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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 평등과 도덕성 바라보기
우리는 현재 국가(nation, state, country) 속에서 각 국가의 정치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정치체제 중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고 익숙한 체제가 민주주의 체제일 것이다. 우리는 시민에 의해 참여하는 형태인 통치(self-governing)와 함께 권리를 보장받는 권리 체계 안에서 우리의 자유와 다양한 이익을 보장받고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정치체제는 이러한 민주주의 체제일 것이다. 민주주의 형태는 다양한데 헌법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형태들은 의원내각제, 대통령제, 이원집정부제 등이 있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도 ‘한국식’ 대통령제 등 각 나라의 상황에 맞는 정치체제가 존재한다. 어찌 되었든 이들 체제의 공통점은 대의제 정부로서 시민들에게 정치적 평등이 보장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에서의 가장 기본 전제는 이 정치적 평등(Political equal)이다. 정치적 평등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국가와의 비교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북한에서는 2012년 ‘김일성-김정일주의(-ism)’를 당의 지도적 지침으로 채택하여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북한 헌법 개정을 통해서도 명문화 되어있는데 기존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계속된 수정작업과 소위 ‘백두혈통’을 내세운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은 대의제를 통한 시민 참여를 통해 스스로 통치할 수 없다. 정치적 평등을 상실한 셈이다.
정치적 평등을 확장하여 우리는 인간 평등이라는 개념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 고대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시기의 소도시들에서의 경우를 살펴보면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모두에게 정치적 평등이 보장되었다. (물론 이 정치적 평등은 자유민 남성, 귀족, 대지주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누구라도 정치에 참여하여 통치할 능력이 있다는 인간 능력의 신뢰가 기본적으로 깔려있었다. 이 인간 능력의 신뢰는 인간 평등(Human equality) 개념을 통하여 더욱 확장된다. 인간 평등은 도덕적 판단에 기초한 결과이다. 사실상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모두가 다 평등하게 태어났는가를 물었을 때 우리는 정말로 평등하게 태어나지는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신체적 결함, 능력은 출생 이후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더욱 복잡해진다. 평등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데 왜 우리는 인간 평등을 받아들여야만 할까? 이는 단순히 경험적 판단, 사실적 추론으로 해결되는 답이 아니다. 우리는 가치 판단, 즉 도덕적 판단을 통하여 인간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그 천부인권을 지닌 존재임을 마땅히 그렇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도덕적 판단으로 우리가 얻는 이익들이 많지만 여기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도덕적 판단이 나온 배경은 결국 우리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고, 그 도덕성을 계속해서 확장하고 계발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당한 인간 능력에 대한 신뢰와 긍정이 담겨 있다. 마땅히 인간이라면 이런 가치를 발전시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바라본다면 과거보다 지금 우리는 더욱 삶의 질이 향상되었고, 사회가 발전하였는데 도덕성 또한 더욱 계발 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를 이전보다 더 나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도덕적으로 더 많이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나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도덕성은 퇴보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인간이라면 ‘도덕적으로 마땅히 어떠해야한다’라는 도덕성을 학교에서의 기초교육을 통해 충분히 교육 받아온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바라볼 때 도덕적 가치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그렇기에 지지받아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그 가치의 상실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덕적 가치는 지지되고 유지되지 않으면 그 중요성이 하락한다. 이것이 결국 도덕성의 퇴보로 이어질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제작된 프로그램들에서 그 예를 찾아보자. 넷플릭스 <더 인플루언서>, <흑백요리사>, TV 드라마인 <눈물의 여왕> 등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계급’이다. 드라마에서는 언제부터인지 항상 ‘재벌’이 등장한다. 재벌 남자주인공에 의한 여자주인공의 구원 서사시, 재벌들의 삶과 후계자 경쟁 구도 같은 뻔한 레퍼토리가 계속해서 재구성되고 나오고 있다. 경제적 차이로 인한 계급을 드라마에서 은연중에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흑백요리사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그 제목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해외에서는 black and white로 변경할 수 없는(이때는 인종차별로 받아들여진다) 제목은 영어로 <Culinary Class Wars>로 번역된다. 물론 경력과 실력 차이로 Class(계급)으로 표현을 한 것 같지만 이게 한국 사회의 양극화되어 가는 현실을 아예 반영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없다. 특히 <더 인플루언서>를 보면 관심과 그에 따른 돈으로 결정되는 그 계급적 차이가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인플루언서들 간의 퀄리티 높은 콘텐츠 경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모객할까를 고민한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인플루언서들이 선택하는 것은 ‘자극성’이다. 이때 소수의 몇몇 인플루언서를 제외하고서는 양질의 콘텐츠는 이미 그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더 노출할 것인지, 어떻게 사람들이 흥미를 이끄는 말(대부분 거짓 뉴스, 누군가를 비하하는 말)을 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인플루언서들 간에 협력하고 토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자극성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면 저급하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이다. 이들은 대중에게 본인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다.
어떤 국가의 현재 사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대중이 많이 찾는 방송 프로그램이다. 위의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면 과도한 경쟁, 그리고 양극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경쟁과 양극화의 과정에서 자극성만을 추구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 가치는 그 중요성을 점점 잃어버리는 듯하다. 페미니즘을 대하는 태도와 그걸 이용한 젠더갈등의 상황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 말이다. 젠더갈등이라는 이름 아래에 여성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책임 전가는 페미니즘의 본질을 퇴색시켜 버린다. 이는 정치판에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마땅히 어떠해야한다라는 기준들은 잊은 채 철 지난 반공 이데올로기를 사용하여 선동한다. 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 사회를 쥐고 있는지 몇일 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소년이 온다』와『작별하지 않는다』가 사상적 편향성을 가진 작품이기에 “노벨상은 좌파들만 받는다. 한강 작가는 좌파다.”라며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까지 나온다. 기본적인 윤리적 가치에 기초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부분이 한국 사회에서 많이 보여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도덕적 퇴보 상황 속에서 인간 도덕성이 계발되고 발전되어 나갈 것이라는 긍정성을 가질 수 있는가?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긍정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또한 퇴보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춘추전국 시대, 도덕성 퇴보의 상황을 지켜본 맹자와 같은 유학자들이 사단과 같은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긍정성에 주목한 것이다. 이는 다른 의견을 주장했던 순자도, 묵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독재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사실 독재 같기도 하지만) 최소한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정치적 평등성과 인간 평등을 전제로 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평등성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민주주의의 기본전제이다. 이 평등성 안에서 인간의 도덕적 속성들 예를 들면 정직, 용기, 사랑과 같은 것들이 확장될 수 있다.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On Democracy』에서 이렇게 말한다. “At birth, most human beings possess the potentiality for developing these qualities. (...) A democratic government is not enough to insure that people develop these qualities, but it is essential.” 로버트 달은 인간이 도덕적 존재로 갈 수 있다는 인간 능력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민주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설명한다. 물론 현재 대의제 민주주의가 결함을 안고 있지만 그 결함 또한 우리가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과제이다. 도덕적 책임감을 가진 인간은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현대 미국의 정치학자만이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역사에서 인간 심성의 문제에 대해 논의했던 유학자들 또한 오래전부터 인간에 집중해오고 인간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도덕적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우주론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이치를 탐구하여 인간이 어떠한 존재라는 것을 ‘성즉리’로 표현하고 조선에 와서는 성리학적 논쟁을 통해 더욱 인간 존재의 가치에 대한 규명을 명확히 하려 시도한다. 이 시도는 이전의 공맹 유학보다 더 발전된 형태로서 인간의 도덕성과 가치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경험적판단(empirical judgment) 혹은 사실적판단(factual judgment)이 아니라 가치판단(value judgment) 혹은 도덕적판단(moral judgment)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심성론과 수양론을 통해 각각 인간의 심성과 도덕적 실천 방법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 이기론의 해석 차이에서 주리론과 주기론을 들며 인간 심성을 설명한다. 이기론(우주론, 존재론)에서 성즉리(인성론)으로, 이후 거경궁리, 존천리거인욕(수양론)에서 예(예법)으로 마지막으로 이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정책으로 이어져 나간다. 조선의 성리학은 관념적, 형이상학적 철학을 넘어서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모든 영역을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사상 체계이다.
올바른 도덕 판단을 할 수 있는 사상적 체계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사상적 체계 그 속에서 살아가고 이것의 틀 즉, 프레임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이 사상적 체계는 정치체제에 그대로 반영이 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때로는 잘못된 판단도 하고 비윤리적인 체제를 옹호하기도 한다. 이것이 ‘무조건적으로 옳다, 반대는 무조건적으로 잘못되었다’라는 싸움은 마르크스가 허위의식이라고 부른 그 이데올로기라는 프레임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바라볼 때 그 싸움의 본질을 알아차릴 수 있다. 공산당은 도덕적 해악을 끼치는 악한 존재임을 외치며 무조건 반공을 외침이 타당한가? 이렇게 외치는 자들은 반공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가치, 도덕 판단을 내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힘들다고 시위했다고 죽이는 건 옳지 않다. 윗사람들 정치 잘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조금 과격하게 행동했다고 해서 죽이는 건 옳지 않다. 정치적 평등과 인간 평등성에 기초한 아주 기본적인 요구를 했다고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나와 사상이 다르다고 죽이는 건 옳지 않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이는 이런 기본적 전제하에 5.18과 4.3을 생각할 때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글을 썼다고 사상적 편향을 가졌다고 하는 말하는 것은 기본적인 전제조차 하지 못하는 도덕판단을 결여한 생각이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말하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젠더갈등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상하게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말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 속에서 혹시 우리의 윤리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없는지, 제대로 된 도덕 판단하에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도덕성을 현재 긍정하고 있고 실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수업시간에 '민중은 개돼지' 와 관련된 말이 나와서 생각할 지점이 많다 생각했습니다. 민중을 개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류층의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영화에서도 그런 지점에서 활용되어 대사로서 쓰이기도하고 실제로 예전에 어떤 교육감 후보가 사용한 말이기도 합니다. 개돼지로 본다는 건 너와 나, 나아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바라보지 않고 우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모두가 똑같이 평등하게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단순히 경험적 측면에서, 사실이 이러하니까 라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좀 더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도덕과 윤리라는 것이 있는데 이 측면이 있어야지만 흔히 말하는 이성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정치학적으로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최대한 가능성 있는 체제인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고 이를 채택한 것인데 물론 누군가 개돼지라고 할 만큼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개돼지로 칭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가치에 집중 했기 때문에 성리학에서도 이에 대해서 계속해서 설명한 것이구요. 사실 아직 수업 진도가 많이 나간 상태가 아니라 제가 성리학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글을 쓰다보니 한국 철학과 관련해서는 조금밖에 쓰지 않아 균형적이지는 않지만 앞으로 수업에서 계속 공부해나가겠습니다). 정치외교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권력의 이동에 대해 공부하게 되는데 이때 중심을 잡아주는게 철학 사상의 역할입니다. 철학이 없으면 권력에만 집중하여 편향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다시금 사상과 그 의미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 참고자료
인터넷 기사
1. 경향신문, 허위매물로서의 <더 인플루언서> '노잼' 콘텐츠가 화제성만으로 살아남을 때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408220600001
2. “한강 노벨상 맞춰 5·18 폄훼하는 보수우익, 영원히 고립 자초”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62221.html
3. “노벨상은 좌파들만 받는다. 한강 작가는 좌파다.”
https://www.baro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996
저서
Robert A. Dahl, 『On Democracy』 second edition 2020, 35-80, Yale University
첫댓글 "현재 우리 사회를 이전보다 더 나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도덕적으로 더 많이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나는 아니라고 답한다."에서 서글픈 생각이 들었네요. "리의 윤리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없는지, 제대로 된 도덕 판단하에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도덕성을 현재 긍정하고 있고 실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라는 점에 무게를 싣기 위한 전제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렇게 생각하게 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든 서글픔이예요. 그런데 미국 정치학자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좌절할 필요는 없을 듯해요. 역설적으로 말하면, 비슈느가 그러했듯이 "세상이 악할수록, 그래서 나를 필요로 할수록, 나는 세세대대 그 필요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도전정신을 발휘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서글프게 생각하는 이 현실은 우리의 실천장입니다. 유가에서 그 초입인 춘추전국의 상황에서도 인간 존재의 선성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분명히 우리는 전진하고 있고, 그래서 도전에 직면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을 실현할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