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는 것은
“제주도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올레길이나, 예쁜 카페 등 한철 지난 것들 말고 말야.”
둘째 주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야기했던 내용이다. 제주만의 새로운 특산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예전 생각이 났다..
2021년 12월, 한창 방황하던 당시..제주도에 혼자 내려왔다.
그것도 여행을 계획한 바로 그날, 만 구천 원짜리 저녁 비행기를 예약해서, 45리터짜리 가방에 양말과 속옷, 기능성 티셔츠 몇 장을 넣고. 오직 올레길을 걷기 위해서만.
인간은 수많은 걱정과 선택, 쾌락과 행복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고 했다.
그 당시 스무 살의 나는 성인이 된 순간을 즐겼던 또래 친구들과 다르게 오직 걱정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었다.
타고난 것인지, 조급했던 사회적 문화 덕분인지, 수능을 끝마쳤던 나는 뇌를 어디론가 풀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올레길을 걸으러 왔다. 올레길이 뭔지도 몰랐다. 그냥 우선 스스로 뭔가를 해보고 싶고, 투자 대비 성취감을 느껴보고 싶었고,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르는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렇게 걸었다. 정확히 한 달을 걸었고 서른 개의 서로 다른 숙소에서 묵으면서, 그렇게 제주도 한 바퀴를 걸었다.
결과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단순 걷기에서만 나는 위로를 얻었다.
자연과 콕 붙어, 사이를 지나가며 느낀 숲마다 모두 다르던 나무 냄새, 풀 내음, 바닷가의 시원한 파도 소리.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내가 배낭을 메고 처음 혼자 떠나본 올레길이라는 도피처는 나에게 은은하지만, 강한 영향을 주었다.
한철 지난 올레길.. 동의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걷기의 위대함을 모른다.
인생은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과 말에 따라 미래가 실시간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걷기는, 올레길은 목표가 명확하다. 하루 30킬로 미터씩 설정된 목표를 향해 걷는 훈련을 하다 보면,
앞으로 걸어갈 앞이 보이지 않는 인생에 대한 기출문제를 풀어보는 것과 같다.
걷는 그 순간만큼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잃는다.
다음 주 가야 하는 학교, 제출할 숙제, 남들과의 비교, 뭔지 모를 먹먹했던 감정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걷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
사랑을 ‘잘’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잘’ 주는 방법을 알고 있듯,
많은 걱정과 근심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 걸어봤던 누군가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우선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걸어보자, 수많은 경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한철 지난 올레길이라고까지 말했던가요? 그렇다면 말이 과했군요. 올레길이 조성될 당시부터 많이 비판했던 터라 그렇게 말했던가 보네요. 비판의 요점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구현해지 못한채,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아류, 그리고 상업화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올레라는 말은 "집으로 가는 골목길"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레가 조성될 당시 제주 열풍이 불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에 지친 사람들이 미개발된 제주 곳곳에 난 길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다는 컨셉이었지요. 그런데 그 결과는 그냥 "길"만 남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순례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지점에 놓인 사람들이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사유의 기회와 성취감을 얻고 제각각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 것이지요. 그런데 제주의 길에는 그런 위로의 메시지가 온전하게 구현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길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올레가 아니더라도 매일 걷고 있습니다. "걷는다"는 행위를 비롯해서 그것의 가치를 느끼는 것도 결국은 우리들 각자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