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시상식의 노른자위 석권
2015년 아카데미 영화제 시상식에서 멕시코 출신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버드맨》은 시상식의 노른자위를 모두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영화는 영화의 주요 요소인 촬영상, 각본상, 감독상에 이어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까지 거머쥐어 명실공히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배우 숀펜이 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카드를 들여다보며 “어느 놈이 이 개자식에게 ‘그린카드’를 준 거야.”라고 조크를 던지며 멕시코 출신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를 감독상 수상자로 지명하자 우레와 같은 축하의 박수가 쏟아졌다. 사회자가 이 영화에서 ‘리건 톰슨’ 역을 맡은 마이클 키튼처럼 팬티만을 걸친 채 무대 위로 등장한 해프닝은 어쩌면 이 영화의 작품상 수상을 은유적으로 예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각본과 촬영, 그리고 감독의 역할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영화의 텍스트가 되는 각본, 영상을 통해 상징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촬영,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을 독창적인 세계관과 상상력으로 조합하여 하나의 유기체적인 예술품으로 이록하는 감독의 장인적 기능 또한 중요하다. 이 영화는 이처럼 영화 구성요소의 노른자위인 여러 부문에서 수상을 한 만큼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은 따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멕시코 감독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그래비티》에서 우주 공간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잡아내어 촬영상의 영예를 안은 촬영감독이 같은 분야에서, 그것도 다른 검독과 공간적 특성이 전혀 다른 배경의 영화로 연거푸 수상의 영예를 안은 것은 이변 중의 이변이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대표적인 작품을 들면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밖엔 되지 않는다. 2000년 데뷔작인《아모레스 페로스》는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 대상과 영국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 발표된《21그램》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 공식 경쟁작으로 배우들이 많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6년에 발표한《바벨》은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여 영화적 저력을 인정받았다. 2010년에 발표한《비우티플》은 칸 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에서 열연한 주연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데뷔작 이후의 세 작품은 ‘죽음 3부작’ 또는 ‘비극 3부작’으로 엮어지기도 한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멕시코의 알폰소 쿠아론, 기예르모 델 토로와 함께 ‘멕시코 쓰리 아미고(세 친구)’로 불리며, 멕시코 영화의 새로운 기수로 거론되어 오고 있다.
브로드웨이의 동맥으로 인정받다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이렇다 할 만 한 아기자기한 구조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과거의 영예를 뒤로 한 채 이제는 한 물 간 영화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분)의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의 분투기가 서사의 전부이다. 미니멀리즘으로 미국 중산층의 불안감을 그린 소설가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을 각색하고 연출, 배우까지 맡은 리건 톰슨의 연극적 일상을 뒤쫓는데 거의 대부분의 서사를 할애하고 있다.
리건 톰슨의 비루한 일상은 그의 정신적 풍경을 여실하게 은유하고 있다. 그는 과거 영화판에서《버드맨》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잊혀진 퇴역 배우로 어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내와는 이혼한 채 현재는 딸인 ‘샘’(엠마 왓슨 분)이 그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딸 역시 현재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한때는 약물 의존증이 심해 치료 감호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역으로 이 작품에 참여한 남자배우 ‘마이크’가 사사건건 그와 부딪치며 부아를 치밀게 하여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다. 마이크는 연극 비평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그를 소개한 여배우와 잦은 마찰을 빚고, 리건 톰슨의 연출 영역까지 침범하여 그의 자존심과 연극적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다.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를 좌지우지하는 연극 비평가도 리건 톰슨의 연극무대 진출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공연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그의 작품을 난도질하여 막을 내리게 하겠다고 무소불위의 비평적 권력까지 휘두르며 그의 연극적 열정과 오기를 짓밟기까지 한다. 그는 프리뷰 공연 마지막 날에 한바탕 해프닝에 휩싸이게 된다.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채 무대 옆문을 열고 나와 담배를 피우는 사이에 그만 문에 입고 있던 옷자락 문틈에 끼인 채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는 팬티 바람으로 늘어선 행인들을 헤치며 극장을 향해 허겁지겁 내닫는다, 행인들은 그를 한 물 간 배우라고 조소하고 야유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의 아내의 불륜의 현장에서 그는 실탄이 들어있는 권총으로 자신을 쓰러뜨리고 만다.
그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딸이 꽃송이를 들고 찾아온다. 제작자는 신문의 연극평을 내보이며 그를 칭찬한다. 그의 연극을 초죽음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연극 비평가가 그의 실감나는 연기를 ‘과거의 배우들이 잃어 버렸던 브로드웨이에 새로운 동맥으로 등장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딸이 꽃을 담을 꽃병을 가지고 병실로 들어오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딸이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희미한 만족의 웃음을 짓는 가운데 이 영화는 끝난다. 관객들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고 있을 리건 톰슨을 응원하며 극장 문을 나선다.
유연한 장면전환의 템포를 살린 현란한 카메라 워크
이 영화는 독창적인 몇 가지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물 흐르듯 유연한 카메라 워크가 먼저 눈에 띈다. 여타 영화는 쇼트와 쇼트의 연결로 하나의 씬을 만들고, 씬이 일관된 의미 맥락을 이루어 시퀀스를 만든다. 그래서 쇼트와 쇼트로 연결되기 때문에 의미 맥락의 단절과 감정이입이 차단되기 쉽다. 그런데 이 영화는 고정된 카메라 각도와 동선으로 등장인물의 뒤를 따른다. 인물들은 대개 분장실에서 좁은 복도를 따라 무대로 연결되고, 또한 무대에서 미로와 같은 복도를 돌고 돌아 분장실에 이르기도 한다. 또한 환한 불이 켜진 밤에 빌딩 상충부의 불이 꺼지고 카메라가 아래로 이동하면서 낮이 밝아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씬이 쇼트의 단절이 없이 하나의 ‘롱 테이크’를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치고 뒤로 빠지고, 또는 뒤로 빠졌다가 다시 앞으로 치고 들어가며 물 흐르듯 하는 유연한 카메라 워크는 바로 인물의 감정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의 감정의 강도에 따라 카메라의 속도와 흔들림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등장인물들과 함께 극장의 이곳저곳을 아무 거리낌 없이 걸어다니는 심리적 효과에 빠져드는 감정이입에 쉽게 젖는다.
이 영화의 음악 또한 독창적이고 독특하다. 단조로운 드럼 소리에 의해 인물의 감정의 강약과 고저, 그리고 장단과 이완을 표현하고 있다. 인물의 감정이 분노로 격해져 있을 때는 드럼 소리도 그에 따라 격렬하게 고조되고, 인물의 감정이 급박할수록 드럼 소리 역시 격하게 빨라지며 잦아든다. 단조로운 드럼 소리 하나만으로도 장면의 분위기와 인물의 심리적 풍경까지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리건 톰슨의 감정 표현 역시 독창적인 상징성으로 대체된다.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분장실의 물건들이 자리 이동을 하고, 그의 격렬한 감정이 폭발하면 분장실 거울을 밝히는 전구가 터지기도 한다. 다른 목소리 톤으로 속삭이듯, 또는 빈정거리듯 들려오는 그의 내면적 독백 또한 특이하다. 그 목소리는 그의 내면의 또 다른 자아가 되기도 하고, 아니면 그의 현재 모습을 조롱하는 군중의 조소와 야유가 되기도 한다. 리건 톰슨은 가끔 마술적 트릭을 보여주기도 한다. 공중에 부양된 상태에서 명상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날개의 마술로 하늘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신화 속의 이카루스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딸이 창밖을 올려다보는 장면은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영화에서 버림받고 잊혀진 그는 연극무대에서 다시 부활한다. 상업적 영화에서 상처를 입은 그는 순수한 연극 무대에서 카타르시스의 힐링을 경험한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에서는 수상의 영예를 누렸지만 흥행에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쉽지 않은 서사구조는 상업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지만, 인물의 표현 방식은 상업적 공식을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중에서는 가장 상업적 흥행의 순리를 따르고 있다. 어쩌면 그런 할리웃 생태 환경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수상의 영예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앞서 발표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일련의 영화들은 다소 무겁고 침울하고 메시지가 다분히 상징적이다. 육체보다 우월한 영혼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21 그램》, 성서의 바벨탑에서 동기를 차용하여 한 발의 총성으로 시작된 비극적인 사건으로 4개국 사람들이 하나로 얽히면서 고통의 의미를 심층 분석한《바벨》등에 비해《버드맨》은 상업적 서사의 코드로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부활시키고 있다. 이 영화가 빈약한 서사 구조에도 불구하고 주목을 받는 것은 영화 표현의 독창적 기법 때문이다. 물 흐르듯 유연한 카메라 워크의 롱 테이크, 드럼 소리로 인물의 심리적 강약과 템포를 표현하고 있는 점, 무엇보다도 통속적 서사구조를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연극을 알고 싶다면 미국 작가 레이몬드 카버의『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를 통속의 수렁에 빠지지 않게 버티는 힘 역시 카버의 소설의 주는 묘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