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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석근의 음악해설 원문보기 글쓴이: -소리천사-
18세기 후엽 리트 미학관의 변천 과정
이경희
목차
1. 들어가는 말
2. 18세기 후엽 리트계 상황
3. 18세기 리트 미학가.
가. 노래성 (Sangbarkeit)
ㄱ. 개념 정의
ㄴ. 리트 창작 실제
나. 유절 리트 (Strophenlied)
다. 18세기 리트의 성격
ㄱ. '작품' (Opus)
ㄴ. 선물(膳物)
4. 예술가곡 (Kunstlied)으로의 전환
가. 통절작곡 (Durchcomponieren)
나. 예술 가곡의 구성 요소
ㄱ. 시의 선택
ㄴ. 리트 선율
ㄷ. 리트 반주
ㄹ. 연주회 지향
5. 나가는 말
참고 문헌
1. 들어가는 말
18세기 후엽은 시대 사조, 세계관, 음악 양식, 미학관 등이 급격하게 변화하였던 시기이다. 리트에서도 19세기 예술 가곡으로 전환되는 여러 가지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쉽게도 이러한 변화 과정에 대한 논의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부족하였다. 결과적으로 슈베르트 이후의 예술 가곡만 강조되고 연주되는 경향이 팽배하다. 그러나 정작 예술가곡이 어떻게 탄생되게 되었는지는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는 리트 미학관의 전환에 대해서는 더 무관심하다. 나타난 현상의 분석만큼, 그것을 나타나게 한 원인에 대한 연구도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리트 미학관의 변천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리트1)는 시와 음악이 결합한 장르이니 만큼 문학을 포함한 다학문적 접근을 요한다. 본고에서는 먼저 18세기 후엽 리트계의 상황을 시와 음악의 양쪽 측면에서 동시에 접근하려고 한다. 문학계와 음악계에서 어떤 이슈들이 문제가 되고 있었는지, 결과적으로 어떤 경향의 리트가 만들어졌는지,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작곡가와 시인들은 누가 있는지 등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렇게 전체적인 개관을 하고 나면, 리트사에서 예술 가곡의 위치가 명확히 파악될 것이다.
기존의 리트 관련 문헌에서는 위와 같은 첫 번째 방식으로만 리트를 다루어왔다. 따라서 다음의 접근 방법과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가 된다. 본고의 두 번째 부분은 18세기 리트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 미적 개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려고 한다. 결과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 밑에 놓인 동인(動因)을 심도 깊게 고찰함으로서 새로운 관점에서 18세기 리트를 이해하고 싶었다. 당시 사람들이 리트라는 용어와 장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알고 나면, 18세기 후엽 리트 특징들이 당대 리트 미학관의 산물이었음이 이해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19세기 예술 가곡의 특징들을 중심으로 18세기 후엽 리트와 어떻게 다른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등을 짚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모든 작업은 예술가곡이 탄생되는데 18세기 후엽 리트 미학관의 변화가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음을 보여줄 것이다.
2. 18세기 후엽 독일 문화계 상황
18세기 중엽 독일에서는 새로운 리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오랫동안 이태리 오페라와 칸타타가 독일의 성악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반기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미학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다분히 독일인들의 애국심도 작용하였다. 당시 궁정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많은 외국인 연주자와 귀족들의 외국 유행 선호에 대한 일반 대중들이 반감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취향에 맞고 독어 가사를 가진 새로운 리트가 필요하였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발맞추어 새로운 리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저술들이 나왔다. 1752년에 나온 크라우제 (Christian Gottfried Krause)의 "음악적 시에 관하여(Von der musikalischen Poesie)가 대표적인 예이다. 제 1 베를린 악파의 중심인물인 크라우제는 독일인들이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오페라 아리아나 들을 수 있을 뿐 반주 없이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부족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므로 독일인만의 노래, 즉 베이스를 어떻게 붙여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훈련받지 않은 목소리로도 부를 수 있는 쉬운 리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리트 모음집들이 출판되었다. 크라우제의 Oden mit Melodien (Berlin, 1753-55)은 시인 람러 (Karl Wilhelm Ramler)와 공동으로 작업한 것으로, 1750년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리트 모음집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작곡가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 중 몇 사람은 다음과 같이 확인이 된다: 벤다 (Georg Benda), 아그리콜라 ( Johann Friedrich Agricola), 그라운 (Carl Heinrich Graun),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바흐 (C. P. E. Bach) 등이다. 또 다른 중요한 리트집으로는 마부르크 ( Friedrich Wilhelm Marpurg)의 Berlinische Oden und Lieder (3부, Leipzig, 1756-63)를 들 수 있다. 이 모음집 역시 C. P. E. 바흐, 그라운, 키른베르거 (Johann Philipp Kirnberger), 크봔츠 (Johann Joachim Quantz) 등 당대 주요 작곡가들이 동참하였다.
50년대 이후 리트 비평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기악 선율, 특히 춤곡에 가사를 붙이는 비 성악적 관습이었다. 제 1 베를린 악파의 중요한 이론서와 리트집이 출판된 1750년대 이후조차도 작곡 실제에서는 이러한 악습은 계속되었다. 작곡가들은 리트 제목을 춤곡에서 취하여 붙이기도 하고, 과도하게 장식적인 음형들을 선율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자연스러움, 쉬움, 단순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작곡가들조차도 때로는 기악적인 성격을 띄거나, 노래하기 어려운 장식음과 리듬 음형을 가지고 있는 노래들을 작곡하곤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이론과 실제가 병행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과도기를 지나 1770년 경 새로운 리트 양식이 본격적으로 발전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괴팅겐 하인분트 (Göttinger Hainbund)의 결성, 헤르더 (Johann Gottfried Herder)의 민요 운동, 괴테의 등장 등이 그 주요 요인이다. 괴팅겐 하인분트는 괴팅겐 대학에서 수학하던 젊은 학생들이 1772년에 결성한 문학 모임이다. 구성원으로서는 포스 (Johann Heinrich Voss), 횔티 (Ludwig Heinrich Christian Hölty), 보위 (Christian Theodor Boie), 밀러 (Johann Martin Miller), 슈톨베르그 (Friedrich Leopold Stolberg) 등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모임 자체는 오래 가지 못했다. 1776년 핵심 멤버였던 횔티가 죽고, 다른 구성원들은 졸업 후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해 놓은 시 양식, 미학적 기치(旗幟)들은 계속적으로 독일 시학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괴팅거 하인분트의 정신적 아버지 역할을 하였던 시인으로 클롭슈톡 (Johann Gottfried Klopstock)이 있다. 클롭슈톡은 괴테가 등장하기 이전 독일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우정과 사랑, 죽음과 덧없음, 황홀경의 경지에 이르는 종교적 믿음 등의 소재들은 괴팅겐 하인분트의 시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클롭슈톡의 시 양식은 사실상 자유시로서, 일정한 운율에 얽매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 리트로 만들기에 상당히 까다롭다. 따라서 양식상으로 더 단순한 하인분트의 시가 작곡가들에게는 많이 선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롭슈톡의 시에 곡을 붙인 몇몇 작곡가들이 있다: 글룩 (Christoph Willibald Ritter von Gluck), C. P. E. 바흐, 바이스 ( Friedrich Wilhelm Weiss), 포르켈 (Johann Nikolaus Forkel), G. 벤다 등이다. 이들의 리트는 1770년대에 발간된 괴팅거와 포지셔 무젠알마낙에 출판되었다. 이 리트들은 새로운 리트 양식 가능성을 열었다. 시 속에 빈번히 나타나는 감정의 격렬한 분출은 작곡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의 음악적 표현을 추구하게끔 자극을 주었다. 특히 글룩과 바하의 작품은 매우 중요하다. 아쉽게도 이들의 시도가 예술가곡으로 계속 발전되지 못했다. 그 까닭은 그들이 문을 연 새로운 리트 양식을 지속적으로 다른 작품을 통하여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70년대 이후 리트는 새로이 일깨워진 민요에 대한 관심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면서 발전되었다. 헤르더의 민요 운동은 1773년에 발간된 그의 수필, "오시앙과 옛 민중들의 노래에 관한 서간으로부터 발췌" (Auszug aus einem Briefwechsel ueber Ossian und die Lieder alter Völker)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이 글은 당시 독일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헤르더는 독일인들에게 밖으로 나가 아직 남아있는 민요들을 수집하자고 호소하면서, 현대시는 민요로부터 그 영감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78-9년 헤르더 자신이 민요 모음집, Stimmen der Voelker in Liedern을 출판하였다. 헤르더를 슈트라스부르크 (Strassbourg)에서 만난 젊은 괴테는 이런 취지에 동조하여 알사스 지방에서 직접 민요를 수집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그의 시 창작에도 이어져 민요적 특성들이 그의 시의 많이 반영되었다.
괴테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시인들이 민요 양식을 자신의 시에 접목시키려고 했다. 뷔르거 (Bürger), 클라우디우스 (Claudius), 횔티, 포스, F. 슈톨베르그의 시들에서도 이런 시도가 발견된다. 70년대 이후 수많은 시들이 민요풍으로 쓰였다. 직접적이고 친근한 형식과 양식, 이미지가 쓰였다. 특히 단순한 각운 유형 (일반적으로 abab)을 가진 3박 혹은 4박 4행의 독일 민요의 특징을 반영한 양식이 계발되었다. 이런 시들은 작곡가가 단순하고 친근한 양식으로 리트 만드는 것을 더욱 용이하게 하였다.
18세기 초 작곡가들이 가사로 많이 사용하던 시의 종류는 하게돈 (Friedrich von Hagedorn, 1708-54)이 대표하는 아나크레온 풍의 시였다. 주로 전원적인 평화로움과 풍경을 찬미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시 경향은 작곡가들이 가볍고 유쾌한 느낌을 주는 리트들을 작곡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1770년 무렵부터는 아나크레온 풍의 시가 시인들에게 외면 당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병행하여, 작곡가들도 다른 경향의 시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1770년 이후 작곡가들이 선택한 가사들은 점점 심각하고, 감상적이고, 또 많은 경우 교훈적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의 측면에서 리트를 살펴보았다. 이제 음악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1770년 이후의 새로운 유형의 리트의 탄생을 촉발시킨 요인으로서, 힐러의 징슈필 리트 (Singspiel-lied)의 공헌을 빼놓을 수 없다. 1770년에 막이 올려진 그의 징슈필 "Die verwandelten Weiber oder der Teufel ist los"에서 나온 리트 "Ohne Lieb' und ohne Wein"이 독일 전역에 유행되었다. 힐러의 다른 징슈필 리트들도 비슷하게 짧은 시간 내에 널리 퍼졌다. 힐러는 이 노래들을 직업 가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적으로 훈련이 덜된 배우들을 위해서 썼기 때문에, 보다 단순한 양식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무대에서 얻어진 경험으로 힐러는 대중이 어떤 종류의 음악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힐러는 무대의 장점을 백분 활용하여 리트를 통해 독일 대중을 고무하고자 하였다. 외국의 영향에 물들지 않은 독일인들만의 노래를 가질 때가 왔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징슈필 리트의 성공은 많은 추종자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작곡가로 니페 (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 G. 벤다 (d. 1795), 안드레 (Johann André, 1741-1799), 라이하르트 (Johann Friedrich Reichardt, 1752-1814)등이 있다.
음악 쪽에 비중을 두는 힐러의 리트 양식은 이후 80년에 리트 발전에는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슐쯔 (J. A. P. Schulz)의 민요적 리트 (Volkstümliche Lied)라는 새로운 리트 양식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슐쯔의 일차 목표는 새로운 좋은 독일 시를 널리 알리고, 민요에 가까운 리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민요풍의 리트" Lieder im Volkston, 1782; 1권 1부, 1785; 1권 2부, 1790; 2권)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다. 힐러와 대조적으로 슐쯔는 음악보다는 가사 전달에 강조점을 두었다. 주로 괴팅거 하인분트의 시에서 보통 사람들의 정서에 가장 잘 부응하는 가사들을 선택하였다. 사랑의 고통과 기쁨, 자연의 즐거움, 삶의 여러 가지 양상 등을 포함하여 가능한 모든 것이 리트로 만들어졌다. 그의 Lieder im Volkston은 당대의 가장 인기 있는 리트집이 되었다. 잠깐 동안 나타났다 사라지는 대부분의 리트와 달리, 슐쯔의 리트들은 오랜 기간 독일 전역에서 불려져 마침내는 진짜 민요가 되었다.
슐쯔의 원리를 자신의 작품에 반영시켜 계속하여 발전시킨 작곡가로 라이하르트가 있다. 그의 활동 시기는 1770년에서부터 1810년대까지 걸쳐 있다. 당시 여러 가지 경향의 리트의 발전을 시기별로 잘 보여주고 있다: 70년대의 징슈필 리트, 80년대의 민요적 경향, 80년대 후반의 합창 리트, 90년대 중반부터 예술 가곡으로의 경향. 슐쯔가 하인분트의 시를 주로 선택하였던데 반해, 라이하르트는 하인분트의 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시인들의 시를 사용하였다. 그 중에는 하게돈, 마티존 (Matthisson), 쉴러, 괴테 ,도 포함된다. 기본적으로 라이하르트의 시에 대한 접근 방식은 슐쯔의 원리를 따라 가사가 우선 이다. 그러나 1795년부터, 민요적 요소들이 점점 사라지고 대신에 보다 다양한 양식들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중 제일 중요한 것은 괴테와 쉴러의 시에 붙인 예술 가곡 경향의 리트이다.
리트 발전사 전체에서 보면, 1785년 경 부터, 특정 계층이나 목적을 위한 리트집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것은 각각의 계층이 그들의 정서를 더욱 잘 반영하고 표현할 수 있는 특정 리트를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주, 도시 시민, 농부, 양재사, 직조공, 신발 제조공, 도자기 만드는 사람, 빵 굽는 사람 등 모든 종류의 직업과 계층을 위해 리트가 만들어졌다. 한편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리트집들도 점점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리트의 존재 이유 중에서, 사회성의 요소가 더욱 중요하게 부상하였다. 이에 부응한 모임 노래가 다양한 계층의 사교적 모임에서 불려졌다. 비슷한 시기에, 아마추어들의 노래 모임이 도시뿐만 아니라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합창 리트에 대한 관심이 부활되었다.
3. 18세기 리트 미학2)
가. 노래성 (Sangbarkeit)
ㄱ. 개념 정의
"Sangbarkeit"는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하기가 곤란한 단어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노래 부르거나 붙이기 좋은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축약하여 "노래성"으로 부르기로 하자. 이것은 시와 음악 양쪽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리트의 필수 요건이다. 시적 측면에서 보면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에 적합한 시라는 뜻이고, 음악적 측면에서는 쉽게 노래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노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이 용어는 18세기 음악 사전에서 직접 찾아 볼 수 있는 일반화된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은 리트가 다른 종류의 노래와 다르게 구별되는 유형인 것을 설명하는데 특별히 유용하다. 이 용어와 개념은 18세기 리트 관련 글에서는 어디서든지 발견된다. 예를 들면 리트집의 서문, 광고문안, 평론, 시인과 작곡가들의 편지 등에서 수없이 발견된다. 노래성은 18세기 리트 미학에서 추구되어진 하나의 이상(理想)이었다. 18세기 후엽 리트들은 일반적으로 단어와 음의 밀접함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 밀접함은 노래성 개념 속에서 이론화되었다. 따라서 리트에 대한 논의는 이 개념에서 출발점을 찾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
"Lied"라는 용어는 문학과 음악 양쪽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18세기에는 비슷한 용도로 송가 (Ode)가 쓰이기도 하였다. 18세기에 출판된 잡지, 책, 노래집의 제목, 서신들 속에 발견되는 리트 관련 문구들에서 당시 사람들이 리트와 오드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발견된다. 그러나 거기에도 미묘한 차이는 있었다. 리트는 반드시 선율과 함께 불려져야 한다는 점이 항상 강조되었다. 이 점은 리트와 오드를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후엽 리트 미학관의 중심 논지였다. 줄쩌 (Georg Johann Sulzer)의 "예술 일반 이론" (Allgemeine Theorie der Schönen Künste, Leipzig, 1777-1779)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리트는 항상 노래되어야 한다. 또한 한 절의 선율은 다른 절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오드는 읽히어지기 위해서이든지, 혹은 노래 불려지던지 간에, 각각의 절에 서로 다른 선율을 필요로 한다."3) "리트는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노래불러져야한다" 라는 문구는 포지셔 무젠알마낙의 편집자 포스 (Heinrich Voss)와 작곡가 슐쯔 (J. A. P. Schulz)간의 서신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리트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무젠알마낙이나 타쉔부흐 등의 문학 잡지에 많은 시들이 새로운 선율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을 단순히 잡지의 매상을 올리려는 상술로서 파악하려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당시의 가곡 미학관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17세기 오페라를 탄생시켰던 고대 그리스의 음악 언어관이 18세기에 부활되어 리트 미학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리트는 고대를 본받아 노래불러져야 되지 그냥 읽혀져서는 안되었다. 가사와 선율은 나누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슈바르트 (Schubart), 하인제 (Heinse), 크라우제 등의 이론가들도 고대의 시와 음악이 하나였다는 견해를 지지하였다. 비 유럽 나라 음악에 대한 지식도 이러한 견해들이 공감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시인들은 자신의 시작 활동을 노래부르는 것으로, 자신의 시를 노래로, 더 나아가서 자신을 가수로 지칭하였다. 클롭슈톡, 헤르더, 뷔르거의 서신들을 보면 이런 용법들이 자주 발견된다. 한편, 음악과 시를 같이 싣고 있는 책의 출판이 증가하였다. 시집이나 노래집들은 하프, 리라 등의 악기와 시인을 가수로 묘사한 상징성 많은 그림을 표지로 싣고 있다. 이런 시도는 시인들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괴테도 자신을 하프를 켜고 있는 가수로 그리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리트도 선율과 함께 출판되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시절 (Wilhelm Meisters Lehrjahre)"의 초판에는 라이하르트의 선율이 같이 포함되어 있다. 괴테는 더 나아가서 청각적 선율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그림도 함께 병행되어야만 시가 완성되어진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의 소설 삽화들은 이런 특수한 미적 고려에서 나온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ㄴ. 리트 창작 실제
노래성을 추구하는 현상은 용어 사용이나 출판 관습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시인과 작곡가의 창작 실제에도 나타난다. 시와 음악이 하나가 되어야만 완성된 리트라고 간주하는 리트 미학관은 다양한 결과를 낳았다. 노래성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시인 자신이 작곡가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작곡가가 시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안드레, 카이저 (Philipp Christoph Kayser), 라이하르트, 젝켄도르프 (Karl Siegmund von Seckendorff)에서 발견할 수 있다. 슈베르트도 초기에는 작사를 직접 하였다. 시인과 작곡가의 동일화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리트의 시적-음악적 통일을 보장한다. 비평가들도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반쪽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두 예술의 결합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 시도들이 행해졌다. 클롭슈톡은 자신의 시집을 출판할 때, 자신이 원하는 낭송 양식을 시와 같이 인쇄하였다.4) 자신이 시를 지을 때 근거한 고저장단 패턴을 해당 시 앞에 인쇄함으로서 그가 노렸던 효과는 무엇일까? 유절가곡 처럼, 전체 절들을 위한 하나의 음률을 만듦으로써, 말하자면 시를 '작곡'하였던 것이다.
괴테에게도 음악적 요소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자신의 소설 주인공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입을 통해 괴테는 자신의 작시 습관을 말하고 있다. 또한 괴테가 주고받았던 서간문에서도 그가 주도했던 바이마르 음악 살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괴테는 놀랍게도 시를 작시할 때, 기존의 리트 선율에 맞춰서 작시하곤 했다. 이런 방법은 처음부터 노래성을 보증해 줄 수밖에 없다. 클롭슈톡의 단순한 리듬 패턴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선율을 사용하였기에 더욱 그렇다. 또한 괴테는 오래된 민요 가락에 맞춰 시를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음률 모델에 근거하여 작시하는 관습은 괴테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브렌따노 (Brentano), 우란드 (Uhland), 하이네 (Heine) 등도 이런 방법을 종종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선율 차용의 재료로 당시 유행했던 오페라 아리아 선율이 빈번히 사용되었다. 모차르트 오페라 중 [마적]에 나오는 파파게노의 선율에 괴테나 횔티의 시들이 자주 붙여졌다고 괴테의 음악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증거하고 있다.
클롭슈톡이 주도하였던 사교 모임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행해졌다: "우리는 작은 음악 모음집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 마음에 드는 선율을 골라 큰 소리로 부른다. 그 선율이 가사가 없는 경우에는 맞는 가사를 만든다. 있는 경우에도 가사를 바꾼다. 가사는 마음에 드는데, 선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는 다른 선율을 갖다 맞추기도 한다."5) 이런 차용 관습은 18세기 후엽까지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것 같다. 이것은 다음의 두 가지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우선 이런 관습을 통해 노래성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즉 예술적인 고려이다. 또한 리트의 내용을 빠르게 대중에게 전파시킬 수 있었다. 즉 대중성을 보증하여 주었다.
시인은 작곡가와의 협동작업을 통해서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을 이룬다. 오페라 사에서 유명한 시인-작곡가 관계가 리트에서도 성립된다. 제일 유명한 커플로는 봐이세 (Weisse)와 힐러, 포스와 슐쯔, 클롭슈톡과 니페, 클롭슈톡과 글룩 등이 있다. 괴테와 함께 작업했던 작곡가로는 라이하르트와 쩰터 (Zelter)가 유명하다.
괴테는 "Komponist (작곡가)"와 "komponieren (작곡하다)"이라는 단어를 리트 선율을 만드는 작업에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vertonen (음악을 붙이다)"보다는 "betonen (강조하다)"이란 단어를 선호했다는 일화는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이것은 18세기 후엽 독일 지식층들이 시와 음악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리트관이 음악가에 대한 시인의 우월성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오히려 리트를 만드는 작업에 있어서 시인과 작곡가의 동일화를 의미한다. 즉 리트라는 장르의 요구 앞에 양쪽이 한 발자국씩 양보하는 것에 가깝다. 오페라 사에 있었던 음악과 언어간의 우위 논쟁을 리트사에 적용시키는 것은 헛된 시도이다. 18세기 후엽은 시인과 작곡가간의 완벽한 균형을 추구하는 이상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두 인간의 평등성이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만약 무엇이 무엇을 봉사한다는 관점을 고집한다면, 이 봉사의 요구는 양쪽에 동시에 놓여졌다.
노래 부르기 좋은 리트를 만들기 위해 시인과 작곡가들은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특히 작곡가는 시에 선율을 붙일 때, 가능한 한 시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기대되었다. 클롭슈톡이나 괴테와 같은 거장의 시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와 비교해 19세기 슈베르트나 슈만의 입장은 정반대이다. 그들은 예술적 의도에서 시를 첨삭하는 것을 자유로이 여겼다. 그들에게 있어 리트 작곡은, 시를 창조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예술적 새로움을 재창조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나. 유절 리트 (Strophenlied)
18세기 리트 관련 글들을 조사하다 보면, "유절 리트 (Strophenlied)"라는 용어를 예외 없이 발견할 수 있다. "유절성 (Strophigkeit)"은 작시와 선율 작곡 양쪽에서 적용되었고, "노래성"에 가까운 의미로서 이해되었다. 18세기 초엽 고트쉐드 (Gottsched)를 위시한 신고전주의 이론가들은 유절성을 시와 음악에서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모든 절에 적합한 선율을 만들기를 원한다면, 시가 나뉘어지는 지점, 구두점, 감탄사, 콤마뿐만 아니라, 각 절을 통괄하는 중심정서를 잘 파악해야 한다. 1752년 크라우제는 "각 절에서 착상이 달라지고 다른 선율들을 만들기를 원하는 경우, 그것은 더 이상 리트나 오드가 아니고, 아리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6) 비록 용어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런 관점은 18세기 후엽에도 이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작곡 방법과 시작 방법이 비슷하였다. 정서의 통일성을 위해 리트를 첫째 절의 내용에 따라서만 만들어서는 안되었다. 시 전체를 지배하는 정조의 통일된 특성을 표현하는 것이 작곡가의 임무였다. 이미 노래부르기 좋게 만들어진 시는 음악적-리듬적 움직임을 발생시킨다. 이것을 18세기 후엽 사람들은 느낌(Empfindung), 정념 (Leidenschaft), 나중에는 정조 (Stimmung)라고 불렀다. 이것은 구(舊) 정서 (Affekt)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18세기 후엽 리트 미학관에서 새로운 점은 선율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정조가 시의 정서에 대한 새로운 파악이고, 운율의 힘을 통해 만들어지는 정조, 혹은 어떤 감정의 상태에 조율된 것으로서 이해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의 전체를 고려해야하고, 그 자체로서 통일되어야 하고, 각 절을 따라 발전되거나 극단적으로 변화해서는 안된다. 이런 요구는 리트 시작(詩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이런 정조의 통일이 18세기 후엽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유절 형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정조를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선율 작곡은 가사의 유절성에 최대한으로 따라야 하고, 다른 절로 옮길 때마다 새로움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된다. 이에 반해 통절 작곡은 세부적인 묘사와 개별적인 것을 극적으로 만드는 것에 치중하기에 통일된 정조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리트 연주에서 각 절을 다양하게 연주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유절 리트의 단점을 보완하였다. 리트 연주는 악보에는 명시되지 않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현실화시켜 리트를 완성해야 한다. 따라서 가수는 노래하기 전에 먼저 주어진 시를 면밀히 연구해야 한다. 어디에 강약을 두어야 하는지, 목소리의 높낮이를 어디서 강화하고 낮추어야하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 첫 번째 절에서 구두점이 있었던 곳이 다른 절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디에 논리적 강세가 있는지를 살펴 노래할 때 충분히 강조하여야 한다. 정확한 발성 표현과 적합한 몸짓 언어는 필수 조건이다. 가수는 연주를 악보에 적혀 있지 않은 보물을 발견하여 적합한 곳에 덧붙이는 기술로 이해해야 한다. 다음의 한 일화는 위의 설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1815년 젊은 배우이자 가수인 게나스트 (Eduard Genast)가 라이하르트가 곡을 붙인 괴테의 "사냥꾼의 저녁 노래" (Jägers Abendlied)를 괴테 집에서 노래하였다:
괴테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덮으면서 앉아 있었다. 리트가 끝날 즈음에 일어나 소리쳤다: 당신은 그 노래를 잘못 불렀다. 그리고 나서 방안을 서성였다...: 첫 번째 절은 세 번째 절처럼 힘있게 노래해야하오. 두 번째와 네 번째는 약하게; 왜냐하면 거기에는 다른 감정이 들어오기 때문에. 보시오 (그는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 다람! 다람! 다람! 다람! 그는 양팔로 움직이면서 빠르기를 지적하였고 다람하면서 깊은 목소리로 노래하였다. 나는 이제야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고, 그의 요구에 따라 노래를 다시 하였다. 그는 만족하였고 말했다. 이제 좋아졌소. 어떻게 유절 리트를 연주해야 하는지 점점 명확하게 깨닫는 것 같구려.7)
작곡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연주 지시어로 빠르기만 적어 놓았다. 가사에 따라 달라지는 실제 표현은 가수에게 맡겨 놓았다. 단지 표현이 모호할 경우에만 상세한 지시를 해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점점 연주지시를 상세히 해 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표적인 작곡가가 라이하르트다. 그의 지시어들을 살펴보자: Innigst zärtlich und langsam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애정으로 그리고 느리게), Männlich froh (남자답게 쾌활한), Fröhlich fröhlich (매우 즐겁게), Sanft schwermüthig und edel (부드럽게 우울하고 고상하게), sanft klagend und nicht zu langsam (부드럽게 흐느끼듯이 그리고 너무 느리지 않게), sanft wiegend (부드럽게 흔들리듯이), mit herzlicher Sehnsucht und lebhaft (간절한 그리움을 가지고 그리고 생기있게). 이런 지시어들은 18세기 후엽 독일을 휩쓸었던 감상주의를 반영하고 전 낭만주의를 예감케 한다. 18세기 후엽 리트의 특징적인 표현들은 슈베르트 리트처럼 음악적 재료들의 형상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주에 의해서 결정된다. 리트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이 연주의 임무였다. 이러한 맥락에서만이 위의 연주 지시어들이 이해될 수 있다.
다. 18세기 리트의 성격
ㄱ. '작품 (Opus)'
18세기 리트에 관한 문헌에서, 예술 가곡의 개념이 부적절하게 사용될 때가 많다. 사실상 Kunstlied란 용어는 19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음악사에서 사용되기 시작한다.8) 민요에 대립되는 차원 높은 예술적 창조물을 지칭하는 18세기 용어들은 Ode, Gesang 혹은 단순히 리트라고 불렀다. 또한 음악 장르의 위계 구조에서 민요를 제외하고 최하위로 간주되던 리트를 예술적 야심을 가지고 만들려고 한 경우는 18세기에는 거의 없다. 리트는 완성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 (Opus)'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선물 (Geschenk)'의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18세기 가곡집의 제목에 빈번히 등장하는 für (위하여)라는 전치사는 이러한 사고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리트사에서 opus 표시의 등장 시기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예술 가곡으로의 전환 과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18세기에 나왔던 수많은 리트 모음집에서 작품 번호가 발견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1742년에서 1814년까지 발간된 약 1200개의 리트 모음집의 대부분이 단일 작품으로 출판되지 않았다. 리트는 일반적으로 여러 개를 함께 모아, Sammlung (모음집)이나 Abtheilung (편(篇)), Theil (부분), Heft (분책(分冊)), Fortsetzung (연결편) 등의 명칭을 달고 출판되었다. 리트는 독립된 작품 번호를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789년경부터 작품 번호를 단 리트 모음집들이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작곡가의 의사가 아니라 출판사에 의해서 붙여졌다. 출판 연도가 명시되지 않았을 경우, 작품 번호에 근거하여 날짜를 매기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연대기적 표시로서가 아니라 작품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작품 번호의 출현 시기가 우리의 논의에 더 중요하다. 이것은 각 작곡가들이 리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이든의 경우, 49개 리트들이 작품 번호 없이 함께 출판되었다. 리트 작곡은 그에게는 별로 중요성을 가지지 못하였다. 하이든 자신이 대부분 직접 정리한 "Entwurf-Katalog (초안 카탈로그)"에는 리트가 빠져있다. 리트는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명백히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783년 하이든의 리트에 대해 상당히 신랄한 비평이 실렸다. "하이든의 이 리트들은 별로 가치가 없다. 아마도 그는 리트를 통해서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는 의도보다는, 음악 애호가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려고만 했지 않았나 싶다. 어느 누구도, 하이든씨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 리트들을 더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9)
모차르트의 경우, 그가 죽은 뒤인 1799년 경 "Sämtliche Lieder und Gesänge beym Fortepiano"가 op. CCLIII를 달고 베를린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번호는 모차르트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다. 그의 31개 독창 리트 중 생전에 출판된 것은 5개뿐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리트의 향방에 관해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리트들 대부분이 선사한 사람들에게로 흩어졌다. 그의 리트는 때때로 친구들을 위해서나, 다른 사교적 목적을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체계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베토벤의 총 67개의 리트 중에서 39개가 작품 번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Opferlied" "Bundeslied" "Sechs Gesänge op. 75"를 제외하고는 모차르트의 경우처럼 출판업자들이 첨가한 것이다. 베토벤은 피아노 3중주 Eb 단조에 최초로 자신의 작품 번호를 부여하였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모두 리트적 요소를 중요하게 수용하였지만, 리트 장르 자체는 최하위 급으로 평가하였다. 18세기 후엽에 나온 리트 관련 글들은, "Klein (작은)" "Unbedeutend (중요하지 않은)" "Kunstlos (소박한)" 등의 수식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당시 작은 것을 선호하는 시대 풍조가 문화계 전반을 휩쓸었다. 책, 의상 액세서리, 소지품 등에서 극도로 작은 크기의 물건들이 선호되었다. 리트에 대한 선호도 이러한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리트는 중산층이 많이 읽었던 조그만 소책자의 부록으로 자주 발간되었고, 단순한 즐거움을 주는 대상 정도로만 평가되었다. 당시 거장들은 리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리트만으로 꾸며진 연주회는 더더구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리트 비평은 리트를 "Werk (작품)"가 아니라 작다는 뜻의 접미사 chen을 붙여서 "Werkchen"으로 항상 지칭하곤 하였다. 리트를 경시하는 이러한 용어 사용은 슈베르트 때까지도 계속된다. 많은 리트 모음집이 그들의 제목 속에서 이런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리트보다 더 단순한 것은 민요밖에 없었다. 리트에 대한 낮은 평가는 리트 작곡가들 자신에게서도 흔히 발견되는 태도였다. 18세기에 나온 리트집의 서문에서, 자신의 리트가 예술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여가 선용의 즐거움을 주기 위한 심심풀이로 만들어졌기에 그 낮은 예술성에 대해 관용을 바란다는 구절이 자주 발견된다.
한편 작곡가들의 이런 태도와 대조되게, 시인들은 처음부터 리트를 높이 평가하였다. 사실상 이 단어에 지금과 같은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은 시인들이었다. 괴테는 "사람은 적어도 매일 리트 하나는 들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리트는 기념첩 (Stammbuch)이나 시 선집을 통해 선전되고, 전파되고 번성하였다. 이런 리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음악계에도 영향을 미쳐 리트의 위상이 높여지는데 기여한다. 용어의 가치 절상은 그 장르에 대한 평가와 직접 연관된다. 리트의 예술성을 인정하는 사고는 음악이 아니라 문학에서 처음 시작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작곡가적 입장에서, 리트의 완전한 작품성을 인정하는 사고는 슈베르트에서 시작한다. 그는 리트에 최초로 작품 번호를 부여하였다. 이것은 긴 숙고 끝의 선택이었다. 1814년 슈베르트는 괴테의 시에 붙인 첫 번째 리트 "물레 앞의 그레첸 (Gretchen am Spinnrad)"를 만들었다. 1815년 "마왕 (Erlkönig)"이 만들어졌다. 당시 그는 이미 147개의 리트를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1818년 위 두개의 괴테 리트는 다른 세 개의 리트와 함께 인쇄되었지만, 괴테의 헌정 거절, 출판사의 거절 등으로 출판되지 못했다. 마침내 1821년 그레첸과 마왕이 슈베르트 자신의 의사로 op. 1과 op. 2를 달고 출판되었다. 당시 그는 6개의 심포니, 12개의 4중주, 피아노 소나타, 미사곡, 오페라 등을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곡가의 이름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으로 리트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는 의외의 일이었다. 동시대인들은 이 시도를 새로움 자체로서 받아들였다. 1822년의 한 비평에서, "슈베르트의 리트들은 천재의 걸작품의 수준에 적합한, 떨어진 취미를 다시 회복하고자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자신들을 고양시켰다."10) 우리가 지금 예술 가곡이라고 부르는 것이 탄생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는 새로운 것이었다. 이론가들은 여기에 리트라는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기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ㄴ. 선물(膳物, Geschenk)
지금까지 살펴 본 바로는, 슈베르트 이전의 리트는 음악적 표현과 형상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는 작업이 필요한 예술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이나 계층, 모임을 위한 선물적 성격으로 만들어졌다. 사실상 작품 개념과 선물 개념은 엄격히 반대 개념은 아니다. 높은 수준의 예술 작품도 선물로 고려되어 '위하여' 라는 전치사를 달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후엽의 리트는 항상 두 번째 입장이 우세하였다. 리트는 특히 무엇을 위해 봉사하여야 했다. 그 목적은 항상 예술 외적인 것이었다.
당시 리트 모음집들의 제목을 개관하여 보면 리트의 선물적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많은 경우 간접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꽃다발 (Blumenstrauß), 꽃 채집(Blumenlese), 화환 (Blumenkranz) 등이 제일 빈번하게 사용되는 명칭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음악을 사랑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 ' 신년 선물' 등이다. 또한 "für (위하여)"란 전치사가 자주 발견된다. 아울러 모든 종류의 "애호가 (Liebhaber)"란 단어도 자주 보인다. 반면에 전문가 층을 겨냥하는 제목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다. 당시 기악 작품집에서는 "전문가 (Kenner)"와 "애호가 (Liebhaber)"를 한 벌로 묶는 쓰임새가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기악곡과 연관되는 리트의 경우에는 전문가 층을 대상으로 하는 제목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Gesänge beim Clavier Für Kenner und Liebhaber"같은 것들이 있다. 간혹 리트집 서문에 전문가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을 만족시키는 리트를 만들고자 하는 작곡가들은 드물었다. 전문가를 향한 사과 문구는 리트집 서문에서 흔히 발견된다. 1800년 경에 들어서야 서서히 리트에 대한 요구 수준이 변화되는 징후들이 발견된다. 즉 전문가들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이 요구되었다.
18세기 후엽에 만들어진 리트는 우선적으로 아마추어 애호가를 위한 것이었다. 아마추어들의 가정 속에서 실질적인 뿌리를 내렸다. 리트의 이상적인 목적지는 연주회장이 아니라, 중산계층의 집이라는 개인적 영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리트의 전형적인 선물 성격을 강조한다. 리트 음악은 일반적으로 가정음악으로 불렸다.
가정 모임에서 리트는 독주로 울려지거나,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나 친구들의 사교모임을 아름답게 하였다. 또한 아이들의 작은 모임, 소녀들의 모임에서 즐겁게 불려졌다. 이러한 모임에는 감상적인 노래, 모험 가득한 로맨스 (Romanze), 재치 있는 쿠프fp (Couplet), 아리아의 카바티네 (Cavatine), 변주곡 등 실질적으로 모든 종류의 노래들이 불려졌다. 영리한 가수가 청중의 요구를 잘 알아차려 이런 노래들을 매번 공급할 줄 알았다.11)
가정음악이라고 해서 리트 연주가 집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름에는 넓은 대지로 장소가 옮겨졌다. 리트는 야외에서, 춤 출 때, 산책할 때, 세레나데로, 노젓기 할 때 등 다양한 장소에서 연주되었다. 반주도 하프, 기타, 관악기로 반주되거나, 아니면 아예 반주 없이 불려졌다. 리트의 연주회 공연 형태는 18세기 후반에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아주 드물었다.
리트 유형은 특정 노래 모임과 청자 그룹에 상응하고, 다시 이것은 리트의 선물적 특성을 특징 지운다. 리트의 '무엇에' 라는 기능에 주목하여 보자. 첫째, 리트는 여가 선용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호되었다. 여기에는 지루함을 없애려고 하는 이들과, 반대로 일상의 일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내용의 리트가 속한다. 두 번째, 리트는 개인의 교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이 유형에 속한 리트는 소시민적 생활 내용과 이상을 반영한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지, 어떻게 됐으면 좋겠는지 등에 대해서 노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인생의 감사할만한 모든 상황을 노래하는 각계 각층 사람들을 위한 리트들이 포함된다. 사람들은 이런 리트를 듣고 부르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재발견하여 행복을 찾는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리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노래되었기에 더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리트로 완성시켰다. 현대에는 당시 리트의 원래 의도, 즉 실제 생활에 필요해서 만들어진 배경이 대부분 간과되고 있다.
세 번째, 사회의 고양과 교육을 위한 수단으로서 리트가 사용된다. 이 유형에 속하는 노래들은 두 번째 유형을 확장한 것으로서, 자신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개인들의 교화를 위해서 쓰여졌다. 사람들은 노래 속에서 공통의 목적, 사고, 표어 등을 토로한다. 이러한 리트는 예술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한 공동체의 정서를 파악하여 같이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이 기대되었다. 여기에는 기독교 교화 노래, 학교 노래, 학생 노래, 또한 군인들의 노래 등이 속한다. 무엇보다도 18세기 후엽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수많은 비밀결사단 리트이다. 이런 리트의 '우리'를 강조하는 특성은 하나의 공동체를 노래로 연합하게 한다. 또한 교육적인 의도에서 새로운 사고를 주입시키는 것을 돕는 기능도 하였다.
18세기말부터 리트 모음집의 제목에서 "위하여"나 "무엇에" 같은 규정어가 점차 사라진다. 리트는 클라비어 리트, 클라비어에서 부르는 리트와 오드, 아니면 단순히 리더라고 하는 둥 중립적인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런 표현의 변화는 리트의 내적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리트집에서는 특정 시인의 이름이 명명되고, 그들의 시가 리트로 만들어졌다고 소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리트는 청자에게, 예술적인 면에서 고려되어지기를 원했다. 언어적 텍스트와 음악적 처리와 관계, 특별히 시인과 작곡가와의 관계가 리트의 성격을 결정하는 리트집이 증가하였다. 이런 리트집들은 예술가곡을 향한 길을 예비하였다.
시인과 작곡가간의 적절한 관계의 조절을 통하여 작품으로서의 리트, 예술 가곡으로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왜냐하면, 리트로부터 무엇이 나올 수 있느냐는 이들의 개인적 관계에 달렸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슈베르트 식의 예술 가곡의 유형을 구성하고, 18세기 후엽의 다양한 발전 단계 속에서 이미 마련되었던 개별적 계기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4. 예술가곡으로의 전환
가. 통절작곡 (Durchcomponieren)
통절 작곡법이 리트에 도입되었을 때 그 작곡 원리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오페라와 칸타타 등에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트 분야에서 이 작곡 원리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80년 경 즈음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발라드에 곡을 붙일 때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되었다. 통절 작곡법은 그 원리보다는 용어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다. 18세기 음악 사전에서 이 용어는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1769년 "일반 독일 도서관" ( Allgemeine deutsche Bibliothek) 이란 잡지에서 통절 작곡에 관한 논의가 처음으로 발견된다. 1792년에는 요한 브란들 (Johann Brandl)이라는 작곡가가 "durchaus im Musik gesetzt"라고 제목을 단 리트집을 첫 번째로 출판하였다. 1802년에 H. C. Koch가 자신의 사전에서 관심을 가지고 논의하였지만, 통절 작곡이란 용어는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 1814년 "일반 음악 신문"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의 한 리트 평론에서 durchcomponirt, durchcomponiren이란 표현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12)
"통절작곡"은 18세기 후엽에 무엇을 의미하였을까, 당시는 이 새로운 원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크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통절형식으로 작곡된 리트는 리트라고 불리기보다는, Ode, Canzonette, Gesang이라고 지칭되었다. 모든 시가 유절 형식에 적합한 것은 아니기에, 이 형식에 적합한 손질이 필요하게 된다. 이런 손질은 시를 손상시키기 쉽다. 이런 경우, 작곡가들은 통절 작곡의 충동을 느낀다. 유절 형식의 리트에는 적합치 않은 시라도, 통절 형식을 취하면 작곡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 슈베르트의 통절 가곡들은 당시 리트로 분류되지 않았다. 그의 노래들을 그냥 리트라고 지칭하는 것은 동시대인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1824년의 "일반 음악 신문"의 한 평론은 "슈베르트씨는 사실상 리트를 쓴 것이 아니고 앞으로도 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카프리체 (Caprice)나 판타지 (Phantasie)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스런 노래들을 작곡한다"고 평하였다.
두 번째, 통절 작곡은 많을 절을 가진 긴 시에 하나 이상의 선율을 만드는 방법을 의미하였다. 1722년에 마테존은 이미 유절형식 리트에 반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하나의 선율이 서로 다른 가사들에 그렇게 많이 불려지는 것을 듣는 것은 몰상식한 바보나 하는 일이다." 음악적으로 절제하는 유절 작곡은, 6내지 8절을 넘게 되면 필연적으로 냉랭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18세기에 나온 시 중에 20개 이상의 절을 가진 발라드가 드물지 않다. 29개의 절을 가진 뷔르거의 발라드 "레노레 (Lenore)"는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유절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사실상 양자 택일의 선택이 있는데, 발라드를 완전히 낭독으로 여기거나, 통절작곡의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가수는 자극적으로 흥분시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신의 격렬한 내적 감정을 가지고 노래한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실제 경험으로 느낀다. 청자는 그 내용을 들으면서 내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그 속에 몰입한다. 변함없이 반복되는 음악은 그냥 흘려듣는다. 이런 협력관계에서 20내지 30절을 부르는 것은 가수에게나, 청자에게나 전혀 문제가 안되었다. 크라우제 이후로 작곡가들은 매우 긴 오드의 경우에는 하나 이상의 선율을 만들도록 권고하였다. 리트 평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유절 형식을 지지되었다. 다만 많은 절을 가진 발라드나 로만제 (Romanze)의 경우에는 우선적으로 통절 작곡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것조차도 거부하였다.
세 번째, 통절 작곡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가사를 따라 작곡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보다 좀 더 깊은 의미가 더해졌다. 통절 작곡을 통해 작곡가는 주(主)정조 외에 다양한 표현의 영역을 음악적으로 마음껏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유절형식 리트가 가사의 모든 다양성에 적합하기 위해 가능한 단순하고 보편적이어야 한 반면, 통절 형식 리트는 작곡가에게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마지막으로 통절 작곡은 유절 리트의 정적인 음악성에 반대되는 역동적인 원리이다. 유절 리트는 선율이 계속 반복되기에, 음악적으로 아무런 발전도 없다. 이렇게 지속적인 유절 형태는 통일된 정서로 울리는데 적합하였다. 유절 리트는 모든 정조를 지속적으로 현재화하면서 머물게 한다. 이에 반해 통절 작곡은 다른 목표가 있다. 음악이 발전하며 필연적으로 극화된다. 극적 연주회와 오페라 아리아는 통절 리트가 그 뿌리를 둔 장르이다. 18세기 리트 미학은 유절 원리에 우선권을 주었다. 장르의 순수성이란 미적 사고를 근거로 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유절 리트의 빈약한 음악적 유형에 의식적으로 자신을 제한하였다.
나. 예술가곡의 구성 요인들
예술 가곡을 구성하는 요인들을 열거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예술 가곡은 개개의 계기들을 종합한다고 해서 항상 속시원하게 진상이 밝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준 높은 시 혹은 세세하게 가사의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는 통절 작곡으로 된 작품 속에서 예술가곡을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의도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개별 계기들이 충족되어지는 경우도 있다. 리트 분석은 각각의 결과를 나타나게 하는 의도 즉 진정한 목적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의 요인들은 예술 가곡으로의 전환 과정을 이해하는 하는 방편일 뿐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항목별로 분류하여 논의함으로서 그 과정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는 있다.
ㄱ. 시의 선택
18세기에는 리트를 20-30개를 하나로 묶어서 하나로 파악하였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예외적으로 알마낙, 신문, 타쉔부흐에서 개별적으로 인쇄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작품이라기 보다는 부록(附錄)으로서 이었다. 1800년경부터 모음집보다는 단독의 리트를 출판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양 대신에 질이 중요시되었다. 여러 개의 리트를 같이 묶어 출판하는 것은 계속되었지만, 점점 농축된 작품성을 추구하는 양상이 우세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모음집으로부터, 내적인 예술적 연관성에 따라 형상화된 결과물인 연가곡이 생겨났다. 이 새로운 장르는 베토벤의 1816년 "멀리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An die ferne Geliebte)"와 슈베르트의 1823년의 "아름다운 물방아간의 처녀(Die schöne Müllerin)"으로 시작되었다.
진정한 예술가곡의 형성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는 개별 리트가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인정되는 추세와 함께, 질적으로 높은 시를 선택하는 선별성이다. 역사적으로 예술 가곡이 시의 성격에 의해서 규정되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록 통절 작곡의 향상된 음악적 수단을 통해서 다양한 종류의 시를 음악화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류시도 예술작품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 가곡은 클롭슈톡과 괴테의 지식, 정조, 경험을 농축시킨 높은 수준의 시와 함께 탄생하였다. 이들 시의 높은 수준과 개별성은 이에 상응하는 심도 깊은 음악적 형상화를 필요로 하였다. 클롭슈톡과 괴테의 시는 예술가곡의 창작 욕구에 불을 붙였다. 그들의 시는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어려움이 작곡가들에게 다가왔다. 작곡가는 이제 더 이상 여태까지 처럼 단순한 선율 작곡가로 남아있을 수도 없었고 또 원치도 않았다. 완벽한 형상화와 다양한 표현의 시에 상응하는 창조적 대응물을 만들어내기 원했다. 빈약한 내용의 가벼운 시에서는 그냥 듣기 유쾌한 정도의 선율로 노래부르기 좋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사가 풍부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고, 감정의 많은 양상들을 볼 수 있게 하고, 음악과 시와의 진정한 연합을 추구하는 작품들에서는 작곡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였다.
글룩은 오직 클롭슈톡의 시만을 리트로 만들었다. 하이든은 독일 리트보다는 영어 가사의 노래에 좋은 결과를 남겼고, 모차르트는 좀더 일찍 좋은 시를 소개받는 자극이 있었더라면 걸작을 남겼을 것이 틀림없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의 리트 가사의 선택은 어떤 문학적 고려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가능성은 괴테의 "제비꽃 (Veilchen)"에서 나타났다. 이것은 모차르트의 몇 안 되는 괴테 노래인데 그 독창성이나 통절 작곡을 통한 그림을 그리는 듯한 뛰어난 표현성은 예술 가곡의 전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베토벤 역시 괴테의 시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아 음악으로 옮기고 싶어했다. 1810년에 베토벤은 베티나 브렌따노 (Bettina Brentano)에게 괴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나는 괴테의 시를 읽고 감동 받았고 또 작곡을 하도록 자극 받았다. 이것은 마치 높은 질서의 영적 존재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 같다. 조화의 비밀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13)
슈베르트의 가사 선택은 여러 시인을 거쳐 쉴러와 괴테로 이끌어졌다. 그의 최초의 리트집은 1816년에 괴테에게 헌정 되었다. 처음 두 작품은 전적으로 괴테의 시에 붙여진 것이었다. 괴테는 응답하지 않았다. 1821년 400개에 달하는 리트 중에서 선택된 최초의 슈베르트 리트가 출판되었을 때, op. 1에서 op. 3, no. 4까지의 가사는 괴테의 것이었다. 이 리트들을 예술 가곡으로 승화시킨 것은 시인에 의해서 말해지고 시속에서 형상화된 것을 "음악으로 만들어 낸" 친화성이다. 시인의 의도를 잘 알고 작품으로 만들어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라이하르트가 아니라, 시인과 그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했던 슈베르트에게서 괴테의 시가 진정한 동반자를 만났다. 시의 선택은 이미 작곡가의 시적 취향을 증명하여 준다. 그러나 그 시적 걸작을 파악하고 음악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작곡가의 천재성이 예술가곡을 탄생케 한다.
ㄴ. 선율
레시타티보, 극적이고 오페라 적인 어법, 음역의 확장, 반음계적 특성 같이 명확히 보이는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곡만의 특수한 선율이란 것은 없다. 그러나 18세기 후엽부터 두드러진 새로운 특징들이 있다. 예술 가곡의 선율은 예술적 필요성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이 필연성은 때에 따라 시에서 파생된다.
마테존 시대 이후로 리트 선율의 음역이 차차 고정되어졌다. 선율이 중간 음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권장되었다. 모든 사람의 목에 편안하게 부를 수 있기 위해서였다. 1761년 마부르크에 따르면, 오드 선율은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노래될 수 있어야 했다. 따라서 음역의 범위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10도를 넘지 않아야 했다. 10도를 최악의 경우로 정한 것은 널리 퍼져 있었던 8도 규정에 비해 관대한 것이었다. 1779년 줄쩌 (Sulzer)가 편집한 백과사전에 포함된 음악 부분의 실질적인 저자였던 슐쯔 (J. A. P. Schulz)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성부의 음역을 리트에서는 너무 크게 잡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쉬워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장 좋은 것은 6도의 범위 안, 많아 봐야 8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어려운 도약이나 콜로라투라는 피해져야 한."14)
이런 규정들은 1785년 슐쯔의 리트집 Lieder im Volkston의 서문에서도 다시 발견된다. 슐쯔는 선율을 매우 노래 부르기 좋은 음정으로, 모든 목소리에 적합한 음역 안에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02년의 Koch의 사전에서도 정확한 음역을 고정시키지는 않았지만 리트 선율은 모든 사람이 특별한 예술적 훈련을 받지 않고도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가사의 이해를 우선하는 시대에는 8도 이상을 넘지 않는 중간 음역으로 제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노래한다는 것은 미리 제시된 말을 음정으로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 본 사항들이 18세기 리트 선율 형성의 원칙들이다. 이들은 보편적으로 인식되어졌고 리트 작곡가들은 이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율 음역의 암묵적인 규정이 개인적 욕구, 즉 음악을 붙이고자 하는 시에 의해 인도된 예술적 욕구에 의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가곡을 향한 결정적인 형상화 작업이 착수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6, 8, 10도와 같은 정해진 선율 영역이 단순히 바뀌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규정들을 깨뜨리는 것이 그 안에서 머무는 것만큼이나 예술적으로 절대 필요한 것으로서 존중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율들은 노래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이전의 관습을 허용하지 않았다. 예술 가곡의 선율은 각각의 시에만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선율은 시가 형성된 방식에 의해 독특하게 제한 당한다. 선율과 시는 필연적으로 결합된 통일체이다. 바로 여기에 슈베르트 리트의 특별함이 근거한다.
ㄷ. 반주
리트를 예술가곡으로 만드는 것은 많은 부분 반주의 성격에 달려있다. 초기 리트는 선율만 만들어졌고, 또 이것이 당연시 여겨졌다. 리트 이론가들도 리트를 작곡할 때 반주 없이 노래할 수 있도록 작곡할 것을 요구하였다. 반면에, 예술가곡으로의 역사적 발전은 점차적으로 반주 부분이 확장되고 예술적으로 풍부하게 조직화되는 경향과 일치한다. 3선보로 기보하는 방법의 확립, 클라비어 성부의 독립성, 텍스트를 명료하게 하는 리듬 동기적 모티브, 성부 음역의 확장, 차별화된 화성과 리듬 가능성의 활용 등이 그 특징이다.
1811년에 이미 네겔리는 "historisch-kritischen Erörterungen (역사적 비평적 설명)"이라는 글에서 슐쯔, 라이하르트, 쿤젠의 리트를 위와 같은 특성을 가진 리트 유형의 작곡가로 분류하였다. 네겔리는 비록 부분적으로 초기 리트 시학의 전통을 고수하였지만, 동시대인들의 작품 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리트 유형의 등장을 인식하였다. 슐쯔가 모든 후렴구, 간주 등을 없애버리기를 주장한 반면, 네겔리는 전주, 간주, 후주는 표현을 높이기 위한 중요한 예술적 수단으로 여겼다. 이들은 새로운 예술 가곡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악에 다른 시를 붙인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반주에 관하여, 1835년 쉴링 (Schilling) 백과사전은 작곡가가 화성화, 리듬 음형, 적절한 악기의 선택에 우선적으로 주의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18세기 후엽까지만 해도 리트의 화성은 가장 단순한 기능에 제한되었다. 리트에서 예술적으로 화성의 변화를 추구하거나 심한 전조를 통해 놀라움을 일으키는 것은 피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예술 가곡에서는 화성적 힘을 중요시한다. 구 미학관의 사람들은 슈베르트를 전조광이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리듬 음형은 슈베르트 리트를 예술가곡으로 격상시키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리트 속의 심리적 전개가 짧은 리듬 모티브를 통해서 나타나고, 동시에 라이트 모티브처럼 곡 전체에 걸쳐 사용된다.
예술 가곡은 클라비어로 반주되는 독창 가곡이다. 이에 반해 18세기는 17세기 관현악으로 반주되는 리트 전통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악기로 리트를 반주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반주 악기로 클라비어가 전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집안에서 사용 가능한 악기들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만돌린, 찌터, 기타, 하프 등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80-90년대의 클라비어의 확산에 힘입어 바뀌게 되었다. 점점 리트의 반주 악기로 클라비어를 명시하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90년대 말엽에 이르면 구체적으로 피아노포르테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한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19세기에는 리트가 예외 없이 클라비어로 반주되었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슈베르트 리트는 클라비어 파트를 빼 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의 마왕은 풍부한 음향의 망치를 두드리는 듯한 리듬으로부터 생명력을 얻고 있다. 또한 페달링이 예술적 수단으로서 더하여지고 있다. 기타나 클라비코드 같은 약한 음향으로는 이러한 것이 가능하지 않다. 이제 리트 반주의 피아니스틱한 과제는 리트를 아마추어들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였다. 슈베르트 리트의 초기 연주자들은 리스트만큼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발성 훈련은 거의 무시되었고 훈련되지 않은 목소리로 충분했지만, 이제 새로운 유형의 가수와 반주자가 필요하였다. 두 분야의 새로운 연주 방법은 동시대인들에게 예술 가곡이 완전히 새로운 리트 유형으로 비추어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ㄹ. 연주회 형식의 공연
18세기 후엽 리트는 일반적으로 중산계층의 음악 애호가에 의해 번창하였다. 이에 반해 예술 가곡은 연주회 공연을 위한 것이다. 집의 개인적 공간 혹은 세련된 살롱을 공개적이고 누구나 표를 사서 들어올 수 있는 연주회장이 대신하였다. 리트 연주 때의 청중의 능동적인 참가는 이제 점점 침묵하는 청자와 실제로 연주하는 이들로 분리되었다. 실제 연주도 높여진 단상에서 행해졌다. 여건에 따라 반주 악기도 달라지고 연주자와 청중이 같이 참여하는 이전의 즉흥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의 리트 연주는, 이제 조심스럽게 준비되고 약속된 가수와 그와 동급의 클라비어 반주자의 연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제 리트는 더 이상 여흥적인 놀이나 대화로 방해되어질 수 없었다. 청자에게는 전문가다운 예술적 판단력을 구비하는 것이 기대되었다. 리트는 더 이상 심포니나 기악 독주 사이에 낀 첨가물이 아니라, 한 연주회를 단독으로 채울 수 있는 예술 장르였다.
초기 공공 연주회에서 청중들이 연주회에 몰입하여 조용한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작품의 연주 후에 많은 담화가 오고갔다. 단순한 청취가 아니라, 실질적인 즐거움이 있었다. 대부분 슈베르트의 작품들이 처음 연주되었던 Schubertriaden에서도 이와 같은 이중적 특성이 존재하였다. 한편으로 가족적이고 즐거움 넘치는 놀이, 식사, 춤 등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몰입적인 숙연함과 주의 깊은 청취가 있었다.
연주회 성격의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각각의 계기가 19세기 초엽에 노력되어졌고, 부분적으로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일률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슈베르트, 라이하르트, 코로나 슈뢰터 (Corona Schröter), 빌헬름 에러스 (Whilhelm Ehlers), 괴테의 바이마르 서클, 슈베르트 리트 가수 미하엘 포글 (Michael Vogl_과 그의 여 제자 파우리네 밀더-하웁트만 (Pauline Milder-Hauptmann) 등이 예술 가곡의 연주회 공연화 과정에서 영향을 끼쳤다. Lesegesellschaft (독서 모임)도 가정 음악회와 공공 연주회의 중요한 중간 단계 역할을 하였다. "마왕"과 "물레 앞의 그레첸"과 함께 독일 가수들은 이태리의 벨칸토 창법에 대항하는 특수한 자신들의 창법을 개발하였다. 바로 낭송식 노래이다. 단어의 의미를 강조하는 뉘앙스와 명확한 발음을 통하여 말하는 듯한 노래가 계발되었다.
5. 나가는 말
하나의 음악 양식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음악 자체의 변화뿐만 아니라, 미학관과 같은 내적 변화도 같이 병행되어야 함이 다시 한번 밝혀졌다. 많은 이들이 18세기 리트를 19세기 예술 가곡의 전 단계, 아직 완전히 성숙되지 못한 예술 형식 정도로 평가한다. 예술적 완성도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리트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작곡가들의 역량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리트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창작 의도와 미학관이 큰 차이를 만들었다고 보는 해석이 더 타당하다.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문화 양식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음악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음악 자체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치중하여 왔다면, 최근에 들어서 이러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인간 중심으로 그 초점이 바뀌고 있다. 이에 상응하여 음악사 연구는 많은 새로운 방법론들을 수용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일률적인 음악사 구분에도 많은 반성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다. 그 결과 이전 음악사 서술에서는 무시되었던 부분들에 대한 연구가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18세기 후엽 리트도 단순히 예술 가곡의 전 단계로 지나칠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관점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사실상 18세기 후엽 리트는 문학계와 음악계가 긴밀한 연관을 맺고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19세기 예술 가곡보다 더욱 흥미롭다.
전환기 음악사에 대한 고찰은 음악학자들에게 많은 흥미로움과 자극을 주는 만큼 어려움도 크다. 2000년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지금 우리는 음악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우리뿐만 아니라 후대의 학자들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지 사뭇 궁금하다. 지금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상황들이 조금씩 설명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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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일반적으로 가곡으로 번역된다. 본고에서 앞으로 밝혀 나가겠지만, 슈베르트 이전의 리트와 이후의 예술 가곡을 같이 가곡으로 부르는데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또 가곡이란 단어는 우리 나라, 프랑스 등의 노래들에도 사용되고 있기에, 본고에서 특정하게 다루고자 하는 18세기 후엽 독일 리트의 논의를 흐리게 하는 소지가 있어 가급적 피하기로 하겠다. 한편, 19세기 Kunstlied의 경우에는 예술 가곡으로 번역하는 것에 무리가 없다 싶어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겠다.
2) 이 부분은 Heinrich W. Schwab의 Sangbarkeit, Popularität und Kunstlied를 많이 참조하였다.
3) G. Sulzer, Allgemeine Theorie der Schöne Künste, Bd III, 1779, p. 171.
4) ∪-∪∪-∪∪-,
-∪-∪∪-∪-,
∪∪-,-∪-,-∪-∪-,
-∪∪-∪∪-,-∪∪-.
Willkommen, o silberner Mond,
Schöner, stiller Gefährt der Nacht!
Du entfliehst? Eile nicht! Bleib, Gedankenfreund!
Sehet, er bleibt, das Gewölk wallte nur hin.
5) J. M. Lappenberg, ed. Briefe von und an Klopstock (Braunschweig, 1867), p. 192.
6) Krause, Von der Musikalische Poesie, p. 115.
7) F. v. Biedermann ed. Goethes Gespräche II (Leipzig, 1909-1911), p. 294.
Schwab, Sangbarkeit, Popularität und Kunstlied, p. 69 재인용.
8) 1841년 Carl Kossmaly에 의해서 최초로 사용된다. C. Kossmaly, "Über das 'Lied' im Allgemeinen, Das 'Volkslied'" in Neue Zeitschrift für Musik 8 (1841): 67.
9) C. F. Cramer, Magazin I (1783), p. 456, H. Schwab, p. 139 재인용.
10) Wiener Zeitschrift für Kunst, 1822년 3월 23일, Deutsche, Schubert Dokumente, p. 126.
11) N. Engelbrunner von d'Aubigny, Briefe an Natalie über den Gesang (Leipzig, 1803), p. 231, Schwab, p. 151 재인용.
12) Schwab, p. 55.
13) F. Rochlitz, Für Freunde der Tonkunst, VI Bd., Leipzig, 1868, p. 263.
14) G. Sulzer, Allgemeine Theorie der Schöne Künste, Bd III, 1779, p.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