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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사상 스크랩 조선의 인물정리 2
정규훈 추천 0 조회 92 10.09.10 21: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광한 안빙몽유록, 조선문신[1484], 문신

대제학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로 2편의 몽유록과 소설에 근접한 2편의 전(傳)을 남겼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시회(時晦), 호는 기재(企齋)·낙봉(駱峰)·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 영의정 숙주(淑舟)의 손자이고 내자시정(內資寺正) 형(泂)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를 거쳐 1510년(중종 5) 식년문과에 급제, 1514년(중종 9)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전교가 되었다. 조광조 등과 함께 신진사류로서 1518년(중종 13) 대사성에 특진되었으나 다음해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1537년(중종 32) 등용되어 이조판서·홍문관제학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 윤임 등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이 되었다. 같은 해 우찬성으로 양관대제학을 겸임,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550년(명종 5) 좌찬성이 되었다. 1553년(명종 8) 궤장(?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필력이 뛰어나 몇 편의 몽유록과 전을 남겼는데 〈안빙몽유록 安憑夢遊錄〉·〈서재야회록 書齋夜會錄〉은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몽유록이다. 〈안빙몽유록〉에서는 급제하지 못한 안빙이라는 사람이 꽃동산에서 잠들었다가 꽃나라에 가서 놀고 시를 읊었다고 했다. 〈서재야회록〉은 어느 선비가 못 쓰게 된 벼루·붓·먹·종이가 버림받게 되었다고 서러워하는 것을 엿듣고 정중하게 땅에 묻은 뒤 제사지냈다는 내용이다. 두 작품 모두 몽유록에 가전체를 더해서 지었다. 〈최생우진기 崔生遇眞記〉는 최생이 선계(仙界)에서 놀고 용궁에서 시를 짓다 돌아와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지 알 수 없다고 한 내용으로 김시습의 〈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과 비슷하다. 〈하생기우록 何生奇遇錄〉은 과거공부를 하던 하생이 죽은 여자와 사랑하고 그 여자가 다시 살아나 부부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와 비슷하다. 그러나 두 편이 모두 기이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하는 데 치우치고 자아와 세계의 갈등이 심각하지 않아 소설이 되다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금오신화〉의 영향을 외적으로만 받아 오히려 소설의 정착을 저해했다는 평을 받는다. 1553년(명종 10) 목판본으로 간행된 〈기재기이 企齋記異〉에 실려 전한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성수침1493(성종 24)~1564(명종 19).

본관은 창녕.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廳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세순(世純)이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곧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그를 추종하던 많은 유학자들이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했다. 이때부터 경서를 두루 읽고 태극도(太極圖)를 깊이 연구했다. 또한 〈통서 通書〉 이하의 성리학 서적을 모두 모아 연구에 전념했다. 1541년 후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52년(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를 비롯해서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해서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죽은 후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물계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청송집〉이 있으며, 글씨로 〈방참판유녕묘갈 方參判有寧墓碣〉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인후(金麟厚, 1510년~1560년)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인촌 김성수의 선조가 된다.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황의 이기 일물설에 반대하였으며,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하서집》, 〈주역관상편〉 등이 있다.

김인후가 죽고 나서 수년 뒤 이웃에 사는 오세억이란 사람이 죽었다가 하루 만에 살아났는데, 죽어서 자미궁(紫微宮)이란 곳에 갔더니 자미선으로 있는 김인후가 명부를 보며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1]

정조는 "도학과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하였다.[1]

기대승 (조선 문신·학자) 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 유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이며,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했다.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증(贈) 이조판서 문민공(文愍公) 준(遵)의 조카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 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이듬해 대사성에 올랐다. 1570년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기준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이황과 정지운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지나치게 〈주자어류 朱子語類〉와 운봉호씨설(雲峰胡氏說)에만 근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단칠정논쟁). "자사(子思)와 맹자가 말하는 바가 같지 아니하므로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여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하여 선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와 기를 양물(兩物)로 삼는 것이니, 이는 칠정이 성(性)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사단이 기를 타지[乘] 않는다"는 것이다(→ 이기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할 때에는 혹 이와 같은 설이 옳을지 모르나 사단·칠정은 이처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견해에 반대했다(→ 인심도심설). 이어서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입각한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성(性)과 정(情)은 미발(未發)·이발(已發)의 다름이 있을 뿐 불가분의 표리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 성(性)은 선(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정(情)도 그 성(性)이 발하여 된 것이므로 불선(不善)이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사단칠정을 이기(理氣)에 분속(分屬)시킨다면 이(理)와 기(氣)를 독립된 별물(別物)로 보게 되어 사단 속에 기(氣)가 없고 칠정(七情) 속에는 이가 없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사단과 칠정을 대설(對說)이 아닌 인설(因說)로 파악하는 것으로 결론짓게 된다. 그는 사단이 칠정 중의 사단인 것처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서의 순리(純理)도 겸기(兼氣)인 기질지성(氣質之性) 중의 것임을 의미한다고 하여 심성론적(心性論的)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요, 기는 이의 재료인 것이다. 이 둘은 본래 나누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물에 존재할 때는 본래 혼륜(混淪)되어 분개(分開)할 수 없다. 단 이약기강(理弱氣强)하고, 이는 조짐이 없으나 기는 흔적이 있으므로 그것이 유행(流行)·발견될 때 과불급의 차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칠정이 발할 때 혹은 선하고 혹은 악하여 성(性)의 본체도 혹 완전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기(理氣)는 논리적으로 구별되지만 실제에서는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심성론을 중심으로 사단과 칠정의 차이를 중절(中節)과 부중절(不中節)로써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은 태극도설에도 반영되었다. 태극(太極)은 이(理)로서 주재자요, 음양(陰陽)은 기(氣)로서 재료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民利)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民本政治)·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종과 선조에 대한 경연강의(經筵講義)에 담겨 있다. 〈논사록 論思錄〉에 제시된 거현론(擧賢論)·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은 왕도정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었다. 먼저 현자(賢者)의 등용을 중시하고, "현자를 등용하고자 한다면 먼저 시비를 분명히 하여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연후에야 현자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여 윤원형 등 당시 집권층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는 거현(擧賢)이야말로 양민(養民)하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현자들이 화를 입으면 소인배들이 득세하고, 그들의 사치와 사욕으로 말미암아 민재(民財)가 약탈되므로 민심이 흩어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임금은 재용(財用)을 선처하여 민생들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이재양민이 정치의 요체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국가정치의 일차적인 근본인 군덕(君德)의 증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덕치(德治)의 두 기둥인 존현(尊賢)과 이재(理財)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禮)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예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오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었다. 특히 예는 "천명(天命)의 성(性)에서 나왔으므로 범인(凡人)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성인(聖人)만이 이를 안다. 그리하여 예법을 만들어 일세(一世)를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임금이 지성으로 현자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현자 또한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 오직 임금의 현자를 쓰려는 성의가 있느냐에 있을 따름이다"라 하여 신하의 상향적인 예뿐만 아니라 임금의 신하에 대한 예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그는 "언로(言路)는 국가의 대사(大事)이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는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는 위태롭다"라고 하여 임금이 언로를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시비(是非)를 명확히 가려 소인배의 득세를 방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景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논사록〉·〈주자문록 朱子文錄〉·〈고봉집〉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고경명(高敬命, 1533년 ~ 1592년)

조선 시대의 문인·의병장이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1]

1533년 광주 압보천에서 대사간 고맹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552년(명종 7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동시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58년(명종 13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다. 이어 형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563년 교리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양(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여 울산(蔚山) 군수로 좌천된 후 파면되었다.

1581년(선조 14년) 영암 군수로 재등용되고 이어서 종계 변무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2년 서산군수로 전임 되었는데,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 이이(李珥)의 천거로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부시첨정에 임명되었다. 1583년 한성부서윤·한산군수를 거쳐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4년 사복시첨정이 된 뒤 성균관사예를 거쳐 순창군수로 재직 중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승문원판교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1591년 동래 부사로 있다가 서인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갔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 광주와 장흥(長興) 등에서 모집한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임금을 지키러 의주로 가던 중 금산에 집결하고 있던 왜군과 싸우다가 아들 인후와 같이 전사하였다.

정철 1536(중종 31)~1593(선조 26) 경기 강화.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이다.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된 누이를 보러 동궁(東宮)에 자주 드나들어 명종(明宗)과 친했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부친은 유배를 당했다가 1551년(명종 6)에 풀려났다. 이후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았다. 양응정·임석천·김인후·송순·기대승 등에게 수학하고, 이이·성혼·송익필 등과 교유했다. 1562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명종으로부터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으나 처남을 살해한 경양군(景陽君)의 처벌문제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자세를 고집하여 명종의 뜻을 거슬려 말직에 머무르다 1567년에 지평이 되었다. 이어 곧 북관어사가 되었으며 1568년에는 이이와 같이 독서당(讀書堂)에 피선되고 수찬·좌랑·종사관·교리·호남어사 등을 지냈다. 1571년 부친상을, 1574년 모친상을 당하고 주로 경기도 고양에서 지냈다.

1575년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일로부터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분쟁에서 서인의 편에 가담했다. 분쟁에 휘말려 고향인 전라도 창평에 내려와 있다가 1578년에 조정에 다시 나와 장악원정·직제학·승지 등을 지냈다.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행뢰사건(行賂事件)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탄핵을 입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강원도에 1년 동안 머무르면서 〈관동별곡〉과 시조 16수를 지었다. 1581년에 병조참지·대사성을 지내다 노수신에의 비답(批答)이 논핵(論劾)에 가깝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 창평으로 돌아갔으나 곧 전라도관찰사를 제수받아 1582년까지 1년간 역임했다. 도승지·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그곳의 시폐(時幣)를 상소로 올렸다.

1583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기주실의'(嗜酒失儀)하고 '강편기극지인'(剛偏忌克之人)이라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가 올려지는 등 논핵을 당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584년에 대사헌을 제수받고 총마(寵馬)를 하사받아 총마어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1585년 양사(兩司)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했다. 이후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면서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특배되어 최영경의 옥사를 다스렸다. 1590년(선조 23) 좌의정이 되고, 인성부군(寅城府君)이 되었다. 1591년 이산해의 배후책동에 빠져 건저(建儲)를 하려 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리고 '대신으로서 주색(酒色)에 빠졌으니 국사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가 빗발쳐 파직된 뒤에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유배생활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석방논의를 해 5월에 풀려났다. 평양에 있는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했다. 관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다가 1593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강화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주 근처 관동(寬洞)에 산소와 사당이 있다.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임제 1549(명종 4)~1587(선조 20).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謙齋). 아버지는 오도절도사 훈련원 판관을 지낸 진(晉)이다. 큰아버지 풍암(楓岩)이 친아들처럼 사랑하며 돌보았다. 초년에는 늦도록 술과 창루(娼樓)를 탐하며 지내다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친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가고, 올 때는 배가 가벼우면 파선된다고 배 가운데에 돌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려한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젖고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삶의 보람을 삼았다.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남으로 탐라·광한루에서 북으로 의주 용만·부벽루에 이르렀다. 그의 방랑벽과 호방한 기질로 인해 당대인들은 모두 그를 법도(法度) 외의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문인인 이이·허균·양사언 등은 그의 기기(奇氣)와 문재(文才)를 알아주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로 임제는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럴 수 없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 하겠느냐"며 곡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전국을 누비다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一枝梅)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나온 부인들에게 육담(肉談)적인 시를 지어주어 음식을 제공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를 포함해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백호집 白湖集〉이 있다. 700여 수가 넘는 한시 중 전국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가 제일 많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 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 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 花史〉 등 한문소설도 남겼다.

권필 1569(선조 2)~1612(광해군 4)

본관은 안동.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술과 시를 즐기며 자유분방한 일생을 살았다.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추천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강화(江華)에 있을 때 명성을 듣고 몰려온 많은 유생들을 가르쳤으며, 명나라의 대문장가 고천준(顧天俊)이 사신으로 왔을 때 영접할 문사로 뽑혀 이름을 떨쳤다.

광해군의 비(妃) 류씨(柳氏)의 동생 등 외척들의 방종을 비난하는 〈궁류시 宮柳詩〉를 지었는데,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가 지었음이 발각되어 친국(親鞠)받은 뒤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다다랐을 때 행인들이 주는 동정술을 폭음하고 그 다음날 죽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 周生傳〉이 전한다.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이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1]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2] 서얼 출신으로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가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 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한다. 결혼하던 그해 정조가 승하하고(1800년), 그의 증대고모뻘인 김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그 연고로 친부인 김노경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모가 34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탄과 허무감에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불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스무살 되던 해(1805년) 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이 무렵 스승 박제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양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다. 양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한다. 이듬해인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한다.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때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로 여겨진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되었으며, 그 아버지 김노경은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는데, 이는 김정희가 너무 강직한 탓이었다.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 유배에서 풀려난다.

1835년(헌종 1년)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40년(헌종 6년) 무렵 안동 김씨기 집권하자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예순세 살인 1848년 음력 12월 6일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그 뒤로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 권돈인이 영의정으로 김정희를 돌봐 주었는데, 궁중의 제례와 관련하여 그가 실수를 하게 되었다(→헌종묘천 문제). 1850년(철종 1년) 또는 1851년에 실수한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김정희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다. 신위, 오경석, 민태호, 민규호, 강위 등 중인 계층과 양반 사대부 계층 등을 이끄는 거대한 학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며, 대원군의 정책도 북학에 기초한 실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문에서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서예·도서·시문·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묵화에서는 난초·대나무·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한편 그에게 금석학을 배운 유명한 인물로는 오경석이 있고, 난초를 배운 이는 이하응이 있다.

그리고 지인에게 난초를 그려 줄 때 별호를 다르게 할 때가 잦아 한국의 위인 가운데 가장 많은 별호를 가지고 있다. 추사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별호로서 서호(書號)이다.

백광훈1537(중종 32) 전남 장흥~1582(선조 15).

최경창·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린다.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원래 관향은 수원이지만 선조가 해미(海美)로 귀양와 대대로 머물러 살았으므로 해미가 본관이다.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세인(世仁)이며, 〈관서별곡 關西別曲〉으로 유명한 광홍(光弘)의 동생이다. 이후백·박순에게 수학했으며 22세에는 진도에 귀양와 있던 노수신에게 배웠다. 28세인 156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 정치에 참여할 뜻을 버리고 산수를 방랑하며 시와 서도(書道)를 즐겼다. 그가 과거를 포기하게 된 구체적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미한 가문과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36세인 1572년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의 천거로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이 되어 시와 글씨로 사신을 감탄하게 해 명성을 얻었다. 1577년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정릉(靖陵), 예빈시(禮賓寺),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내면서 서울에 머물렀다. 그에게 관직생활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토지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적 기반이 미약했기 때문에 유일한 호구책으로 계속 관직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삼당시인으로 불리는 만큼 당풍(唐風)의 시들을 남겼다. 그의 시는 대부분 순간적으로 포착된 삶의 한 국면을 관조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전원의 삶을 다룬 작품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안정과 평화로 가득 찬 밝은 분위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과 관직생활의 불만에 의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정구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시대와 맞지 않아 생기는 무료·불평을 시로써 표출했다"고 하면서 특히 절구(絶句)를 높이 평가했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1590년 강진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옥봉집〉이 전한다.

최경창(崔慶昌, 1539년 ~ 1583년)

조선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자는 가운, 호는 고죽, 본관은 해주이다.일찍이 학문에 뛰어나 이이·송익필 등과 함께 8대 문장가로 손꼽혔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종성 부사를 거쳐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오던 도중 죽었다.

시를 잘 지었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 어려서 영암 바닷가에 살 때 해적의 무리에게 포위되자 퉁소를 구슬프게 불었는데, 그 연주법이 너무 뛰어나 해적들은 신이 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흩어져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달(1539~1612)

조선(朝鮮) 시대(時代)의 시인(詩人). 자는 益之(익지). 號(호)는 蓀谷(손곡), 東里(동리). 서얼 출신(出身)이며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허균(許筠)과 허균(許筠)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에게 詩(시)를 가르치기도 했음. 허균(許筠)은 스승인 이달이 훌륭한 재능(才能)을 지녔으나 서얼이기 때문에 불우하게 사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었다는 설이 있음. 허균(許筠)의 스승. 문집(文集)에 『蓀谷集』(손곡집)이 있음

성혼 1535(중종 30)~1598(선조 31).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성리학).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

 

아버지는 조광조의 문인인 수침(守琛)이다. 10세 때, 기묘사화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를 따라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다. 1551년(명종 6)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梁)의 딸과 결혼했다. 같은 해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는 응하지 않았고,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 들어가 〈상서 尙書〉 등을 배웠다. 20세에 한 살 아래의 이이와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을 만났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내섬시첨정, 1583년 이조참판,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정철(鄭澈)에게 구원해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1591년 〈율곡집〉을 평정(評定)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어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유성룡·이정암(李廷?)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이에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듬해 파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김안국 1478(성종 9)~1543(중종 38).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도학정치의 실현에 힘썼다. 기묘사화로 파직된 뒤에는 후진양성에 힘써 제자들이 중종반정 이후 개혁정치를 이끌었다.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아버지는 참봉 연(連)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그의 아우이다.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으며, 조광조·기준(奇遵) 등과 사귀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150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한 뒤 홍문관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지냈다. 이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07년(중종 2)에는 다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 지평·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각 향교에 〈소학 小學〉을 나누어 가르치게 하고, 〈이륜행실도언해 二倫行實圖諺解〉·〈정속언해 正俗諺解〉 등의 교화서(敎化書)를 간행·보급했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해 주자학적 향촌질서의 수립에 힘썼다. 그밖에도 〈농서언해 農書諺解〉·〈잠서언해 蠶書諺解〉 등의 농서와 〈벽온방 ?瘟方〉·〈창진방 瘡疹方〉 등의 의서(醫書)도 간행했다. 1519년 참찬이 되었다.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김정(金淨)·김식(金湜)·김구(金絿) 등은 절도안치(絶島安置), 윤자임(尹自任)·기준·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 등은 극변안치(極邊安置)되었다. 이때 김안국도 아우 김정국 등 32명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뒤 고향인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폐천녕현(廢川寧縣) 별장에서 2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대개의 지배층 관료가 그러했듯이 김안국도 재지(在地)의 사회경제적 기반 위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시와 술을 즐기고, 학문을 강론했다.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 〈동유사우록 東儒師友錄〉에 실린 그의 문인 44인 중 상당수는 이 시기에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그뒤 정광필(鄭光弼) 등이 그를 다시 기용할 것을 거론했으나 기묘사화를 주도한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집권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고 있을 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안로가 사사된 뒤인 1538년 홍문관 등의 현직(顯職)은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벼슬길에 다시 올랐다. 이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지냈다.

김안로(金安老, 1481년 ~ 1537년)

자는 이숙, 호는 희락당(希樂堂), 용천(龍泉), 퇴재(退齋), 본관은 연안이다. 김전의 형 김흔의 셋째 아들이다. 김제남의 종조부이다. 중종과 계비 장경왕후의 사돈이며, 중종의 셋째 부인인 문정왕후 일가와도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그의 조카딸이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정실부인이었고, 손녀딸은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에게 출가하였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대사간을 지냈다. 기묘사화때 조광조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다시 채용되어.[1] 1522년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24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으나 아들이 효혜공주와 결혼한 후부터는 권력을 남용하였다가.[2] 영의정 남곤(南袞)·좌의정 심정, 대사헌 이항(李沆) 등의 탄핵을 받고 경기도 풍덕(豊德)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527년 남곤이 죽자 심정 일파의 축출에 성공하여 다시 예조판서로 등용되어 심정·이항 등을 죽이고 1529년에 풀려나와 정권을 장악하였다. 1531년에 다시 등용되었다. 이조판서를 거쳐, 34년에는 우의정이 되고, 1535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무자비하여 친족, 재상과 종친 등에 관계없이 이를 축출하여 사형시키는 등 무서운 공포정치를 하였으다. 경빈 박씨와 복성군 미를 죽이는 등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허항·채무택과 함께 '정유 3흉'이라 한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를 폐하려 하다가 문정왕후의 밀명을 받은 윤안임(尹安任)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3]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사당하였다. 중종의 딸 효혜공주의 남편인 연성위 김희가 아들이다. 윤원형은 그의 사촌형 김안수의 딸과 결혼, 조카사위뻘이 되나, 김희의 장녀이자 맏손녀는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에게 출가하여 윤원형일가와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한다. 저서로 《용천 담적기》가 있다.

이항 1499(연산군 5)~1576(선조 9).

기대승(奇大升)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5학(五學)의 한 사람으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했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 아버지는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자영(自英)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이다. 박영(朴英)의 문인이다. 일찍이 무과에 뜻을 두어 무예를 익혔으나, 30세부터 학문을 시작하여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서 수년 간 독학한 뒤 태인(泰仁)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봉양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1566년(명종 21)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의영고령(義盈庫令)·임천군수를 지냈으나 직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고 사퇴했다. 선조초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1574년 사헌부장령·장악원정을 지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기대승·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 등과 서한을 통하여 학문을 논하며, 이(理)와 기(氣),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을 일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기이원(理氣二元) 그대로가 곧 일물(一物)이라 하면서 이기(理氣)는 비록 이물(二物)이나 그 체(體)는 하나라고 했다. 즉 양의(兩儀)는 본래 태극 안에 있고 태극이 양의를 낳은 후에는 태극의 이가 역시 양의 안에 있다고 했다. 천인(天人)이 일리(一理)이니 사람의 지각운동(知覺運動)·강약청탁(强弱淸濁)의 기(氣)가 일신(一身)에 충만한 것은 음양의 기이고,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기 안에 갖추어진 것이 태극의 이(理)인 것과 같이 이와 기는 마땅히 일신 안에 있으므로 이물(二物)이 아니라고 했다. 이황(李滉)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와 기의 관계를 하나로 본다면 도(道)와 기(器)의 한계가 없어 결국 '도즉기'(道則器)·'기즉도'(器則道)라고 보는 편견에 빠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태인 남고서원(南皐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일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정지운 (조선 학자) 1509(중종 4)~1561(명종 1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 아버지는 인필(寅弼)이다. 김정국(金正國)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김안국(金安國)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했다. 동몽학(童蒙學)에 학행으로 천거받았으나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37년(중종 32) 주희(朱憙)의 〈성리대전 性理大全〉에 있는 인물지성(人物之性)을 논하는 설을 취하고 그밖에 여러 설을 참고하여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문답을 더하여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지었다. 두 스승에게 질정을 구했으나 인가를 받지 못하다가 1553년(명종 8) 이황(李滉)을 만나 그의 의견을 따라 수정했는데, 먼저 지었던 것을 〈천명구도 天命舊圖〉라 하고, 뒤에 수정한 것을 〈천명신도 天命新圖〉라 했다. 그는 이 도설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분속(理氣分屬)에 관한 문제를 제시했는데, 처음에는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라고 했다가 이황의 수정을 받아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뒤에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사칠논변(四七論辯)을 불러일으킨 발단이 되었다. 1561년 천마산(天磨山)에 유람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승천부(昇天府)에서 죽었다. 제자로는 정지림(鄭之霖)·정식(鄭軾)·김은휘(金殷輝) 등이 있다. 저서로는 1640년(인조 18) 간행된 〈천명도설〉 1권이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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