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통속 문학과 본격, 순수 문학. 말하자면 클래식 음악과 힙합이 다른 것, 판소리와 트로트가
비슷한 것 쯤? 그만큼의 차이와 공통을 가지고 있겠죠.
대중 문학과 순수 문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무엇'이라 콕 찝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
만, 대중문학과 순수 문학의 차이에 대해 어설프게나마 설명하라, 라고 하면 대충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생각해 봅니다. 한 번 해에, 봅!시다.
1. A4용지 네 장을 준비한다.
2. 첫번째 종이에 '온갖 기교를 통한 멋진 표현'이라고 쓴다. 그리고 빨강으로 색칠한다.
3. 두번째 종이에 '삶에서 투영된, 우려낸 진국같은 서정'이라고 쓴다. 그리고 흰 색으로 내버려
둔다.
4. 세번째 종이에 '돈을 벌기 위한 흥미 유도성의 전개'라고 쓴다. 파란 색으로 …….
5. 네번째 종이에 '초보적인 표현과 엉성한 주제, 개념없는 문장과 전개'라고 쓰고 검은 잉크를
붓는다.
6. 청바지 하나를 가져와서 왼쪽 뒷주머니에 '작'이라 오른쪽 뒷주머니에 '가들'이라고 쓴다.
7. '(주)문학계'라는 전자회사가 만든 세탁기 '대한민국 문학계'에 A4용지와 청바지를 넣고 돌린
다.
8. 청바지에 빨강, 하양, 파랑, 검정의 종이가 잔뜩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청바지를 탁탁 턴다.
바닥을 보면 온전히 빨강만 있는 곳도 없고, 하양만, 파랑만, 검정만 있는 곳도 없을 겁니다. 대
충 흰색과 빨강 위주로 된 곳이 있다면 거기 어딘가에 순수문학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파랑 위
주로 되어 있고, 나머지 색들은 아주 약간씩만 섞여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 쯤에 대중 문학
이 있을 겁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청바지를 보면 빨강과 하양이 잔뜩 뭉쳐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거기가 엘리트 문단입니다. 그
리고 파랑과 검정으로 가득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거기가 통신 공간, 인터넷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걸 어떻게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선을 긋는다고 해도 그 선은 어설
플 뿐입니다. 그저 북서쪽엔 시베리아 기단이 있고, 남동쪽엔 북태평양 기단이 있는 겁니다.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정석대로 문제를 풀어서 문제를 맞추는 것이 순수문학 작가분들입니다. '다음 증명에서 빠진 부
분을 채워 넣으시오.'라는 문제가 열 일곱 글자니까, 오지선다형이니까, 17을 5로 나누어 나머지
가 2니까 2를 찍었는데 그게 맞은 것이 귀여니죠.
우리는 어른에게서도 배우지만 어린아이의 행동에서도 배웁니다. 어른에게서 배운다는 건 순수
문학을 읽고 감동하는 것이고 어린아이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투드를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
다.
그러나 귀여니가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글들 읽어보면 나름대로 재미도 있
습니다. 재미 없으시다는 분들은 그 이상한 글자와 뻔한 줄거리를 강박관념으로 비판하면서 보
시니까 재미가 없으신 겁니다. 한국 판타지 소설계를 아는 사람들에게 투드는 감동적입니다. 저
는 여러 사람들과 그 감동을 공유했습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여러 판타지 소설을 읽어보았지만,
투드만큼 저를 감동시킨 작품은 없었습니다.
바람직한 문학이란 것도 별게 아닙니다. 바람직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문학이면 아마 바람직한 문
학일 겁니다. 예를 들자면,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에서 왕이 왕비를 맨날 죽이자 왕비가 들려
준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바람직한 문학입니다. 그 이야기들 때문에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
한 셈이니까요.
즉, 바람직한 문학은 빨강, 하양, 파랑, 검정의 종이조각들이 흩어진 바닥의 그 어느 곳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투드처럼 검정으로 가득한 것 조차도 말입니다. 투드는 엉터리 중의 엉터
리로서 우리 판타지계에 채찍질을 했으며, 그것들에 질린 자들에게 충격과 흥분을 주었습니다.
통속이든 본격이든 목적이든 순수든 간에 어쨌든 우리의 지루함과 슬픔을 달래주고 카타르시스
를 느끼게 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뭐, 문학이 지구를 구한다거나 우리 문화를 세계
만방에 전파한다거나 하면 더욱 좋겠지만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킬링 타임과 돈벌이에 도움이
되면 그나마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최강이 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노력 없이 달성
한 것'에 대하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 또 어
떤 면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문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학을 해야 하는가, 그
야 당연히 초바람직하고 극바람직한 이상적인 문학일 것입니다. 그런 문학에 속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 최강일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상적인 문학이란 최강 문학이다. 그런 말이었
습니다.
최강 문학을 하기 위한 방법론적으로 가자면, 작가들은 극대중 문학에서부터 극순수문학까지의
모든 문학을 섭렵(마스터)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득음, 득도의 길일 것입니
다. 온갖 문학적 기교를 다 터득하고 계발하며,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겪고, 정말 사람들
을 휘어잡는 작품을 만드는 모든 방법을 앎은 물론 그 작품을 접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장 조사
와 마케팅, 경영까지도 능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여 가장 효
과적인 선택을 매순간순간마다 해야 할 것입니다.
최강 문학은 어디에서나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말 로또 일년 내내 일등먹을 확률이지만, 투
드처럼 대충 쓴 글이 최강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 문학의 나태와 음욕과 추함 등의 치우침을 욕해야 합니다. 그것은 진정 최
강은 우리가 원하는 범위에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정상이니까요. 그렇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그 범위가 시대의 흐름으로 보아, '대부분의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순수문학성향 :대
중문학성향 비율이 1:3 정도인, 문학계의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영화계에 익숙한 독자들도
수용할 수 있는 문학'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즉, 한자가 너무 많이 나와서도 안되고, 너무 목적성이 없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가벼워서도
않되고, 비쥬얼적인 부분도 확실한 보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넓은 의미의 득문(得文)의 경지
는 아마 그 근처의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전 시대들에 비해 문학을 향유할 수 있는 인구가 많습니다. 어차피 인기를 끌기 위
해서는 반쯤은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 내용이 삼분지 일 밖에 이해가 안된다면 애초에 시선
을 끌지도 못할 위험성을 감수해야 합니다. 또한 어려운 어휘는 거부감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목적성이 없다는 것은 '변화시킬 의지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지나친 순수성은 오히려 지루함
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문학계는 지금 순수성에 질려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대중성향은
타락한듯한 느낌이 들 수 있으니 1:3이라는 비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자 한다면, 문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지
금 당장이 되었든 문학가로서 사후(死後)가 되었든 문학계의 존경을 받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렇
게 하기 위해선 당연히 적절한 예의와 도를 넘지 않는 파격이 필요합니다.
진정 문화 생활을 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텍스트보다 더 쉽고 직접적인 매체들에 절어서 더이
상 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기 적절하게 영화 몇 편만 보아도 며
칠 대화거리가 생깁니다. 그에 비해 책을 읽으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까지 상대방의 교양에
대한 검증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책과 영화사이의 벽을 허물 어떠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은 기존에 있던 어떤 것일 수도 있고, 혹 새로 개발될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이 네 가지가 최강 문학의 창조를 위한 가장 주의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
은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재와 주제 등의 그 글에 흐르는 맥
이 감동할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시대적 감동일 수도, 어떤 겨례의 감동일 수도, 시공간
을 초월한 감동일 수도 있습니다.
통속 문학 안에 순수 문학이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허수와 실수의 관계가 아니라 복소수와 실
수의 관계 말입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그렇지 않다고 정의하셨지만, 실상 순수 문학이라는 것
은 하나의 장르일 뿐입니다. 저는 그것이 지금까지 너무 거룩하게 경외받아왔을 뿐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에 대해 댈 근거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렇지 않다는 근거 또한 없지 않습니까?
저는 순수 문학과 대중 문학 사이의 담은 물론,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벽 마저도 허물고자 하는
주의입니다. 논설문과 설명문과 신문 기사는 물론, 영화와 만화와 음악 마저도 언젠가는 어떻게
든 문학과 어울려 사용될 것이라는 전망 아래 지키기 보다는 선구하자(先驅하자: 앞서자?)는 뜻
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RPG 게임 등에서 어느 정도는 현실화된 일입니다. 다만, 문학
을 위주로 한 시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 유명 가수의 앨범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들은 그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스텝들이 매달립니다. 그에 비해 '책'은 그저 한 사람이 쓰고, 출판사가 대충 찍어
내는 방식입니다.
실상 문학은 소위 엘리트들이 생산해낼 수 밖에는 없는 체계 안에 있었습니다. 엘리트가 아니고
서야 어떻게 그 두꺼운 책에 대해, 주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전개를 구상하며, 소소한 흥미
거리를 집어넣는 것과, 자신만의 문체를 개발하는 등의 모든 것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달라지리라고 감히 예언합니다. 새로운 것을 찾는 흐름을 따라, 여러 사람들이 하
나의 책을 만들기 위해 매달릴 것이고, 그 책을 위한 제목 하나, 캐릭터 모델 하나에도 신경을 쓰
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말입니다. 순수 문학이라는 것은 어느 한 구석에 있는 무형 문화
재가 되어 있을 겁니다.
요약하겠습니다. 대중 문학과 그렇지 않은 문학을 구분하는 선은 너무 굵고 흐리기 때문에 선 자
체가 그 의미를 상실합니다. 바람직한 문학이라는 것 또한 변수가 많고 상대적인 것이므로 우리
는 그저 이상적인 문학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이상적인 문학
은 '최강'이라 생각할만한 그 무엇일 것이며, 시대상 '대부분의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순수
문학성향 :대중문학성향 비율이 1:3 정도인, 문학계의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영화계에 익숙
한 독자들도 수용할 수 있는 문학'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벽은 허물어질
것이며, 독작(獨作: 혼자 지음)을 통한 엘리트 주의도 무너져서 결국 순수 문학은 하나의 장르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