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내가 생각하는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어린 나는 이 영화가 기괴하고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성인이 되고 철학을 전공으로 하는 대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본 이 영화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 하는지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파악을 할 수 없었다. 내 자신을 몰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허무하게 시간을 보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나에게 해결책을 주진 못하지만 기준을 세워주었다. 과제를 작성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으로 떠나는 철학여행을 읽으며 많은 것을 생각했다. 영화 속에 수많은 철학이 있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름과 욕망이다. 논어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 글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었다.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이름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다른사람과 비교하며 내가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살아온 것을 후회했다. 왜 남들이 하고 있는 것을 하려고 하고 남들만큼 잘하려 하였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잘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남들은 결국 자기 이름에 맞게 자기자신의 일을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내 일을 하지 않고 남들만 바라보고 살았다. 무시받고 평가받기 싫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작 나는 남들을 끊임없이 평가했다. 남들을 그렇게 흉내내고 싶었던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논어에 이런 말이 나온다.
군자라야 굶주림을 이겨낼 수 있지, 소인이 굶주리면 못할 짓이 없게 된다.
이 글을 보고 나는 소인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내 욕망은 인정이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애정결핍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욕망을 부정해왔고
객관적으로 나는 못난 사람이다라고 스스로를 무너트렸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매력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다만 나는 그 매력과 능력을 남에게서 찾았다. 나에게는 없는 매력과 능력을 내가 가진 매력과 능력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이런 매력과 능력이 없다고 비관에 빠지는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하고 내 자신을 살피고 파악하긴 커녕 남들과 비교하며 내 자신을 욕했다. 내가 쓰는 이 글은 나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이 아니다. 나를 바로 세우는 글이다. 먼저 나를 파악해야한다. 내 이름이 김민서라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해야하는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내 욕망을 충족한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남들만큼 못하는 거면 잘하지 못하니까 하지 말아야지 이런 마음 자체가 잘못되었다. 내가 뭐든지 못할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내 자신뿐이었고 그냥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 방식대로 모방없이 내가 생각하며 그저 묵묵히 하는 것 잘하거나 못하거나는 상관이 없었다. 내 매력과 능력은 미디어와 주변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찾는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능력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누가 어떤 가치를 가진 것은 나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나는 치히로가 센으로 본인 이름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처럼 나도 내 이름으로 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내게 주어진 일을 내가 하고픈 일을 할 것이다.
첫댓글 명분이라고 말합니다마는, 그것은 결국 나와 나의 행위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출발점입니다. 맹자가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라고 선언한 것은 인간이라면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강조는 결국 인간이 선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존재가 선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선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선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한 행위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확장하면 지금 누군가가 선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부조리하고, 따라서 나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점에 이르게 됩니다. 누군가는 선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선하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살고자 할 때 선이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센이 되어버린 치히로가 이름을 되찾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