 걷어내어 발라내고 오로지 복음의 순전한 진리만을 취하는 신령한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신학교수는 남들보다 성경에 대한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갑절이나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교수 직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에 급급해하지 말고 보편적 신앙체계와 원리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더욱 풍성하게 밝히고 가르치고 전해야 하며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의 걸출한 저작들을 번역하는데 힘써야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불로 연단한 당신의 금이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흰 옷이나 눈에 발라 훤히 보게 할 안약을 라오디게아 교회에 거저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시고 라오디게아 교회가 무언가 대가를 지불하고 사야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기들의 자랑과 의지로 삼았던 물질적인 부귀영화를 불로 연단한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는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과 경험으로 봤을 때 별다른 어려움이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 굳이 풍족하게 누리고 있는 재물과 지위를 손해보면서까지 번거롭고 힘든 일을 기꺼이 행하려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라오디게아 교회 또한 비록 주님의 극심한 책망과 경고를 받았어도 자기들 스스로 깨우쳐 그 부유한 것들을 포기하고 참된 복음과 사역과 선행을 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런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 하셨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깨닫고 돌이키고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하시려는 것이고 아무리 입에서 토하여 내치고 싶을 정도로 미지근한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버림받은 사탄의 회당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소유인 교회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잘못한 것에 대해 책망과 징계가 없다면 친자식이 아니라 사생자일 뿐이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이 자랑삼고 의지하던 세속적인 부귀영화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징계를 받게 될 때에야 비로소 자기들이 주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신앙의 사생자가 아니라 선택받은 친자녀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20 볼지어다 내가 門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音聲을 듣고 門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Here I am!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one hears my voice and opens the door, I will come in and eat with that person, and they with me.
Ecce sto ad ostium, et pulso : si quis audierit vocem meam, et aperuerit mihi januam, intrabo ad illum, et cœnabo cum illo, et ipse mecum.
Ἰδοὺ ἕστηκα ἐπὶ τὴν θύραν καὶ κρούω· ἐάν τις ἀκούσῃ τῆς φωνῆς μου καὶ ἀνοίξῃ τὴν θύραν, εἰσελεύσομαι πρὸς αὐτὸν καὶ δειπνήσω μετ’ αὐτοῦ καὶ αὐτὸς μετ’ ἐμοῦ.
이 구절은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해 숱하고 오용된 말씀이다. 그들은 주님이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그 문을 열지말지 여부는 사람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 하여 자유의지에 의한 중생을 주장한다. 하지만 주님께서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은 그 대상자가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드리기로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되었고 주님께서 두드리실 때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문을 열어드리고자 하는 새로운 심령을 불어넣어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느 극단적인 개혁주의자들의 주장대로 택함받은 신자의 의지 자체를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면서 기계적인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의 의지로써 택하신 성도들의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셔서 그 성도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주님의 의지임과 동시에 전적으로 성도 자신의 의지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저 멀리서 여호와 그리스도와 그분을 수행하는 두 천사가 나그네의 모양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장막으로 초대하였고 송아지를 비롯한 진미를 서둘러 준비하여 손수 손님 접대를 담당하였다. 여호와 그리스도와 두 천사들은 사람이 먹는 음식이 필요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접대를 기쁘게 받으시고 음식을 드셨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사악한 도시에서 그 많던 재산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맛없는 무교병 밖에 없었어도 여호와 그리스도를 수행하던 두 천사를 영접하여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접대하였고 그 두 천사들은 롯의 무교병을 기꺼이 취했다. 기드온과 마노아 부부에게 사람으로서 나타나신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접대하기 위해 잡아 온 예물을 제물로서 기꺼이 받으셨다. 사렙다의 한 과부는 자기 아들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들어 먹을 떡을 선지자 엘리야에게 기꺼이 접대하였고 수넴의 한 귀부인은 자기 집의 방 하나를 객실로 꾸며 선지자 엘리사를 접대하였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다윗과 그 무리를 위해 적지 않은 음식을 접대하였고 거부 바르실래는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고 도망하는 다윗과 신하들과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음식을 공궤하였다. 다윗은 비록 자기 손으로 여호와 그리스도의 성전을 지을 수는 없었어도 아들 솔로몬이 잘 지을 수 있도록 수많은 금은보화들을 드렸다. 다윗의 용사들의 우두머리인 첫 삼인은 다윗의 목마름을 위해 목숨을 걸고 블레셋 적진을 뚫고 베들레헴 우물에서 물을 길어왔다. 아합의 대신 오바댜는 이세벨을 피해 여호와 그리스도의 선지자 1백명을 동굴에 숨기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접대하였다. 여리고의 창녀 라합은 여호수아가 파견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기고 접대하였다. 기브온 족속들은 원래 멸망당할 가나안 족속 중 하나였으나 여호와 그리스도와 여호수아의 명성을 듣고 자기들의 예물을 준비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접대하였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7년 동안 정신을 잃고 방황하다가 정신을 차린 후에 자기가 다스리는 온 나라에 여호와 그리스도만을 섬길 것을 권면하는 조서를 내렸다. 바사 왕 고레스는 즉위하자마자 여호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고 성전을 재건하게 하며 그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드림으로써 주님을 접대하였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따라 아직 갓난아기인 주님께 와서 유향과 몰약과 황금을 예물로 바쳐 접대하였다. 마르다는 먹을 것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주님을 접대하였다. 한 백부장은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고 여러 선한 일을 함으로써 여호와 그리스도를 접대하였고 다른 백부장은 매일 드리는 기도와 구제 등으로 주님을 접대하였다. 도르가라고도 하고 다비다라고도 하는 여인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옷을 지어줌으로써 주님을 접대하였다. 한 소년은 자기가 먹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도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장정 5천 명을 비롯한 수만명에게 음식을 접대하였다.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받으시고자 하신 것은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기름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여호와 그리스도를 섬기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부자들이 여윳돈으로 드리는 헌금보다도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모든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한 것을 더욱 크게 받으셨다.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이에게 접대한 냉수 한그릇조차도 하늘의 상급이 약속되었고, 복음을 위해 어려움을 당한 이들을 위해 먹이고 입히고 보살피는 것을 주님 자신을 접대한 것으로 여기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복음과 신앙을 위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접대물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이러한 접대를 받으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성령과 성경으로 접대하신다.
#20210304
#신명기 #Deuteronomy 5:20
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두 명의 히브리 산파가 애굽 왕 바로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맞지만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거짓 증거하는 죄로 여기지 않으시고 심지어 그들의 집에 복을 내리셨는데, 이는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인들의 이웃이 아니라 사탄의 사자로서 그를 위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더욱 친밀한 히브리 이웃을 학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었다. 술사 발람은 모압 왕 바락 앞에서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정직하게 거짓없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예언하였으나 그의 본심이 거짓되었기 때문에 얼마 후에 이스라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여리고의 창녀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 두 명을 숨겨준 것은 여리고의 관점으로 볼 때는 민족을 배신한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여리고가 오랜 기간 동안 얼마나 사악하였는지와 이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언약과 이에 대한 라합의 믿음을 총체적으로 따져볼때에는 의로운 거짓말로 평가될 수 있다. 2대 사사이자 오른손을 못쓰는 왼손잡이 에훗은 모압 왕 에글론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빙자하여 속이고 살해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에훗을 대행자로 삼으셔서 에글론을 처단하신 것이므로 정당화 된다. 사사 기드온이 나중에 가서야 참전한 에브라임의 시비와 도발에도 저들의 끝물 포도가 자기의 맏물 포도보다 탁월하다고 에브라임의 공로를 과장해서 추켜세운 것은 진심과 진실을 얘기함으로써 내부 분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약간의 거짓말로 사태를 누그러뜨리고 화평하는 것이 더욱 가치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사사 삼손은 자기 능력의 비밀을 들릴라에게 여러 차례 거짓말로 속였기 때문에 여호와의 영을 모실 수가 있었던 반면에 도리어 들릴라에게 정직하게 말하고 나서는 여호와의 영을 상실하고 말았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다윗에게 기름부으러 갈 때 사울을 속인 것은 이미 사울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로 전락한데다가 여호와께서 세우시기로 선택하신 통치자를 임명하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중에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자신이 급한 왕명을 받드는 중이라고 하였어도 여호와께 책망을 듣지 않았는데 이는 이미 사울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로 전락했고 다윗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기름부음을 오래 전에 받았으므로 그 언약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죽은 것은 다윗의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사울의 패역부도함 때문이었다. 반면에 사울의 딸 미갈이 남편 다윗을 도주시키면서 수색하러 온 사울에게 한 거짓말은 남편 다윗의 선한 성품을 깎아내리는 것이므로 비판받을만 하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왕의 만찬에 나오지 않은 다윗을 위해 변명했는데 이는 자기 아버지 사울이 이미 여호와를 배반한데다가 여호와께서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 한 것이므로 정당화할 수 있다. 자기가 거짓말로 죄를 짓는 것보다 다윗을 살리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압살롬이 반역한 후에 한 여인이 피난 중에 있는 다윗이 보낸 정탐꾼들을 우물에 숨겨주고 압살롬 군대에는 거짓말을 한 것이나 다윗의 친구이자 신하인 후새가 거짓으로 압살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거짓으로 아히도벨의 계략이 안좋다 하면서 자기 계획이 더 나은 것이라 하면서 압살롬을 속인 것 등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신 왕은 압살롬이 아니라 다윗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합의 신하 오바댜가 이세벨의 눈을 피해 여호와의 선지자 1백 명을 오십 명씩 동굴에 숨겨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한 것은 희대의 악녀 이세벨에게 정직을 행함으로써 당하는 해악보다 거짓을 행함으로써 얻는 신앙의 유익이 말할 수 없이 컸기 때문이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자기 아내와 더불어 왕자들이 황후에게 학살 당하는 중에 갓난 아기였던 막내 왕자 요아스를 7년 동안 황후의 눈을 피해 몰래 숨기고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황후를 처단한 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따라 왕가의 혈통을 유지하려는 거룩한 속임수와 거짓말이었다. 어린 예수님을 영접하러 온 동방의 수많은 박사들은 헤롯의 명을 아기고 그를 속이고 몰래 다른 길로 돌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헤롯에게 거짓없이 정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인의 후예 라멕은 자기의 두 아내에게 자기가 젊은 청년을 죽였다고 진실을 말하였으나 패역한 자기 자랑을 위한 진술이었으므로 결국 자기의 멸망의 심판을 초래했을 뿐이다. 노아의 아들 함은 아버지 노아가 술 취해서 벌거벗고 자고 있다는 것을 다른 두 형제에게 진실되게 고했으나 이는 노아를 조롱하기 위한 진술이었으므로 대대로 버림받는 저주를 받게 된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열 두 명 중 열 명은 아낙 자손의 장대함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보고 하였으나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파기하기 위한 진술이었으므로 여호와께 벌을 받아 죽었다. 사사 삼손은 창녀 들릴라에게 자기 능력의 근원과 비밀을 남김없이 실토했으나 이로 인해 성령을 떠나시게 하고 블레셋에 붙잡혀 치욕을 당하며 결국에는 블레셋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에돔 사람 도엑은 사울 왕에게 충성하고자 하여 다윗의 행로를 고해 바쳤으나 놉 땅에 거주하던 아히멜렉을 비롯한 85명의 여호와 하냐님의 거룩한 제사장들을 학살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앗수르 산헤립의 군대장관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객관적 잔력과 항복할 경우 그 대가를 후히 주겠다는 약속을 진실되게 하였으나 결국 하루만에 18만 5천의 자기네 군사가 처참하게 찢겨죽는 재앙과 군주 산헤립은 두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심판을 초래하였다. 다리오의 신하들은 다니엘이 국법을 어기고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한다는 것을 군주 다리오에게 정직하게 보고하였으나 결국 자기들 뿐만 아니라 아끼는 가족들까지 모두 사자굴에 던져져 찢겨 죽게 될 뿐이었다. 가룟유다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예수께서 계시던 곳을 거짓없이 정직하게 안내하였으나 결국 비참하게 자살하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도라면, 일본 순사에게 쫓기는 독립군의 행방을 정직하게 고해야 하는가 거짓을 고해야 하는가. 독재정권의 색출을 당하는 민주화 운동가들의 행방을 정직하게 알려야 하는가 허위로 알려야 하는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이미 모든 죄책의 대가를 치른 이웃의 해묵은 잘못과 연약함을 남들에게 정직하게 끄집어내어야 하는가 알고도 모른척해야 하는가. 대화 주제의 당사자가 없는 가운데서 당사자의 허물을 정직하게 드러내어야 하는가 조용히 있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 리더는 모든 구성원들이 있는데서 공개적으로 특정 구성원의 과실을 정직하게 드러내야 하는가 숨겨야 하는가. 거짓증언을 함으로써 내가 받을 죄책과 참된 증언을 함으로써 악인이 얻게 될 유익의 가치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경과 복음 앞에서 어떤 거짓말이 선이고 어떤 정직함이 악인지 지혜롭게 분별해야만 한다.
#20200304
#창세기 #Genesis 41장.
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47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한 두 해 정도 풍년이 오면 대부분 이게 웬 일이냐 하면서 감사하겠지만 그 풍년이 3, 4년 이상 계속 되면 이제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사람 심리다. 그래서 요셉이 풍년이 시작될 때 남아도는 곡식을 거두어 저장할 때는 만약을 대비해서 일 참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지만, 계속 풍년이 이어지는데도 그러는 것을 보고서는 아마도 요셉을 미련하다고 조롱하거나 험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을 것이다. 왕궁의 신하들은 처음에는 바로의 전폭적인 신임 때문에 찬성했었어도 7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동안 풍년이 이어지면서 과연 요셉의 해몽이 맞는지 의심하거나 심지어 요셉을 모함하는 자들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인해서 주변 다른 신하들로부터 어떠한 모함과 음모를 받았는지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성군이라 해도 '삼인성호'라는 속담이 있듯이, 주변에서 자꾸만 험담하게 되면 이를 진실로 받아들여 정직한 사람을 의심하게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쩌면 바로 조차도 혹시나 자기가 한순간의 기분으로 잘못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는지, 너무 요셉을 성급하게 믿어버린 것은 아니었는지에 대한 회의와 의심도 생겼을 수 있다. 때문에 요셉으로서는 왕궁 밖에서는 애굽 국민들의 조롱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왕궁 안에서는 자기에 대한 신하들의 비방과 모함을 대적하고 바로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일을 병행하면서 흉년을 대비한 곡식 저장 사업을 완수해야 했을 것이다. 비록 요셉이 바로의 임명을 받아 총리가 되어 일을 진행하더라도 그는 본래 애굽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틀리면 언제든 내던지고 도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가 애굽에 노예로 팔려 온 때로부터 총리가 되기까지 그 드라마틱한 삶의 과정들을 돌아봤을 때 여기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애굽에 보내신 뜻이라 확신하고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애굽에서의 흉년 대비 곡식 저장 사업을 진행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와 교회의 직분자들은 요셉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가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속적 유익에 대해서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선하신 뜻이라고 하다가도 그 일을 하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거나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게 되면 재빨리 태세를 전환하여 아직은 때가 아니고 자기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발뺌하기 일쑤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성경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설령 지금 당장 실현 될 기미가 보이지 않더라도 이를 가르쳐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직하게 순종하며 밀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우리의 믿음의 순종이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선한 수단인 것이다.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끝까지 거부한 요셉은 이제서야 정당하게 아내를 맞이하고 두 아들을 낳아 가정을 꾸린다. 그의 아내 아스낫은 애굽의 통치자 바로 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애굽의 신을 섬기는 제사장의 딸이었으므로 애굽의 최상층 영애였다. 그렇다고 요셉이 아스낫을 바라보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저버린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는 우리로 마치 우리의 순종과 선행이 반드시 이 땅에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오해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범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원래 우리의 당연한 본분인 것이고, 이에 우리가 무엇을 받건 안받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인 것이다.
요셉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아스낫과 결혼한 것을 두고 신자가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해도 된다는 근거로 삼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전인수 격인 자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 된 몇몇 이방인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인 인물들의 경우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하나님만의 주권적 섭리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신자는 신자들 중에서 배우자를 찾아야 하고 적어도 세례까지는 받게 한 다음에 배우자로 맞아야 한다.
흉년이 오기 전에, 즉 풍년의 때에 요셉이 두 아들을 얻은 것 또한 하나님의 형통과 복의 일환이다. 풍녕의 때에는 그저 전국에 곡식 창고를 짓고 곡식을 모아두는 일만 하면 되었으므로 아내와 아들들을 돌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흉년의 때에는 그 저장한 곡식들을 백성들과 주변 나라에 적절히 배분하여 팔아야 하므로 신경써야 할 일이 더욱 많아져서 제대로 가정을 돌볼 시간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53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54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55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7년의 풍년 기간 중에 애굽 백성들은 거둔 곡식의 2할을 요셉이 지정한대로 저장할 곡식으로 국가에 내어 놓았더라도 워낙에 거둔 것이 많아서 충분함을 넘어 차고 넘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왜 이렇게 큰 풍년이 이어지는지를 알지 못했을 것이므로 소비하지 못한 곡식들은 그냥 버리거나 했을 것이다. 즉, 백성들에게는 7년 동안 평생을 농사를 짓지 않고도 먹고 살만큼 풍부한 곡식들이 주어졌어도 이를 관리하지 못해서 결국 흉년이 시작되었을 때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근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요셉이 미련하리만큼 7년 동안 매년 2할의 곡식을 거두어 저장해 온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궁의 바로와 신하들도 딱 7년 풍년 뒤에 바로 극심한 흉년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요셉의 말이 참인 것을 인정했을 것이다. 더욱이 애굽 주변국들도 흉년의 시기에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요셉의 진가는 풍년 때가 아니라 도리어 흉년 때에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이방신 천지인 애굽에서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요셉처럼 평안할 때에는 남들이 뭐라하건간에 미련하리만치 우직하게 성경과 성령께 순종함으로써 선을 쌓아야 하고 고난과 역경과 환난의 때에는 지금까지 쌓은 선으로 베풀며 이웃을 구제하는데 힘써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이런 선을 쌓는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코로너19와 같이 국가적 비상 상황에서 아무런 덕을 끼치지 못하고 도움도 못주며 심지어 저주받을 신천지와 한묶음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절대로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스스로 자초한 죄의 결과인 것이다. 이런 국난의 때에 한국 교회가 하는 것이라고는 주일 예배를 모여서 드리냐 온라인으로 드리냐 하는, 비기독교 국민들로서는 안중에도 없는 것들만 논하는 수준이 너무나 부끄럽지 않은가.
신자건 아니건간에 통상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각자의 인생 중에 7년 풍년의 시기를 주시곤 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7년 풍년과 같은 황금기가 평생 이어질 것으로 생각해서 애굽 백성들처럼 비축해두지 않고 흥청망청 소진하는데 바쁘다. 그래서 건강한 자는 온갖 방탕하고 위험한 것으로 자기 건강의 끝을 보도록 소진하다가 7년 흉년과 같이 건강을 잃게 된다. 재물이 많은 자는 온갖 사치를 일삼다가 7년 흉년과 같은 빈곤함에 빠진다. 외모가 출중한 자는 외모만 믿고 온갖 인기를 누리고 거들먹 거리다가 7년 흉년과 같은 외모가 되어 초라해진다. 한편 교회에서도 남들보다 출중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도 그 은사를 주신 성령을 생각하지 않고 은사만을 자랑하다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호미로 막아야 할 문제를 방치하고 은폐하다가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사태를 맞이하기도 한다. 교회에 젊은이들이 7년 풍년처럼 넘쳐나서 아무렇게나 대우하다가 이제는 7년 흉년과 같이 희귀해져서 회복 불가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교회건 개인이건간에 우리에게 특별히 풍요롭게 무언가가 주어진다면 그것들이 사라질 때를 대비해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요셉의 지혜가 오늘날에도 절실하다. 그래야 어려운 때에 개인은 물론 교회와 국가까지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