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 게 재 일 : 1998년 01월 17일 11面(10版)
▶ 글 쓴 이 : 유홍준
[북한 문화유산답사기]2.대동문·연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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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변과 모란봉 일대의 많은 유적중 대 (臺) 는 을밀대, 누 (樓) 는
부벽루가 압권이라면 정 (亭) 은 연광정 (鍊光亭) , 문 (門) 은 대동문
(大同門) 을 꼽을 것이다.
더욱이 연광정은 관서 (關西) 8경의 하나로 이름을 얻었고, 대동문은 평
양성의 정문이니 그 명성이 평양의 울타리를 훨씬 넘는다.
연광정과 대동문은 바로 붙어 있다.
평양 내성 (內城) 의 동쪽 대문이 대동문이고, 동쪽 장대 (將臺)가 연광
정이다.
모두 6세기 중엽 고구려 때 처음 세운 것으로 1011년 거란 침입 때 불타
다시 축조하고 또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재건했는데 용케도 6.25전쟁을 견
뎌냈다.
그런 시련과 풍파를 헤집고 버텨온 인고 (忍苦) 의 유적이다.
김일성 광장에서 민속박물관을 끼고 돌면 바로 대동강변 산책길이 나온다.
강변엔 해묵은 가로수가 짙게 그늘을 만들어 한낮인데도 어둠이 느껴진다.
문자 그대로 녹음 (綠陰) 이 장관인데 왠지 길이 눈에 익어 가만히 생각
해 보니, 텔레비전의 '남북의 창' '북한은 지금' 같은 프로에서 대동강
변 풍경으로 비친 것이 대개 여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동문은 우리나라 여느 성문과 마찬가지로 반월형 무지개문을 낸 석축
위에 목조건축의 누각을 얹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워낙 국방상 요충인지라 축대 위 성벽에나 설치하는 성
가퀴 (女墻) 를 두르고 쏘는 구멍까지 내 전시 대비체제를 갖춰 놓은 점
이다.
나는 우선 대동문 정면을 보고 싶었다.
출입문에 앞뒤가 있겠느냐 싶지만 문의 정면이란 대동강 쪽에서 바라보
는 모습이다.
옛날 김홍도 (金弘道)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평안감사 능라도 연회
도' 를 보면 대동문에 대동문.대동문.대동문 하고 세번이나 현판을 그려
넣은 것이 퍽 인상적이어서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돼 있었다.
하나는 무지개문 머릿돌에 음각으로 새겼고, 문루 1층엔 희대의 낭만적
묵객 (墨客) 이었다는 봉래 (蓬萊) 양사언 (楊士彦) 의 그 활달한 초서
현판이, 그리고 2층엔 청나라와의 전쟁때 첩보작전에 능했다는 평안감사
박엽 (朴燁) 이 쓴 방정한 해서 (楷書) 현판이 걸려 있다.
상상하건대 대동강 저 아래쪽 배다리 (船橋)에서 내린 사람은 반드시 이
문을 바라보고 곧장 올라와야 평양 입성이 가능한데, 성문을 빠져 나가도
록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대동문.대동문.대동문을 보면서 지나가게끔 돼
있는 것이다.
권위를 갖자는 것이고, 겁도 주자는 뜻이리라. 문루는 겹처마 팔각 2층집
으로 내부엔 통기둥을 세워 시원히 터놓고 전면에 마루를 깔았다.
볼수록 당당하고, 볼수록 기품있는 성문이란 인상이 남게 된다.
건물 표정의 디테일을 살피자니 용마루 끝의 독수리 머리 (鷲頭) 와 추
녀 위의 용머리 (龍頭) 조각이 빼어난 솜씨인데 추녀 마구리에 끼워 넣
은 새머리 (吐首) 는 아주 드문 천하 명품이었다.
대동문에 맞붙어 있는 연광정의 원래 이름은 산수정 (山水亭)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름이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했는지 온갖 풍광이 고루 비친다
는 뜻으로 만화정 (萬和亭) 이라고 했다가, 대동강 물결에 햇살이 아른거
리는 모습을 이끌어 연광정이라 이름지은 것이 오늘에 이른다.
연광정에는 이런저런 현판과 주련 (柱聯) 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거기엔 김황원 (金黃元) 의 미완성 시구도 있고, 군말없이 '제일누대 (第
一樓臺)' 라고 쓴 것도 있다.
그중 눈길이 가는 사연 깊은 현판은 '천하제일강산 (天下第一江山)' 이었
다.
이 현판의 내력은 이중환 (李重煥) 의 '택리지' 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림과 글씨로 이름이 높았던 명나라의 주지번 (朱之蕃) 이 어느해 조선
에 사신으로 와 연광정에 올랐는데 그 풍광에 놀라 무릎을 치며 '천하제
일강산' 이라고 큰소리로 외치고는 제 손으로 현판을 써서 걸어 놓았다
는 것이다.
그후 병자호란때 조선을 쳐들어와 인조에게 항복을 받고 돌아가던 청나라
황제가 여기에 들렀다가 중국에도 명승이 있는데 어찌 여기가 천하제일
일 수 있느냐고 그 현판을 부숴버리게 했단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풍광도 아름답거니와 글씨 또한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지라 청 황제는 '천하' 두 글자만 톱질해 없애도록 했다는 것
이다.
그래서 한동안 '제일강산' 이라고 붙어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누가 다
시 '천하' 두 글자를 새겨 넣어 지금은 또다시 '천하제일강산' 이 걸려
있다.
그래서 '천하' 두 글자는 글씨체가 약간 다른 것을 단박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 기질을 이어 받은 평양 사람의 자존심을 반영하는 것이 아
닐까. 연광정은 정자의 규모가 아주 크고 특이하다.
처음엔 정면 3간.측면 3간의 30평 남짓한 정자를 강과 마주해 지었는데,
1573년에 스무평 남짓한 긴 네모꼴 정자 또 한채를 기역자로 모서리를 맞
춰 잇대어 지었다.
증축할 요량이면 옆으로 이어 붙일 수 있겠건만 꺾어 붙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 멋을 위함일까. 아닌게아니라 연광정 건물엔 멋이 많이 들
어 있다.
본채의 11개 기둥은 흘림기둥인데, 꺾인 채는 9개의 네모기둥이다.
즉 확연한 변화가 읽혀진다.
누정을 강변 덕바위 위에 앉히자니 수평고름을 해야만 했는데, 동쪽엔 굵
은 나무기둥을, 서쪽엔 4각 돌기둥을 받쳐 수평을 잡고 마루 둘레엔 모
두 닭다리 모양의 난간 (鷄子脚欄干) 을 둘렀다.
즉 변화 속의 통일을 준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멋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뭔가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사위를 살피는데 인민학교 (초등학교) 여학생 셋이 뛰
어올라 태권도를 한다.
신기하게도 동작 매듭마다 칼바람 소리를 "쉭, 쉭" 내면서 날카롭게 기합
을 넣는다.
시범이 끝나자 박수를 치며 이름.학교.학년까지 다 물어 노트에 적으니
키 큰 애가 작은 애를 가리키며 한마디 한다.
"얘가 우리반 줄반장이랍니다.
" "아, 그래, 공부 잘 하는가 보지. 그러면 너는 무얼 맡았니?" "저는 학
급반장입니다.
" 고 녀석 자기가 반장인 걸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애들은 어디나 똑같나 보다.
이제 됐다고 가라고 하니 애들은 빨리 곁채로 뛰어갔다.
연광정 본채 마루에 앉아 닭다리 난간에 기대어 대동강을 바라보니 강물
에 햇살이 바서지며 영롱한 빛을 발한다.
강 건너 동네에는 고층 살림집 (아파트) 들이 점점이 이어간다.
그러고 보니 연광정이 뛰어난 것은 건물보다 자리앉음새 (로케이션) 였
다.
대동강 건너 대동문으로 평양에 입성하자마자 다리도 쉴 겸 풍광도 즐김
겸 쉬어가는 곳이 이 연광정이었던 것이다.
1백년전 평양에 온 비숍 여사가 '거대한 뿌리' 에서 대동강 물장수들이
연방 물지게를 지고 대동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야만스럽게 묘사한 것
도 여기서 본 것이고, 그 물장수를 보고 장사할 생각을 한 봉이 김선달
도 이 '연광정 출신' 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연광정은 항시 사람들로 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어른이고, 아랫것이고 나리님이고, 평양사람이고 외지사람이고 가
릴 것 없이. 그래서 필시 증축해야 될 판이었는데 그 탁월한 건축가가 곁
채를 기역자로 붙이는 방식으로 공간을 처리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공간은 효율적으로 분할되고, 건물은 더욱 운치를 갖게 되고,
사용자는 저마다의 공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돌려 곁채쪽을 바라보니 우리가 밀어낸 인민학교
여학생들은 거기서 칼바람 소리를 날리며 태권도를 하고 있고, 그 한쪽
모서리엔 아까부터 우리쪽을 피해다니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후예 한쌍이
기둥에 몸을 바싹 붙이고 강물에 바스러지는 햇살을 헤아리고 있었다.
글.유홍준 (영남대교수.박물관장)
중앙일보
▶ 게 재 일 : 1998년 01월 21일 11面(10版)
▶ 글 쓴 이 : 유흥준
[북한문화유산답사기]3.보통문…戰禍도 비켜간 '평양의 神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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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현대도시로 바뀌는 과정에서 오직 남대문과 동대문이 남아 있어
옛 한양성의 자취를 엿보게 하듯이, 평양에는 대동문 (大同門) 과 보통
문 (普通門) 이 그 옛날의 평양성을 지키고 있다.
옛글에 따르면 남쪽에서 오는 이는 대동문을 거쳐 보통문으로 나가고, 서
쪽에서 올라오는 이는 보통문을 지나 대동문에 이른다고 했다.
둘 다 평양성의 정문이다.
그런데 대동문이 대동강변에 있듯이 보통문은 보통강변에 있다.
평양은 이처럼 강으로 둘러싸인 도시다.
그래서 평양은 풍수지리적으로 말해 배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사벨라 비숍은 대동강물을 연방 길어 올리는 물장수를 보면서 왜 우물
을 파지 않고 강물을 길어 먹는지 이상했단다.
그래서 알아본즉, 평양은 배모양이므로 우물을 파면 배가 가라앉게 돼 나
라에서 금지시켰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미신의 위력이 놀랍고도 한심스러
웠다고 통탄했다.
그러나 풍수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평양과 같은 퇴적암의 지세에서는 물에 장기 (장氣 : 축축하고 더운 땅에
서 생기는 독기)가 있어 식용수로 부적합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자
는 수만 가구가 우물을 팔 경우 지반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막
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느 이유든 옛 조상들이 한 일인데 어련히 잘 알아서 했을라고. 평양도
한 시대, 한 나라의 수도였는데 그곳의 군사적.정치적.생활적 측면이 왜
고려되지 않았겠고, 그 지세의 여러 허점을 또 여러 방법으로 보완하지
않았겠는가.
그 보완책의 하나가 성 (城) 의 배치였다.
평양이 천연의 요새이긴 했지만 그 방위의 기본이 강줄기고 산이 아닌지
라 이를 보강함이 평양성의 기본계획이 됐음은 설명 없이도 짐작할 수 있
는데, 실제로 고구려 시대부터 평양성은 내성 (內城).외성 (外城).중성
(中城).북성 (北城) 등 겹겹이 4개의 성으로 둘러싸였다.
북성은 군대가 주둔하고, 내성은 관아가 들어있었고, 중성.외성엔 민가
가 자리잡았는데 그 중성의 서쪽 대문이 보통문인 것이다.
보통문은 이처럼 산과 강이 마주 보는 자리에 있어 그 주변 풍광이 참으
로 곱다.
그래서 일찍이 평양 8경의 하나로 꼽혀 왔다.
보통문은 예로부터 신문 (神門) 이라고 불렸다.
임진왜란 중 평양성 탈환작전 때 불화살 (火箭) 이문에 어지러울 정도로
날아들었으나 끝내 불에 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때부터 귀신 같은 문
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지세 덕이었는가, 보통문의 사주팔자였던가.
그로부터 3백50년 뒤 6.25동란 때 평양은 폭격을 심하게 당해 전쟁이 끝
났을 때 시내에 온전한 건물이 딱 두채 뿐이었다고 하는데, 그 하나는 은
행건물이고 또 하나는 이 보통문이었단다.
신문은 신문인 셈이다.
6.25동란 뒤 1960년대초, 평양시에 새로운 거리를 설계하면서 보통문은
평양 구시가와 서쪽의 신시가를 잇는 중심에 놓이게 됐다.
보통문을 로터리 정원으로 해 천리마거리.창광거리.보통문거리를 동.남.
북으로 곧게 내고, 보통문이 마주 보고 있는 보통강엔 보통교를 놓았다.
나는 보통문에 당도했을 때 반가움에 들떠 길을 뛰어 건너다 교통안내원
에게 제지당했다.
평양에선 길을 건널 때 뛰지 못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남쪽에서 왔기 때문에 봐줬지만 본래는 서너시간 교육을 받아야 했단다.
로터리 한가운데 모셔 있는 보통문으로 들어서니 돌축대가 완전하다.
돌마다 이가 꼭 맞아 빈틈이 없는데 담쟁이덩굴이 잘 자라 그 운치와 조
화로움이 더하다.
더욱이 보통문의 축대는 수평을 맞춰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돌마다 층
을 달리 해 마치 조각보를 잇듯이, 또는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구성을 보
여주듯 아주 조화로운 변화를 이루고 있다.
이는 사실상 아름다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돌축대의 견고성을 위해서였
다.
돌마다 이를 얼기설기 엇물려 지진에도 미끄러나는 일이 없게 한 것이
다.
북한식 표현으로 '억세기를 높인 것' 이다.
안내원의 허락을 얻어 문루로 올라 사방을 살펴보니 모든 길이 보통문을
향해 달려오는 것만 같다.
창광거리고, 천리마거리고 시내엔 오가는 자동차가 드문데, 무궤도전차
는 제법 바삐 보통문을 휘감고 돈다.
나는 누마루에 걸터앉아 보통강을 내려다보았다.
강상엔 큰 다리가 놓여 강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건만 다리 건너 곧게 뻗
은 길 끝엔 높이 1백5층의 세모뿔형 미완성 고층건물인 유경 (柳京) 호텔
이 버티고 서 있다.
뒤로 돌아보니 거기 장문의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뜻밖에도 채제공 (蔡濟恭) 이 쓴 '보통문 중건기' 였다.
정조때 가장 유능한 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채제공이 50세때 평안감사가
돼 이 보통문을 고치고 낙성할 때 써 붙인 현판인데 그 뜻이 참으로 크
고 아름다웠다.
"서경 (西京) 은 대도시다.
그 문에 대동문과 보통문이 있다.
…모란봉이 멀리 아득히 곱게 단장하고 평양의 진산 (鎭山) 을 이루었는
데 거기서 한 줄기를 뻗어내려 구불구불 활 윗시위 모양으로 3, 4리쯤 내
려가 보통강을 만나면 그친다.
그리하여 산맥과 강물이 마치 서로 머리를 맞대고 남몰래 무언가 주고 받
는 듯하다.
그래서 얼른 보아서는 그 순맥 (順脈) 과 역수 (逆水) 의 방향이 다름을
알지 못한다.
바로 그 산과 물이 만나는 자리에 보통문이 있다.
……" 도도한 물결처럼 흘러가는 채제공의 문장은 그의 인품 만큼이나 청
아 (淸雅) 하고 진중하다.
글은 또 이어가기를, 평양사람들이 보통문을 중수하는 것이 하나의 숙원
이기에 나랏돈을 내고 민력 (民力) 은 한 사람도 빌리지 않고 일꾼을 사
서 고쳐 놓으니 "버드나무 그늘과 소나무 사이로 단청빛이 더욱 새롭고
고와 보였다" 는 것이다.
그래서 서경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있는데 이때를 맞아 채제공은 이렇
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평양에서 고쳐야 할 것은 이 보통문만이 아니다.
나라 곳간이 텅 빈 재정의 고갈은 문의 기둥이 썩어간 것과 무엇이 다르
며, 백성들이 가렴주구로 시달리는 것은 서까래 네 구석이 무너져내리는
형세와 무엇이 다르며, 풍속이 퇴폐해 날로 낮은 데로 흘러감은 기와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건이 허물어진 것은 혹은 기다려 고치면 되겠지만 백성의 삶이 허물
어진 것은 장차 어디에 기대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 말을 여기에 기록해 두어 내가 근본을 버리고 그 말엽만 힘쓴 것
을 부끄러워했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라. " 이런 글을 일러 명문이라 하
는 것이리라. 아!
채제공이여! 그 높은 도덕과 경륜이여! 나는 지금 이 보통문 누각에 앉
아 또 그 무슨 한갓된 아름다움만 말하는 말엽에 빠졌던 것인가.
생각하자니 부끄러움, 부끄러움 뿐인데 보통강 저 너머 붉은 해가 홍채
를 뿌린 저녁 노을에 나의 얼굴은 자꾸 붉어만진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중앙일보
▶ 게 재 일 : 1998년 01월 24일 11面(10版)
▶ 글 쓴 이 : 유홍준
[북한 문화유산답사기]4.동명왕릉…노송숲속 '당당한 고구려'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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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북한 문화유산 답사길에 나는 최상의 안내자를 만났다.
우리를 초청한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측은 중앙력사박물관 리정남
(李定男.48) 연구사를 문화유산 전문가로 전기간 동행하도록 주선해 주었
다.
리선생은 외모부터 조용한 선비풍인데, 말수도 적고 몸가짐도 차분하며
성격도 꼼꼼했다.
한마디로 나와는 정반대 되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금방 친해지게 됐다.
본래 어려서는 성격이 비슷해야 친구가 되지만 나이들어 만날 때는 달라
야 마찰도 없고 마음이 편한 법이다.
리선생은 학문태도 또한 치밀한 연구자의 면모가 있어 유물의 제작연도
는 물론 날짜와 숫자 및 크기까지 다 외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50년만에 남한에서 찾아온 이방인 아닌 이방인을 위해 문화
유산에 대한 남한측 학술용어를 모두 알아두고 있었다.
나또한 북한을 방문하기 앞서 북한의 고고미술사 용어를 많이 익혔다.
그리고 현지에서 말할 때면 되도록 그쪽 용어를 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와 리선생이 대화할 때면 나는 북한용어로 묻고 그는 남한용어
로 대답하는 진기한 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평양에 도착해 3일째 되는 날 우리의 답사일정은 동명왕릉과 진파리 (眞
坡里) 고분떼, 그리고 동명왕릉을 위해 지은 절인 정릉사 (定陵寺) 로 잡
혀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묵고 있는 초대소 별채 현관에 출발자들이
집결하는데, 여가를 틈타 답사자료를 확인하고자 리선생에게 물었다.
“리선생, 진파리 무덤들은 내부구조가 대개 돌칸흙무덤이죠?”
“네. 그렇습니다. 석실봉토분 (石室封土墳) 입니다.” 평양시내를 벗어
나 평양~원산간 고속도로를 올라타니 중화들판을 가로질러 곧게 뻗은 도
로에는 눈앞에 거칠 것이 없다.
차창 밖으로는 들판너머 산자락 아래로 농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겨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이 50년대 활동사진 장면처럼 스쳐간다.
그렇게 10여분쯤 달렸을 때 도로 한쪽으로 '동명왕릉 3㎞' 라는 이정표
가 나왔고 우리는 이내 동명왕릉에 도착했다.
동명왕릉은 평양시 외곽, 력포구역 룡산리 재령산 서쪽 가지줄기의 구릉
위에 있다.
옛날에는 여기가 평남 중화군 (中和郡) 진파리였기에 진파리 고분군으로
알려진 무덤 중 하나인 것이다.
동명왕릉은 내가 그동안 사진으로 보아온 것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대대적인 복원작업으로 능문 (陵門) , 석등, 문관.무관상, 제당 (祭
堂) , 돌범 등이 거하게 배치돼 있다.
설명이 없어도 조선시대 왕릉을 고구려식으로 재해석한 20세기 유적인 것
을 알겠다.
나는 리선생에게 물었다.
“언제 이렇게 복원했습니까?”
“1993년 5월14일에 개건 (改建) 했습니다.” “어떻게 날짜까지 다 기억
하십니까?”
“아, 그날이 동명왕의 2천2백95회 생신날입니다.
왕의 생일이 음력 4월1일인 것을 톺아 (거슬러) 올라가서 양력으로 찾아
낸 것이죠.”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삼국사기' 에 나오는 기
원전 37년보다 2백40년 앞선 기원전 277년으로 보고 있다.
잔디가 곱게 깔린 언덕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으리라고 상상했던
동명왕릉이 이처럼 거대한 영웅기념물로 바뀐 것을 보고 있자니 남쪽에
서 아산 현충사라는 거창한 유적을 볼 때 일어난 감정과 똑같은 심사가
일어났다.
나는 시선을 건너 뛰어 동명왕릉을 살폈다.
동명왕릉은 역시 시조의 능다운 위용과 고구려 고분다운 힘이 있었다.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부여 능산리의 아담한 고분, 경주 서악동의 화려한
고분과는 달리 굳세 보였다.
특히 동명왕릉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세 가지 무덤 형식이 모두 갖춰져 있
다.
본래 퉁거우 (通溝) 지안 (集安)에 있던 왕릉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옮
겨왔기 때문에 퉁거우의 돌각담무덤 (積石塚) 과 평양의 돌칸흙무덤 형식
이 복합됐다.
그리고 내부엔 벽화까지 있는 벽화무덤이다.
그래서 동명왕릉의 외형을 보면 돌각담무덤식으로 3단의 정방형 돌축대
를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들었다.
그런데 기단의 한변 길이가 31m이고 봉분의 높이는 11.5m이니 규모가 대
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단조로운 구성으로 별 치장이 있을 수 없는 무덤무지같지만 축대를 쌓은
것을 보면 돌 윗면에 턱을 주어 윗돌이 밀려나지 않게 했고, 위쪽으로 각
도를 조금씩 좁혀 쌓아 튼튼하고 강인해 보인다.
거기에다 봉분이 그냥 둥근 게 아니라 네모뿔로 올라가는 직선의 맛이 있
고, 그냥 직선이 아니라 정상에서 둥글게 마무리됐으며, 여기에다 왕릉다
운 권위를 위함인지 무덤무지 사방으로 5m폭의 강자갈을 깔아 기품이 더
욱 살아난다.
한마디로 고구려 맛이 나게 축조됐다.
1970년대 초 동명왕릉은 내부구조가 다시 조사됐다.
이때 벽면을 덮고 있던 석회를 씻어내리면서 벽화가 발견됐다.
벽화는 지름 12㎝의 연꽃무늬를 4.2㎝간격으로 해 사방연속무늬로 무려 6
백여개를 덮은 것으로 발굴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무늬의 바탕은 보라색
이고 연꽃은 붉은 자색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고왔을까. 나는 리선생에게 물어보았다.
“동명왕릉 벽화가 언제 발견됐죠?” “1974년 1월23일이지요. 제가 김일
성 (金日成) 대학 졸업하고 맨 먼저 발굴에 참가한 것이 여기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연꽃 그림 1백4개를 찾아냈지요. 그래서 이것을 사도지 (트
래싱지)에 옮겨 그리고 사귐점 (모서리) 마다 연꽃을 복원해 보니 6백41
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보람 있었습니다.” 나는 리선생의 발굴 얘기를 들으면서 왕릉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동안 사진으로 보아온 봉분보다 많이 큰 것 같
아 리선생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대답은 예상 밖으로 간명했다.
“봉분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큽니다.”
“네, 맞습니다.복원하기 전에는 높이가 8.5m밖에 안됐단 말입니다. 그런
데 '위대한 수령님' 께서 1천5백년 동안 비바람에 깎여 이만한 크기로
된 것이니 본래 크기는 얼마만한 것이었나 계산하라고 교시하셨습니다.
그래서 학자분들이 과학적으로 계산해낸 결과 11.5m가 되었습니다.” 그
러나 내 생각에 동명왕릉에 기품과 권위를 부여해 준 것은 이곳 진파리
언덕의 솔밭이었다.
동명왕릉 주위로는 해묵은 노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안내원 설명으로는 모두 1천6백그루이고 수령은 4백~5백년이란다.
게다가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들은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가지
를 왕릉 쪽으로 시원스레 뻗치고는 줄기조차 기울이고 있으니 마치 군신
이 왕에게 읍 (揖) 하는 형상이다.
답사를 다니면서 나는 아름다운 솔밭을 참 많이 보았다.
경주 남산의 삼릉계, 청도 운문사 계곡, 풍기 소수서원의 진입로, 밀양
낙동강변의 긴 늪숲, 평해 월송정의 해송밭, 봉화 반야계곡의 춘양목 자
생지, 영월의 장릉 솔밭…. 내 아직 백두산 홍송 천연림은 못 보았지만
진파리 솔밭은 그 어디에 뒤질 것 없는 연륜과 넓이와 품격을 갖추고 있
다.
그것은 동명왕릉 못지 않은 거대한 유산이었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중앙일보
▶ 게 재 일 : 1998년 01월 31일 09面(10版)
▶ 글 쓴 이 : 유홍준
[유홍준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5.진파리고분과 평강공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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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 주위의 산 언덕엔 20여개의 고구려 무덤들이 산재해 있다.
미술사에선 여기를 진파리 (眞坡里) 무덤떼 (古墳群) 라 부른다.
모두 돌칸흙무덤이며 안길 (羨道) 과 안칸 (玄室) 으로 이뤄진 외칸무덤
(單室墓) 이다.
시기적으로는 평양으로 천도한 5세기초부터 6세기에 걸쳐 있다.
그중 진파리 고분의 명성을 드날리게 해준 것은 제1호분과 4호분의 벽화
다.
진파리 고분벽화에는 참으로 특이하게도 소나무 그림이 아주 서정적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제1호분 북쪽 벽에 그려져 있는 한쌍의 소나무는 그 자태가 대단히
어여쁘고 늠름한데 하늘에는 아름다운 인동 (忍冬) 당초가 바람결에 흩날
리고 있어 더욱 환상적이다.
한마디로 고구려 고분벽화, 아니 한국미술사에 빛나는 한폭의 명화다.
그래서 진파리 고분을 답사한다는 것은 비록 지금은 밀폐돼 벽화를 볼
수 없다 할지라도 이 명작의 현장에 가 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의
의와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지금 진파리 언덕에 오르니 진파리 고분벽화에 나
오는 소나무처럼 멋진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발견된 85개의 고구려 고분벽화 중 유독 진파리 고분에만 소나
무 그림이 있는 것을 우연으로 돌리기엔 너무도 인연이 깊어 보인다.
동명왕릉과 진파리 고분을 안내해 준 이는 리명화 강사였다.
강사는 안내원보다 직급이 높다고 하는데 실제로 리명화 강사는 내가 답
사길에 만난 10여명의 안내원 중 가장 학식이 깊어 보였다.
나이는 28세에, 세대주 (북한에선 남편을 이렇게 부른다) 는 의사라고 했
다.
나는 진파리 솔숲과 한 몸이 되고 싶어 콧바람 소리까지 내며 있는대로
깊이 숨을 들이켜보고, 떨어진 솔잎을 밟는 감촉이 더없이 포근하게 느껴
지는 오솔길을 걸으면서 안내 강사의 얘기를 들었다.
옛날에 이 언덕엔 소나무가 더 우거졌는데 고을 관리가 잘못해 산불을 냈
다는 것이다.
화가 난 평안감사는 이 관리에게 멀리 제주도까지 가 소나무를 옮겨다 심
어놓으라는 벌을 내려 일부러 제주도 소나무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쪽 아래쪽 솔밭엔 해송 (海松) 이 가득하다는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평해 월송정이나 강릉 경포대에서 보던 그런 소나무들이었
다.
나는 얘기를 들은 값으로 정겹게 말을 당겨 보았더니 그 대답이 더욱 그
윽했다.
"명화동문 그 말을 믿으세요?" "얘기가 재미있고 교육적이지 않습니까?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벌방지대 (저지대) 엔 해송이 잘 된답니다.
" "야! 그 해석이 더욱 멋있습니다.
명화동문 최고가는 강사입니다.
" 내가 이렇게 입바른 칭찬을 하자 안내강사는 순발력 있게 받아친다.
"앞놓고 평가하는 걸 뭐라 못하겠는가.
" 사람 앞에 놓고 칭찬하는 걸 무슨 칭찬인들 못 하겠느냐는 말이다.
북한에 와 내가 놀란 사실 하나는 이곳 여성들의 유머 감각이었다.
농담하는 말재간이 보통이 아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농을 던져도 화내거나 앵돌아지는 일 없이 이렇게 여유
있게 넘긴다.
안내강사가 스무개의 무덤 중 어느 쪽으로 가고 싶냐고 묻기에 우선 벽화
가 그려져 있다는 제4호분으로 먼저 가자고 했다.
멀리 있을 줄 알고 1호보다 4호를 가리켰는데 저 동쪽 끝이 1호분이고 4
호분은 요 모서리 돌아 있단다.
아담한 크기의 제4호분은 아침 햇살을 받아 무덤무지가 말갛게 빛나면서
따뜻한 정감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제4호분은 놀랍게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이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었다.
이 아름다운 벽화무덤이 아름답게 살다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이
라는 것이 반가웠다.
나는 온달 얘기는 시덥지 않은 옛날얘기로만 알고 있다가 시덥지 않은 바
보 온달 이야기의 주인공은 온달이 아니라 평강공주라는 호암 문일평 선
생의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바보 남편에 장님 시어머니를 모신 지극한 사랑,끝까지 신의
를 지키는 믿음의 사회, 자기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인간적 성실성, 나라
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애국심, 그리고 처연히 저 세상으로 떠나는 대범
한 죽음의 관념, 거기에다 최고의 지배층과 최하의 평민이 만나는 사회
적 일체감을 다른 사람 아닌 평강공주를 통해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구려 사람들은 요즘 영국인이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사모하듯
평강공주를 기렸다는 얘기였다.
그런 생각에 젖어 평강공주 무덤을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데 안내강사는
진파리 고분떼 중에서 내부가 공개되고 있는 것은 7호분밖에 없으니 우
선 그걸 보러가자며 나를 그쪽으로 안내했다.
아마도 내부에 들어가면 놀랄 것이라며 은근히 기대감을 주기도 했는데,
나는 속으로 '벽화고분이 아닌걸 내가 다 아는데 뭐 놀랄 게 있을라고'
하면서도 뭔가 기대되는 바도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파리 제7호분은 미술사에서 왕관 장식이 출토된 것으로 유명
하다.
이제까지 알려진 유일한 고구려 왕관인 이 금동관은 태양을 상징하는 세
발 까마귀 (三足烏) 와 힘있게 뻗친 불꽃무늬를 조각해 남한의 미술사 책
에는 '금동투각일상문 (金銅透刻日像文)' 장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것을 아주 쉽게 '해뚫음무늬 금동장식' 이라고 표기
하고 있다.
7호분은 사방 3.5m의 좁은 안칸으로 짜인 외칸무덤이다.
그러나 안칸에 들어서니 안내강사의 예견대로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다.
천장이 시원스럽다 못해 통쾌할 정도로 높이 뚫려 있는 것이었다.
바닥에서부터 무려 6.6m나 됐다.
반듯한 장대석 (長大石) 을 여섯 단으로 좁혀 들어가다가 말각조정 (抹角
操井) 법으로 천장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래서 천장은 가운데로 빨려 올라가듯 높고 길게 느껴졌다.
그 구성은 건축학적으로 대단히 견고하게, 미학적으로는 대단히 기하학적
인 아름다움이 서려 있는 것이었다.
금동관이 나올 만한 귀티가 보였다.
돌들은 이가 꼭 맞게 축조됐고 이음새마다 회를 곱게 칠했다.
솜씨가 훌륭한 것이었을까, 정성이 지극했던 것일까. 나는 넋을 놓고 천
장을 바라보며 나갈 줄 모르고 맴을 돌고 있으려니 안내강사는 자신의 임
무를 다하려는 듯 해설을 시작한다.
"반듯한 돌로 무덤칸을 쌓고 그 위에 석회를 제창 매끈하게 발라 곱게 마
감했습니다.
천장은 여섯 단으로 평행고임을 해 올라가다가 두 단의 삼각고임을 얹어
매우 높게 만들었습니다.
" 참으로 아름다운 미술사 용어였다.
나는 차라리 내가 미술사가를 자처하지 말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여러가지로 안내강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나는 선물로 준비해온 스타킹 하나를 꺼내 안내
강사에게 건네주었다.
"명화동무, 고맙습니다.
이거 별거 아닙니다.
서울서 올 때 스타킹 하나 사왔는데 받아주십시오. " "스타킹이라뇨?" 안
내강사는 부끄러운 듯 선물을 받아쥐고 가만히 포장지를 들춰보고는 가볍
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살양말이군요. "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중앙일보
▶ 게 재 일 : 1998년 02월 04일 12面(10版)
▶ 글 쓴 이 : 유홍준
중앙일보
▶ 게 재 일 : 1998년 02월 11일 12面(10版)
▶ 글 쓴 이 : 유홍준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7.청천강…詩心 유혹하는 乙支文德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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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저녁식사 뒤 여느 때처럼 둘러앉아 차를 마
시며 환담을 나누는데 권영빈 (權寧彬) 단장이 불현듯 묻고 나왔다.
“우리가 평양에 온 지 겨우 사흘밖에 안됐나? 그런데 왜 한 달은 된 것
같지?” “왜긴? 객지 나오면 다 그런 거지.” “다 그렇긴? 1년에 몇번
씩 외국에 나다녔어도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사실 일행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처음엔 모두들 긴장해서 그런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곰곰 생각해 보니 전화 때문이었다.
평양에 도착한 뒤 우리는 아무 곳에서도 전화를 할 수 없었다.
미국을 가든, 소련을 가든 외국에 나가면 집에 안부전화부터 하면서 시간
과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데 북한 답사길엔 그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리 이동통신이 발달하고 아무리 좋은 무선전화기가 나와도 통신협정
이 이뤄지지 않는 한 전화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귀국 뒤 북한답사가 외국여행과 무엇이 다르더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꼭 두가지 사실로 대답했다.
하나는 외국어 통역을 구하지 않아도 말이 잘 통한다는 점이고 하나는 전
화를 할 수 없어 완벽하게 차단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남과 북에 가로놓인 가깝고도 먼 거리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것
이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평양생활은 한눈 팔 것 없이 익숙해져 갔는데 닷새째 되
던 날 멀리 묘향산으로 3박4일 답사길에 오르게 되니 이 여행을 맞는 기
분은 참으로 묘했다.
여장을 꾸리고 집안 정리를 하는 손길이 마치 집에서 답사 떠날 때와 마
찬가지로 바쁘고 마음이 가볍게 들뜨기도 했다.
하기야 지난 50년간 남한의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묘향산을 가는데 가
슴 설렘이 없을 수 있겠는가.
묘향산은 평안남도.평안북도.자강도 3도가 거기서 만나고 거기서 갈라지
는 분계령 (分界嶺) 이 되고 있지만 답사와 관광지로서 묘향산은 평안북
도향산군향암리를 일컫는다.
그래서 묘향산에 가려면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향산을 거쳐야 한다.
벽초 (碧初) 홍명희 (洪命憙) 의 소설 '임꺽정' 에서 피리 잘 부는 단천
령이 묘향산 가는 길에 초향이 하고 놀던 곳도 향산이다.
평양에서 가자면 순안.숙천을 거쳐 안주에서 한 호흡 고르고, 여기서 정
주를 지나 신의주로 향하는 서북쪽 길을 버리고 동북쪽으로 가는 길이
다.
그 길은 너무도 유명한 영변의 약산과 청천강 (淸川江) 을 끼고 오르는
길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2년전에 평양~향산간 고속도로가 개통돼 우
리는 옛 길을 더듬어가는 낭만을 누리지 못하고 교통체증이란 단어도 없
는 이곳 고속도로를 타고 2시간 안에 향산에 닿게 돼 있었다.
여행이란 목적지 못지 않게 가는 과정이 풍요롭고 흥미로운 여정 (旅情)
을 실어주는 법인데 그걸 누리지 못함이 아쉬웠고, 특히 가는 길목에 있
는 관서 (關西) 제일루라는 안주 백상루 (百祥樓) 를 들르지 못하게 된
것은 차라리 억울했다.
그래도 우리의 소형버스가 순안을 지나면서는 평안도 가을 들판의 스산
한 듯 느긋한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었다.
비산비야 (非山非野) 로 이어지는 들판엔 논과 밭이 여전하고 둥근 산자
락에 참나무.소나무들이 운치있게 덮여 있었다.
서울서 듣기에 산언덕마다 밭으로 깎아 나무가 없다느니, 농사가 되지 않
았다느니 하는 풍문이 있어 더욱 눈여겨 보았는데 최소한 향산 가는 길
의 풍광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한시간쯤 달렸을 때 곧게만 뻗어 오던 고속도로가 오른쪽으로 크
게 휘어 돌아가는 지점에 다다라서는 큰 강을 건너 저쪽 강변으로 바짝
붙어 사뭇 강변길을 달리게 됐다.
우리는 그렇게 청천강을 건너 청천강을 끼고 달리고 있었다.
청천강은 투명하다 못해 짙은 초록빛을 발하고 있었다.
강변엔 흰 모래와 강 자갈이 천연의 모습 그대로 깔려 있었다.
강건너 저쪽으로는 아침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안주읍내가 한폭의 수묵화
로 다가왔다.
강과 들과 산이 어우러지는 이 맑고 조용한 풍광은 60년대 영화에서나 보
던 무공해 시절의 모습이었다.
나는 답사기를 쓰면서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을 큰 생
각없이 우리나라에서 '둘째' 로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는데 그 첫째는 바
로 여기를 위해 남겨둔 것이었던가 생각되기도 했다.
나는 도저히 이 청천강을 그냥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북한측 책임자인 용강선생에게 잠시 고속도로 갓길에서 청천강 바람을 마
음껏 쐴 수 있도록 부탁했다.
용강선생은 이제는 내 습성을 잘 알아 별 단서 없이 청을 들어주었다.
굽어 내려다보니 다리 아래로는 아낙네 몇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빨래를
하고 있었고 강 위쪽으로는 손수레에 모래작업하는 일꾼이 보였고, 또
저 아래쪽으로는 강물에 돌팔매를 하며 물수제비를 뜨는 개구쟁이들이 있
었다.
옛날에 실학자 박제가 (朴齊家) 선생이 '묘향산기행문' 에서 이 물수제
비 뜨는 것을 아주 정겹게 묘사한 것이 있는데 2백년 뒤 나 또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북한에선 이를 '겹물놀이' 라고 말했다.
하염없이 맑은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용강선생이 또 내 습성을 잘 알
아 묻는 말이 있었다.
“교수선생, 청천강을 읊은 멋진 시를 조사해 온 게 있습니까?" "조사는
해봤지만 이상할 정도로 없어요. '동국여지승람' 에도 을지문덕 (乙支文
德) 장군의 살수대첩을 노래한 것이 한두편일 뿐 서정적인 풍경을 읊은
건 없어요. 그 대신 안주 백상루에서 읊은 시들이 모두 청천강을 노래한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청천강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백상
루인가 보죠. 내가 자꾸 백상루에 가자고 한 것이 그 때문이었답니다.”
이렇게 나오니 용강선생은 약간은 미안했는지 나의 서운함을 지우려고 농
을 섞어 얼버무렸다.
“백상루 가봤자 나그네 쉬기 좋다 뿐이지 풍광은 이만 못합니다.
그런데서 읊은 시라는 것은 뭐, 야! 노을이 짙구나, 야! 늙었구나, 이런
거 뿐이 더 있갔시오.” 정말로 그랬다.
내가 지금 그랬듯이 길손의 서정이란 그렇게 산들바람 같은 데가 있다.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과 출신인 용강선생이 뭔가 패기있는 시
를 알고 있을 것 같아 하나 알려달라고 했더니 청천강과는 관계없다며 한
사코 사양하다가 나의 쇠귀신 같은 요구를 못이겨 조선시대 시조 한수를
읊는데 정말로 센 시였다.
그 정도면 청천강의 을지문덕장군도 벌떡 일어날 만했다.
“벽상에 칼이 울고 흉중에 피가 뛴다.
살 오른 두 팔뚝은 밤낮으로 들썩인다.
시절아 너 돌아오거든 왔소 말을 하여라.” 나중에 '조선문학사' 를 찾아
보았더니 18세기 시조로 작자는 무명씨 (無名氏) 로 돼 있었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중앙일보
▶ 게 재 일 : 1998년 02월 18일 12面(10版)
▶ 글 쓴 이 : 유홍준
[유홍준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8.보현사 8각1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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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호텔에 여장을 풀고 우리는 당연히 제일 먼저 보현사 (普賢寺) 를 찾
아갔다.
묘향산 보현사는 북한에서 가장 큰 절일뿐만 아니라 북한 불교의 총림
(叢林) 격이었다.
남한으로 치자면 서울의 조계사에 송광사나 해인사를 합친 위상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북한에서 절 하면 보현사였다.
묘향산 산마루로부터 흘러내린 향산천을 따라 보현사를 찾아 사뭇 계곡
안쪽으로 오르자니 지금 여기가 남한땅인지 북한땅인지를 가늠치 못할 정
도로 우리나라 산사 (山寺) 의 전형적인 진입로를 보여준다.
평소 나는 산사의 미학은 건물 자체보다 자리 앉음새에 있고, 산사의 답
사는 진입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보현사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스님들 사회에서 유머를 섞어 만든 말중에 '입해출송 (入海出松)' 이라
는 말이 있다.
해인사는 들어갈 때가 멋있고, 송광사는 나올 때가 기분 좋다는 뜻이다.
산중에 오래 산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온 미적 판단이니 틀릴 리 없을 것
인데 보현사는 들어갈 때고 나올 때고 사람의 가슴을 호방하게 열어주는
기상이 있었다.
진입로만 보자면 지리산 화엄사를 많이 닮았지만 열두판 화판 (花瓣) 의
꽃숲 속에 앉은 자태는 문경 봉암사 같다고 하겠는데, 절의 크기는 고창
선운사처럼 크도 작도 않은 쾌적한 규모였다.
보현사의 당우 (堂宇) 는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31본사의 하나로 50여채
됐지만 6.25때 반 이상이 불타고 전후에 복구해 새로 단장해 놓은 것이
20여채 됐다.
북한 당국은 관광 차원인지, 아니면 박물관 교육 차원인지 보현사 경내
에 불교역사박물관을 세우고 전국 사찰에서 나온 많은 불교유물을 여기
에 보관.전시하고 있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 소장품은 총 5천4백30점이라고 했는데 불상이 1백1
개, 불화가 84점, 불교장식품이 1백49점, 그리고 불경목판 원판과 팔만대
장경 목판인쇄본 완질 1천1백59권 등이 있었다.
그 중에는 남한 학계에 금강산 출토 보살상으로 알려진 고려말기 대표적
인 금동보살상도 있었고, 피현군 불정사에 있던 다라니 석당 (石幢) 도
있었고, 또 금강산 유점사의 범종도 있었으니 가위 북한 불교미술의 센
터 구실을 하도록 집결시켰다고 하겠다.
그런 것중 보현사의 역사와 명성을 높여주는 유물은 단연코 고려초에 만
들어진 8각13층석탑이었다.
그것은 보현사의 자랑일뿐만 아니라 북한에 남아 있는 석탑중 가장 빼어
난 상징적 유물이다.
내 남이 모두 알고 있듯이 중국은 벽돌탑, 일본은 목조탑, 우리나라는 석
탑의 나라다.
우리나라의 석탑은 백제 미륵사와 정림사에서 출발해 통일신라의 감은사
와 불국사 석가탑에서 그 전형을 완성했다.
그것이 이른바 2층 기단의 3층석탑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후삼국을 거쳐 고려시대로 넘어가게 됐을 때 석탑에
는 각 지방 나름대로의 향토색을 띠게 됐다.
호족이 강해진 만큼 석탑에도 지방색이 반영된 것이다.
바로 그럴 시절 옛 고구려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8각석탑의 유행이 나타
났다.
그 유행은 평양 영명사터의 8각탑을 거쳐 오대산 월정사의 8각9층탑까지
뻗쳤으니 고구려의 정서 반영권이 얼마나 넓은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기
도 하다.
그것이 왜 8각이었는가는 우리가 앞서 동명왕릉 정릉사에서 보았던 고구
려 가람배치의 8각탑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보현사 8각13층석탑은 바로 그런 역사적.지역적 특성을 띠면서 천년
을 두고 우뚝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북한엔 석탑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95%가 남한에 있다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한다.
그 수치를 어떻게 가늠할까는 별도로 치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현
사 8각13층석탑 하나가 이곳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중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석탑문화의 지도를 부여와 경주를 넘어 여기까지 그리
게 하는 것이다.
그게 어디 작은 일일 수 있겠는가.
책으로 수없이 보아왔고, 해마다 한국미술사 시간이면 슬라이드로 비춰
보아왔던 이 보현사 8각13층석탑은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준수하게 잘 생
겼다.
생각만큼이나 크고 세부의 묘사에도 게으름이 없고 마감질에 불성실은 커
녕 추녀마다 풍경, 북한말로 바람방울을 무려 1백4개나 달아매는 치밀성
을 보여주고 있다.
돌들은 이가 꼭 맞아 한치의 오차도 보이지 않는데 새로 고쳐 얹은 상륜
부도 제법한 솜씨였다.
나는 탑돌이하는 신자인양 돌고 또 돌며 탑을 어루만져 보았다.
대웅전에 앉아 산자락을 배경으로 바라도 보고, 만세루에 올라 하늘을 배
경으로 사진도 찍으면서 좀처럼 여길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넋을 잃고 탑만 바라보고 있는데, 뜻밖에도 한 총각이 내게 다가
와 "미안하지만 사진 좀 눌러주잡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북한에 와 처음 대하는 민간인과의 만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원하던 바인지라 사진 한방을 눌러주고는 요리조리 포즈
를 다시 정비하게 해 놓고 또 한방을 찍어주며 정을 당겼다.
그들 일행은 나이든 부부와 한쌍의 남녀, 그리고 처녀 넷이었다.
나는 당연히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평양에서 신혼여행 왔습니다."
"부모님하고 신부 친구들이 같이 왔습니다."
그러자 우리 답사를 도와주고 있던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라운석
씨가 북한에선 신혼여행을 곧잘 이런 식으로 온다는 보완설명을 해 주었
다.
순간 나는 북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생각 밖의 측면이 있음을 골똘히 생
각하느라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고는 그 짧은 침묵이 부담스러워 신부 친구들에게 농을 걸었다.
"남의 신혼여행에 뭐하러 따라옵니까? 좋아서 왔습니까, 부러워서 왔습니
까?" 그러나 처녀들은 부끄러움을 타는 듯 만세루 기둥 뒤로 돌아 숨으
며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는데 농담 잘하는 라운석씨가 한마디 했다.
"저런 걸 후천성 시집 매렴증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처녀들은 눈이 둥그레져 가지고 일제히 소리친다.
"이야, 놀림이 심하다."
그러곤 신혼부부 일행은 8각13층석탑으로 몰려가 맴을 돌면서 조금전 나
처럼 석탑을 감상한다.
모두들 천진스런 손짓을 하며 뭐가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저들의 저 청순한 살내음을 더 느끼고 싶어 자리를 일어나지 못했
다.
신혼부부란 세상 어디를 가든 최상의 귀빈 대접을 받는 것이 인간이란 동
물 사회의 본능적 규범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상념에 취해 있는데 라운석씨가 또 농을 건다.
"교수선생 그만 가자요. 교수선생처럼 처녀들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사
람을 북조선에서 애들이 장난으로 만든 말이 있습니다. "
"뭔데요?" "선천성 장가 고픔증이라고 합니다."
글 = 유홍준 (영남대교수.박물관장)
▶ 게 재 일 : 1998년 02월 25일 12面(10版)
▶ 글 쓴 이 : 유홍준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9.안심사 부도밭…고승들 숨결에 합장이 저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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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절집의 역사와 사세 (寺勢)가 어떠했는가를 알아보는 데는 여러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