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구, 저게 어떻게 군대생활을 하노..... 그러게 말예요, 제가 대신이라도 갔으면 좋겠어요. 내가 군대 입대하기 전날밤 아버님과 큰형님이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착하기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하루종일 혼자서도 울지 않고 놀다가 피곤하면 자다가 깨어서 놀면서도 울지 않아서 순뎅이라고 했습니다. 성장해서도 집을 떠나 생활해본 일이 없습니다. 마치 온상에서 자란 나무처럼 어른들 입장에서 볼 때는 군대에 보내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못미더웠던 것입니다.
바로 위에 형이 군대 갈 때는 집에서 버스 태워서 보냈는데 내가 군대갈 때는 춘천 보충대 앞에까지 아버님과 큰형님이 따라와서 같이 자고 다음날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시고서야 눈물을 훔치시며 돌아서셨습니다. 사실 나는 그동안 욕한번 제대로 해 본 일이 없고 싸움도 해본 일도 없고 학교나 교회만 다니며 집에서 일만 하다가 말만 들어도 오싹 해지는 군대라는 새로운 조직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두려웠습니다.
그동안 군대 갔다온 형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대략 분위기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내가 그 조직에 들어가 3년을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애써 태연한척 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일부러 늠름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내가 수 백명의 신병들 틈에 섞여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정문 밖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아버님과 큰 형님이 아쉬운 발걸음을 돌이키신 후 나는 긴장 속에서 3년 동안을 군대라는 용광로에서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장정 대기소에서 5일간을 머물면서 신체검사며 여러가지 절차들을 거치고 있을 때 동기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야! 2사단 하고 11사단은 육이오때 군기를 뺏겨서 거기에 떨어지면 X빠진대.... 나는 별 관심 없이 들었는데 마지막 날이 되자 연병장에 모아놓고 자기가 가서 3년간 근무해야 할 부대를 알려주겠다며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21사단, 12사단, 27사단, 11사단....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내 이름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2사단을 외치고 이름을 부르는데 내가 바로 2사단에 떨어진 것입니다. 내가 배치된 부대는 2사단 31연대 신병교육대였던 것입니다. 나는 2사단에 떨어지면 왜 그렇게 힘들다고 말했는지 군생활 날짜가 흘러갈수록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춘천에서 배를 타고 양구까지 두세시간을 가야 했는데 배에 오르자 마자 일등병 하나가 올라오더니 온갖 욕을 다 하면서 여러가지 얼차려를 시켰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양 거들먹거리며 모욕적인 말은 다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인격적인 기대는 박살나고 자존심은 완전히 짖밟혔고 오직 생존만을 생각해야 되는 처절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1979년 11월 11일 강원도 양구의 날씨는 장난이 아니였습니다. 우리가 배에서 내렸을 때는 해가 막 떨어지고 저녁의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 때였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육공트럭에 몸을 싣고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며 얼마를 달렸을까? 대기하고 있던 신병교육대 조교들의 앙칼진 욕과 함께 우리는 정신 없이 뛰어다녔습니다.
다음날은 주일 날이었는데 아침부터 연병장에 불러 내더니 양팔간격으로 벌려 세워놓고 런닝펜티만 입힌채 연병장에 세워놓고 소지품부터 따불빽이며 일체를 점검하더니 신체검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날 얼나마 떨고 또 떨었는지..... 악몽같은 하루해는 왜 그렇게 길던지....
나는 군대 입대하기 전에 강원도의 추운 날씨에서 일부러 찬물로 샤워도 하고 토끼뜀도 뛰면서 추위를 견디는 훈련과 얼차려 받는 훈련을 미리 연습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연습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날 하루종일 소대 편성이며 모든 훈련 준비를 마치고 다음날인 월요일부터는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의 부대 분위기는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삼엄했습니다. 그 이유는 박 대통령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군대 입대한 날은 11월 6일인데 10월 26일 나는 집에서 영장을 받아놓고 입대할 날을 몇일 남겨두고 가계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라디오에서 침울한 분위기의 음악이 흐르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습니다. 온 국민은 애도를 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이 나왔고 나는 군대 가기도 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이 몰려왔었습니다.
그리고 몇일이 지나서 입대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 군이 경계를 강화하고 부대 분위기는 더욱 살벌했습니다. 내가 입대하고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는 말만하면 터져 나오는 욕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어머니가 자녀들 여럿 키우시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욕으로 푸시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욕을 하지 않겠다고 청소년기에 굳게 다짐하고 학교에서도 욕 잘하는 친구들은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입대하고나니 모든 언어가 욕으로 통했습니다. 나는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삼킨 것쳐럼 속이 다 늬글 거렸습니다.
그리고 또하나 참기 어려운 것은 집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군대 오기 전에 부모를 떠나 생활 했던 동료들은 집생각 하나도 안난다고 하는데 나는 집에서만 살다가 처음으로 부모형제를 떨어져서 생활 하려니 너무너무 보고싶고 집에 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 되어 취침나팔 소리가 처량하게 울리면 왜 그렇게 집생각이 간절하던지..... 여기서 어떻게 가면 집으로 갈 수 있을까? 차를 타고 가면 몇시간 걸릴까? 걸어간다면 얼마나 걸릴까? 아버지 어머니는 무얼하고 계실까?...... 나는 그 때 가족들이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지를 뼈져리게 느끼며 인생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훈련소 생활은 너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그런대로 날짜가 잘 흘러갔습니다. 그나마 나를 붙들어 주었던 가장 중요한 힘은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서 찬송을 부르면 눈물이 흘렀습니다. 설교시간에는 피곤을 이기지 못해서 열심히 머리를 흔들며 졸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시간 만큼은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느낄 만큼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교회 갈사람을 소집해서 모였는데 우리 소대 내무반장 안하사는 살벌한 눈을 디룩디룩 굴리면서 이 쌔끼들 오늘 예배당 가서 먹을꺼 주머니에 넣고 오기만 하면 각오해, 죽여버릴테니까. 그의 살기찬 엄포는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교회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그날은 추수감사절이라 교회에서 떡을 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훈련소 밥이 모자라 쩔쩔매던 터라 떡을 본 순간 눈이 뒤집혔습니다. 떡 덩이 하나가 어린애 머리통만 한 것을 나눠 주었는데 더 먹을 사람 말하라고 하니까 동기들이 모두 한 덩이씩을 더 달라고 해서 놓고 먹는데 도져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목사님은 광고시간에 자기가 받은 떡은 모두 싸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야전잠바 주머니에 불룩불룩하게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부대에 와서는 내무반에 들어가기 전에 모두 화장실에 갔는데 그 때서야 내무반장이 서슬이 퍼렇게 경고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잠깐 의논을 했습니다. 그중에 한 동기가 내무반장의 말이 겁이 났는지 난 버릴꺼야.하면서 변소 통에 떡을 던져버렸습니다. 함께 갔던 동기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떡을 변소 통에 던졌습니다. 텅! 텅! 텅! 정상적인 중간 과정도 거치지 않은 떡들이 화장실 변기통으로 직행을 하고 만 것입니다.
한번은 저녁예배에 교회에 갔더니 중대별 성경퀴즈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용감하게 신청을 하고 우리 중대 대표로 나갔습니다. 입대 전에는 그래도 퀴즈라면 항상 상을 타왔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했지만 1등은 못했습니다. 2등을 했다며 상을 주었는데 종합선물셋트 한 상자 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도중에 인솔 하사는 우리를 잠시 길에 세우더니 상 받은 것 내무반에 가져가면 시끄러워 지니까 여기서 잠시 시간을 줄테니 먹고 가라고 했습니다. 인솔하사가 뚜껑을 열면서 하나씩 집어가라고 하자 어느새 없어졌는지 빈 통만 남았습니다. 나는 다른 친구가 나 때문에 받은 상이라며 사탕하나 챙겨줘서 먹었습니다.
훈련소 2달의 생활이 거의 마쳐갈 무렵 우리는 낡은 통일화를 신고 20키로 행군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행군은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통일화가 발에 잘 맞지 않는 것을 신고 걸어서 그만 발 뒷축이 벗겨지면서 상처가 났습니다.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몇일만에 상처는 아물었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