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듕귁(중국, 中國)이라는 단어는 나라이름이 아니다.
맹자(孟子)의 진양북학우중국(陳良北學于中國) 혹은 목천자전(穆天子傳)의 수우중국(樹于中國)은 '임금이 있는 가운데 장소', 시경(詩經)의 혜차중국(惠此中國)은 '나라의 중앙(수도)을 가르키는 말',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제왕소도위중(帝王所都爲中) 고왈중국(故曰中國) '제왕이 계시는 도읍 가운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중국(中國) 경사야(京師也) '중국은 경도(京都), 수도(首都)', 요(遼), 북송(北宋), 금(金), 남송(南宋), 청(淸)도 자신의 나라는 '제왕이 계시는 중심의 나라', '제왕이 있는 곳을 지칭하여 중국'이라고 하였으며, 스스로 자신의 국명을 사용할 때에는 대당(大唐), 대명(大明), 대청(大淸)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므로 단 한번도 국명, 나라이름으로 사용된 적은 없는 것이다.
하여, 근대 중국인들은,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를 다른 나라에서 국명으로 사용치 못하도록 신해혁명(1911-1912) 후 1925년 7월 1일 쑨원(孫文, 손문)이 중화민국(中華民國, 약칭 중국)을 건국하면서 나라 이름으로서 처음 사용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에 의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다시 건국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중국(中國)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과거에 사용되던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는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인 중국(中國)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것이다. '듕귁(中國)은 황졩(皇帝) 겨신 나라히니(훈민정음해례본, 언해본(諺解本))', 華夏: 듕국을 닐온 말이라.(화하, 선조판 소학언해), 등에서도 보듯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는 과거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과거 그 어느때도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특정 나라를 지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세종대왕이 나라를 지칭하였다고 하였다면, 반드시 '나랏말싸미 명국(明國)과 또는 대명(大明)에 달아'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다.
또한 1925년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에 사용되던 중국은 현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듕귁(中國)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인 중국(中國)으로 혼돈하면 안되는 것이다.
'듕귁(中國)은 황졩(皇帝) 겨신 나라히니 우리나라 썅땀(常談)에 강남(江南)이라 하나니라.' 이를 다시 해석해보면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문자의 중심지인 한자문화의 중심지는 즉, 듕귁(中國)은 황제가 계시는 곳이며, 흔히 하는 말로 강남이라 한다.'
함으로써 '조선의 말소리는 한자문화의 중심지인 강남(中國, 듕귁)과는 달아 한자로 적으면 소통이 되지 아니하므로 새로이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
특히 해석을 할 때 '조선의 말소리는 한자문화의 중심지인 강남(中國, 듕귁)과는 달아 서로 소통이 되지 아니하므로 새로이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라고 해석이 될 수 있지만, 조선 백성이 당시 명나라 황제, 송나라 사람 또는 명나라 언어, 송나라 말소리가 소통이 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이를 대륙에 있었던 한자문화의 중심지인 강남(中國, 듕귁)으로 해석하면 그 뜻이 성립될 수 없는 문장이 된다. "어리석은 백성이 송나라 황제가 쓴 글을 읽지 못하여, 명나라 사람과 말소리가 소통되지 아니하여 내 이를 어엿비너겨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라고 이해를 해야할까? 아니면 훈민정음으로 서로 소통이 가능했을까?
함으로써 현대의 해석에서는 우리 조선도 '내가(세종대왕) 있는 이 곳이 듕귁(中國)이며, 도읍지 한양이 강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세종대왕도 대륙 한자문화의 중심지 사람들이 나라의 중심, 도읍을 듕귁(中國)이라 함을 배워 자신도 자신의 나라 중심을 듕귁(中國)으로 표현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내가 있는 이 곳 듕귁(中國)에서 내가 쓰는 글과 백성들이 사용하는 글자(이두문자,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의 표기, 경주의 남산신성비(591년), 6세기경 서동요, 혜성가, 설총이 신문왕(681∼691) 때 집대성, 하급관리의 행정문서, 민간에서 사용)가 서로 달라 새로이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로 해석해야 한다.
세종대왕이 살던 곳, 한양, 궁궐에는 왕족과 문인들이 한자를, 일반 중인(상민)들은 이두문자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왕과 문인은 "國之語音이 異乎中國"라 쓰고 "국지어음 이호중국"이라 읽어도 그 뜻을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알 수 있었으나, 백성은 알 수 없으므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쓰고 읽으면 백성 또한 이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즉, 한자는 "語音"이라 쓰고, "어음"이라 읽으면서 "말씀"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고, 말소리는 "말씀"이라고 해야 했지만, 한자를 배우지 못한 중인, 백성들은 글자 "語音"의 뜻을 알 수 없었으리라. 함으로써 말소리 소통의 어려움이 참으로 문제였을 것이 자명하므로, 세종대왕이 고민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후에 왕이 "語音"이라 교지를 내리면, "말씀"이라 표기하여 방을 붙였다고 이해되고 있으며, 글자(말씀)와 뜻(말씀), 말소리(말씀)를 동일하게 하여 왕과 백성간, 듕귁(中國)과 백성들이 사는 지역간 소통의 어려움을 해결하였다고 이해된다.
결론적으로 현재 대한민국에는 왕도 왕족도, 양반도 없으므로 반드시 한자를 사용해야 하는 분야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리석은 백성이라 할 수 있으므로 세종대왕의 뜻에 따라 말소리와 다른 한자가 아닌 같은 한글을 쓰고, 또 그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된다.
<역사적 사료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훈민정음에서 밝힌 중국(中國)이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인 중국(中國) 또는 그 이전의 특정 국가를 지칭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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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과 중국 234쪽~241쪽
훈민정음 속의 而乎中國을 國之語音과 연계하여 보면 나라의 어음이 중국과 다르다고 한 것은 나라안의 술맣은 고을들의 相互語音이 중원의 왕조어음과도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옳은 것이다. 중국을 지금의 대륙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을 한반도에 둔다면 조선 초기 대륙 땅에는 온통 명나라밖에는 아무 다른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조선이 명을 대국으로 섬겼다는 당시에 而乎明國 이라고 할 것이지 국호도 아닌 중국을 사용했다는 말인가! 당시의 중국은 조선의 중심지이며, 황제(세종)가 계신 땅을 말하는 것이다.
나라 사람들의 말소리가 중국말과 달라서 문자와 더불어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불평하여 걱정하였고 뜻을 전하고자 해도 끝내는 뜻을 펴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내 이를 딸하게 여겨 새로 28글자를 만드는 것이니 문자를 습득하는데 있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國之語音而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훈민정음은 위와 같은 머리말로 시작되고 있다. 이 문장의 맨앞줄에 나오는 국지어음이호중국國之語音異乎中國을 놓고 어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간에 각기 의견이 달라, 모이면 다툼질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지금 쓰고 있는 한글이란 것은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가 연구,정리한 것을 1949년 이 단체가 한글학회로 바뀌면서 훈민정음의 가치를 높여 현대어에 맞도록 바꾼 말일 뿐이며, 正音(발음부호)의 뜻을 왜곡시키려는 행태에서 나온 것이다. 28글자를 정리해 낸 세종 때의 훈민정음은 글자의 자형에 있어서는 정인지(1396~1478)가 발문(해례문)에서 글자의 모양은 옛날 전자의 모양을 본떴고 소리를 따랐으나 자음은 일곱 가락에 어울리게 했다.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고 밝힌 것이나, 『세종실록』에 언문은 옛날 글자로서 새 글자는 아니다(諺文皆 本文字非新字也)
라고 쓰인 것만 보더라도 글자 자체를 창안한 것이 아니고 훈민정음 이전에도 이와 같은 부류의 글자는 있었다는 말이 된다.
세종은 태조 이성계로부터 40년쯤 지난 뒤의 군주였으므로 당시의 집현전 사람들 중에는 고려 말 조정으로부터 커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란 추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고려는 주변국, 이를테면 明나라와 琉球.倭.吳越은 물론 北宋과 南宋.東晉.哈丹을 비롯해 멀리는 大食國.蒙古.女眞.거란까지, 그리고 더 멀리는 서역(실크로드)의 여러 나라들과 상업과 문화(학문)의 교류가 빈번하면서도 문자와 언어가 다른 탓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는데, 굳이 조선 백성이 중국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아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일 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중국 사람과 말이 꼭 통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조선왕조 안에는 중국인이 함께 살았다거나, 조선이 대륙에 있으면서 중국인이 함께 살았다거나 둘중 한 가지 설정은 반드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세종 당시에 중국이란 왕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중국이란 무엇인지 그 개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이란 나라이름이 아니라 큰 고을 중앙이란 듯을 가진 中州.中原.의 대명사로서, 군주가 있어서 각 고을의 군을 다스리는 일종의 고을 집합체이다. 군주가 다스리는지역을 묶어 큰 울타리(口)를 치고 외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창고 방패로 막아 주기도 한다. 그것이 나라 國자가 만들어지는 유래가 되기도 하거니와 현대와 같은 국가의 개념과는 상당히 차이가 많다.
현대의 국가란 영토와 국민과 이들에 의한 주권 등 세 가지가 충족되면 만들어 된다. 일정한 영토에 정주하는 다수인과 그들을 통치하는 통치조직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본래 국가라는 말의 어원은 stato에서 유럽에서는 도시국가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국가(Nation)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면서 15세기 이후 비로소 도시국가의 개념을 벗어나게 되었다. 도시국가 즉 stato에서 생각해 볼 때 국가라는 말은 대체로 동일민족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하기 시작한 근세국가의 명칭으로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역사적으로 분류하면 고대 춘추시대 전후에는 노예제도로 국가형태가 마련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 시대에 오면서는 농노제에 의한 봉건국가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고,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자본주의로 형성된 국가, 그 후 20세기에 들어와 나타난 사회주의 국가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이성계가 중원을 차지해 중앙조직을 갖추고 팔방(八域,八道)의 영역을 관할지에 두자 중원을 비롯한 각 부의 고을이 안정되면서 규모도 확대일로로 발전하게 되고 각 고을 집단 취락지의 인구도 팽창하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은 자연히 중앙정부 조직과 하부조직간에 균열도 생기게 마련이고 마찰을 빚게 되기도 한다. 또 중앙과 고을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민심의 소외감도 생기게 되고, 이웃 고을과도 생조에 관련된 이해가 엇갈려 반목과 증오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중앙정부에서 각 고을에 두었던 村長이니 部長이니 君이니 하는 제도는 모두 이때(조선조) 생겨난 것이며,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會盟制度라는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지방의 토호들이 세력을 키워 새로운 조정집단을 형성하게 되는데, 전국시대 때 영웅호걸의 출현은 군주제가 무너졌을 때 나온 것이다. 이 점을 우려한 중앙정부는 중앙정부와 회맹, 회맹과 부를 엮어 일사불란한 조직연결망을 가질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때 문자는 조직을 묶는데 상당한 역할을 담당한다. 즉 중앙정부→회맹→부 →촌, 거꾸로 촌→부 → 회맹 → 정부로 이어지는 의사전달의 매개체는 대개가 문자로 쓰인 문서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난 문제점이 문자의 해독에 관한 것이었다. 땅이 넓고 수많은 족속 집단으로 형성된 지방의 각 고을들이 제각기 문자를 표현하는 발음이 달라 일상 언어활동은 물론 공식문서에서도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던 것이다.
중앙정부로서는 당연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집현전에 학자들을 모아놓고 문자(한자)의 음을 누구나, 어느 지방에서나 공통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한 끝에 28글자를 만들어 모든 고을에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사안의 전말을 이해하면 훈민정은은 다음과 같은 말로서 이해할 수가 있다. 나라 안 각 고을마다 말하는 사투리가 심하여 백성들의 말소리는 서로 다르고 임금이 있는 조정의 말과도 통하지 않았다. 문자는 같은데도 문자를 나타내는 소리가 이곳저곳마다 달라 나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말로는 통하지 않아 뜻 있는 사람들의 걱정이 많았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나라에서는 문자에 소리를 내는 부호를 새로이 정했다. 누구든 문자를 배우려거나 문자를 가지고 말을 하려거든 28자로 된 음법을 이용하면 쉽게 될 수 있을 것이니 먼 지방 사람들과도 같은 소리로 통하게 되므로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풀어 보면 훈민정음이란 문자는 문자대로 똑 같은 부호로써 쓰이게 되니 이는 바른소리(正音)요, 이것을 모든 백성에게 가르치자(訓民)는 뜻이 있다.
각 고을을 합쳐 중앙정부를 이루고 있었던 근세의 조선은 중앙에 있는 왕국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中原의 왕국.中州의 왕국.中朝의 왕국이라 할 수 있고, 또 다른 말로 이해를 돕자면 각 고을이 小華가 되고 소화가 뭉쳐져 中華가 되는 것이다. 즉 조선은 유학사상에 뿌리를 두고 소화가 모여 중화를 이룬 나라이므로 중화의 나라 중국이며, 중원.중주.중조의 나라 중국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소화는 조선이요, 중화는 중국이라는 말은 일제가 한반도에 조선을 꾸미면서 만들어낸 용어일 뿐 중화는 조선의 유토피아적 중용사상이었다. 『禮記』에 있는 조선(中國)은 1천7백여 개의 나라가 모여 있다는 말이 이를 증명하는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종 때의 훈민정음은 최만리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로부터 저항을 받아 한때는 빛을 잃어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으나 실학의 實事求是기 보급되면서 훈민정음은 지배계급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에게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어찌 되었거나 훈민정음 속의 이호중국而乎中國을 국지어음國之語音과 연계하여 보면 나라의 어음이 중국과 다르다고 한 것은 나라 안의 수많은 고을들의 상호어음相互語音이 중원의 왕조어음과도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옳은 것이다. 중국을 지금의 대륙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을 한반도에 둔다면 조선 초기 대륙땅에는 온통 명나라 밖에는 아무 다른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조선이 명을 대국으로 섬겼다는 당시에 이호명국而乎明國이라고 할 것이지 국호도 아닌 중국을 사용했다는 말인가! 당시의 중국은 조선이며, 이 조선은 또 중원의 나라.중화의 나라인 중국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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