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 새로운 자아
우리는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다. 불교는 윤회를 말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한 번만 산다고 믿는다. 잘은 몰라도 그 윤회도 결국은 열반에 들기 위한 또 다른 기회이지 무한 반복되는 삶은 아닐 거다. 실제로 무한 반복되는 삶은 행운이 아니라 저주다. 그런데도 그런 바람이 있는 건 지금보다 좀 더 잘살아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인 거 같다. 그 거룩한 욕망의 끝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활이라고 믿는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깜짝쇼가 아니다. 그건 전혀 다른 생명,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이다. 그걸 예수님은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는 과정에 비유하셨다. 땅속 어두운 데서 씨앗으로부터 뿌리가 나오고 싹이 나오면서 본래 형제가 완전히 없어지는 걸 예수님은 씨앗의 죽음이라고 표현하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바오로 사도도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이 말씀을 이어받아 가르친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1코린 15,36) 여기서 씨앗의 죽음은 내가 옛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는 필수 조건이고 또 반복되는, 하지만 성장하는 과정이다.
새로운 자아는 하느님의 자녀다. 세례로 옛 자아는 이미 죽었고, 새로 태어난 자아는 성장해 가는 중이다. 이미 죽은 옛 자아를 회상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이 살덩어리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자라나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죽고 새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란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 지난 시간을 후회하며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설령 그 바람대로 되더라도 다르지 않을 거 같다. 그 후회가 그런 헛된 바람이 아니라 거룩한 결심으로 이어져야 하겠다. 한 번뿐인 삶이라서 소중하다기보다는 나는 계속 성장해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물이 끓어 어느 순간 수증기 기체로 그 형태를 바꾸는 거처럼, 씨앗이 없어져 열매를 맺는 거처럼, 이기적인 자아는 이타적인 자아로 바뀌어 간다.
씨앗은 길가에, 돌밭에, 또는 가시덤불에 떨어지기도 한다. 내 마음이 그렇다는 뜻이겠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걸 믿고,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을 하느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힘을 다해 그대로 실천한다. 잘 안되고, 때론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지키고 따른다. 지금은 어쩌면 조선시대 박해 때보다 더 강한 무관심의 도전과 화려한 물질문명의 유혹을 매일 받는 때인지 모르겠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5) 인내해야 한다. 인내의 뿌리는 희망과 신뢰다. 저절로 되는 건 죄뿐이다. 이기적이고 연약한 이 살덩어리 육체가 내 영적 전투의 전쟁터다. 거의 매번 패배하지만, 가끔은 승리하기도 한다. 그 작은 승리를 먹고 내 영혼은 하느님의 자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간다.
예수님, 안드레아 사도는 십자가 형벌을 받으러 가면서 그 십자가를 반가운 친구를 만나듯 반겼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 하겠습니다. 반가운 친구 정도는 아니어도 주님이 제게 주시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게 도와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매일 여러 번 이 이콘을 바라보는데도 늘 새로운 걸 보면 성모님이 저를 아드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게 분명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