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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肉眼) 속에는 미지의 비밀스러운 것들이 존재하지 않네.
그러나 눈이 신의 빛으로 향할 때
무엇이 그 빛 아래 숨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빛들은 신성한 빛에서 흘러나오지만
모든 빛들을 "신의 빛"이라 부르지 말지니.
신의 빛은 영원한 빛이며,
덧없는 빛은 육의 속성일 뿐.
오, 영안(靈眼)의 은총을 주시는 신이시여
영안(靈眼)의 새는 욕망의 날개로 당신을 향하여 날고 있습니다"
- 수피즘 시인 루미 (1207~1273)의 시 <신비의 송가 mystic odes
> 중에서
빌 비올라 |
서울의 국제갤러리에서 3월 19일부터 4월 30일까지 열린 저명한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 개인전은 미술 관계자들도 놀랄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첨단 영상 매체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정서와 경험을 담아냈다고 평가받는 빌 비올라.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희노애락을 담아낸 그의 작품 세계가 우리에게도 공감과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일까.
여기서는 신비주의를 근간으로 한 영상 아티스트로 평가 받는 빌 비올라의 2003년 서울 국제 갤러리의 개인전을, 그의 작품 속에 담긴 신비주의와 종교적 요소들을 중심으로 짚어본다.
명상, 체험, 변화
빌 비올라의 작품은 "영화적 프레스코화(cinematic fresco painting)
라 불린다. 그만큼 그의 작업은 명상적이고 경건한 종교성을 지향한다.
그는 오랫동안 솔로몬 군도, 인도네시아, 일본 등을 여행했으며, 세계
신비주의 전통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한때는 일본에 체류하며 선수행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이슬람 수피즘, 기독교
신비주의, 선불교의 주제들이 녹아 있음은 물론, 신비주의 전통들의
공통적 주안점인 "체험"과 그러한 체험에서 나오는 "영적 변화"를 강조한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16세기): 비올라는 이 제단화가 "본래는 치유과정의 한 부분이었음을 인용하며 미술의 힘과 활용에 대해 언급했다"(빌 비올라전 도록) |
다수의 평론가들이 지적하듯, 그의 작품엔 이런 체험과 변화를 위한
"명상"의 제반 요소들, 즉 빛, 어둠, 소리와 행위의 반복, 고요, 느림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작품의 감상 자체가 명상과 동일한 효과를 도모한다.
"자기 인식의 수단으로서의 지각 작용"(빌 비올라 사이트)을 탐색하기
위해 비디오 아트를 활용한다는 평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그의 작품들은 지각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일어나는 영적이고 내면적인 변화에 관심을 보인다.
마지막 천사(The Last Angel)
The Last Angel |
이번 전시의 "마지막 천사 The Last Angel" 에서는 푸른 물결이 느린
속도로 일정한 소리와 함께 일렁이는 모습을 마주치게 된다. 움직임과 소리의 반복에 이어, 서서히 물결의 모양이 바뀌어가면서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을 이루고 더불어 소리도 커진다. 이윽고 소리의 증폭과
함께 거대한 물결이 솟구치고 물은 아래로 흡수되듯 떨어진다.
여기서 소리와 움직임의 반복과 급작스러운 상황의 전환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마지막 순간은 찰나의 깨달음을 연상시킨다.
휘장(The Veiling), 빛의 일원론
the veiling |
"휘장The Veling" 에서는 반투명의 천들이 어두운 방 중앙에 여러 겹으로 매달려 있고, 두 대의 프로젝터가 양 끝에서 영상을 투사하고 있다. 영상은 여자와 남자가 다양한 밤풍경들 속에서 각자 앞으로 나아갔다 물러서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 남녀는 천들을 거쳐 서로 교차하지만 이들은 서로 인식하지도 만나지도 않는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이슬람 수피즘의 "빛의 일원론"을 연상시킨다. 수피즘에서 신은 절대적 빛이며 무(無)는 암흑이라 생각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신과 무, 즉 빛과 암흑 사이에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
절대적인 빛은 그 사물들을 투과하며 조금씩 엷어지고 그림자가 침투해 들어온다.
알라는 하늘과 땅의 빛Allah is the Light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이라는 의미를 담은 Yusuf Ali의 칼리그래피 |
유대교의 카발라 신비주의에서도 신은 일차적이고 절대적인 빛이다.
사물들은 "아인소프"라 불리는 신의 속성, 즉 절대적 빛이 방사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사물들은 신의 속성이 순차적으로 방출된 것이다. 이렇게 방출된 것이 "세피로트"이며, 이 세피로트에 의해 이루어진 복합적 작용의 결과로 우주 만물이 창조된다.
세피로트 트리 |
수피즘: 빛의 일원론 |
수피즘에서는 이러한 일차적인 "천지창조의 방사(放射)" 외에도 "조명(照明)"이라고 하는 2차적 방사를 상정한다. 이것은 이미 존재하는 빛들이 영적으로 서로를 비추어주는 단계다. 수평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방사로 인해 인간에 내재하는 빛은 물질 세계에 대한 저항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슬람 1400년>, 버나드 루이스, 까치)
이러한 수피즘과 카발라 신비주의 이론을 배경으로 볼 때,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창조의 행위와 피조물들간의 관계를 전달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작품에는 서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를 인식하거나 만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피조물들의 실존적 조건, 그 근원적 슬픔이 스며있다.
길의 연구(Study for The Path), 일상의 신비
Study for The Path |
다음 작품인 "길의 연구 Study for The Path"에서는 햇살이 비추는 숲
속 길을 사람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다. 이 작품은 세 패널이 이어져
있으며, 행렬은 한 패널을 통과하여 다음 패널로 끝없이 이어진다. 시작과 끝이 따로 없으며 앞서 간 사람들의 여정을 마찬가지로 밟아가지만 각각 다른 모습과 스타일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개인의
인생 여정은 물론,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표현해보인다.
빌 비올라는 <플래쉬아트 (Flash Art)>잡지를 위한 클래이튼 캠벨(Clayton Campbell)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언급하며, "우리도 미래의 언젠가 겪을 일"이며, "우리가 지금 점유하고 있던
공간을 미래의 어떤 시점에는 우리는 옆으로 물러나고 다른 이들이
점유할 차례가 온다."고 표현한 바 있다. 이러한 깨달음을 길의 연구는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성찰하고 그로부터 정서적 울림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계속된다.
회상(Remembrance), 경건한 주시
Remembrance |
전시된 세 번째 작품인 "회상 Remembrance"는 화면 속에서 한 여자가 다양한 감정의 추이를 표정과 몸짓으로 보여준다.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움직임은 극도로 느리게 진행되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감정의 표현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경건하게 바라보게 한다.
이 작품은 제목부터 수피즘을 연상시킨다. 수도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그들의 사랑은 흔들리는, 즉 주저하는 불꽃일 뿐이며, 그 불꽃은 쉽게 사그라들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랑을 다시 지펴올릴 방법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회상"이다. "회상(remembrance)"은
신의 실체와 아름다움을 떠올리고 신에 대한 사랑을 다시 불타오르게
하는 행위가 된다. 수피즘에서 영혼을 단련하는 방법이 바로 이 "회상"이다. 수피즘에서는 이를 "dhikr"라 부른다.
(http://www.arches.uga.edu/~godlas/sufismdhikrlove.html 참조)
항해(Study for The Voyage), 죽음과 재생
The Voyage |
일상의 경험 속에 존재하는 신비는 죽음과 재생의 문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빌 비올라 개인의 사적 체험이 반영된 "항해 연구 Study for The
Voyage"는 두 패널이 붙어 있는데, 왼편 패널에서는 언덕 위의 한 집에서 침대에 누워 수명을 다해 가고 있는 노인과 그를 위문하러 온 젊은 커플, 그리고 현관 문 밖의 문지기를 보여준다. 오른편 패널에서는
물가에 배가 한 척 있고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으며 장정들이 물가에 놓인 짐들을 배로 옮겨 싣고 있다.
젊은 커플이 돌아가고 이윽고 문가의 문지기가 일어나 문을 잠근다.
오른편에서는 노인이 물가에 나타나 할머니와 포옹하고 배에 올라탄다. 젊은 커플은 돌아와 문을 열려고 하나 문은 잠겨 있고, 오른편 패널에서는 배가 출발하여 미지의 다른 세계를 향해 항해해 나간다.
빌 비올라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임종시 그들의 손을 잡고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순간을 함께 한 체험을 <플래쉬아트>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말그대로 인간의 마지막 호흡을 경험하는 것, 그것도 아무나가
아닌, 바로 나의 어머니가 그렇게 된 것을 보는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경험이었다. 한때 살아 있었던 존재가, 나의 어머니였던 존재가, 삼개월 동안 코마 상태에 빠졌다가 일순간 의복들이나 낡은 의자처럼, 비활성의 차가운 무언가로, 어떤 물체가 되어버리는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이 작품에는 이런 그의 개인적 경험이 충실히 반영되어 죽은 자와의
"단절"의 경험을 문지기가 문을 잠그고 가서 더 이상 젊은 커플이 문
안의 사랑하던 이와 접촉할 수 없음으로 표현한다.
또한, 이 작품에는 삶과 죽음을 이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전이하는 하나의 "여정"으로 파악하는 종교적 관점을 읽을 수 있다. 한편, 노인이
임종하던 집이 있는 한 언덕에서, 다른 언덕 방향으로 방향을 잡는 배를 보고 있으면,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불교의
흔적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서구와 동양의 다양한 문화전통에서 나타나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물"의 이미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빌 비올라 자신은 이 항해를 밀리미터닷컴의 엘렌 울프에게 두 노인이 "머나 먼 극락도 the distant isles of the blessed" 로 떠나는 것이라
설명한 바 있다.
고요한 바다(The Silent Sea), 관찰(Observance)
the silent sea |
이어지는 작품들인, "고요한 바다 The Silent Sea"와 "관찰
Observance"는 어떤 것을 응시하며 비탄과 당혹감, 두려움 등에 젖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고해상도 화면으로 느리게 잡아 보여준다. 극단적인 슬로우 모션은 사람들의 표정과 제스처에 담긴 정서, 특히 비애와 엄숙함을 오랜 시간 자세히 주시하게 만든다.
사람들을 주시하게 만드는 빌 비올라의 이러한 작업은 "인간은 선천적으로 다른 인간들에 매료되게 되어 있다"라는 믿음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Observance |
"시대가 변해도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데 사람들이 절대로 지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끝이 없는, 인간과의
아름다운 조우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건 모르지요, 저 사람이
왜 울고 있는지 혹은 왜 화가 났는지. 대부분의 영화들에서는 인물들이 가진 동기의 원인을 다룹니다. 전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저는 외부적 관점에서 사람들을 지각하는 것에 흥미를 느낍니다. 플롯에 구애 받지 않고, 그들과 자기만의 개인적인 관계를
허락 받게 되는 거죠. 그들이 겪는 감정들은 당신의 것도 되는 것입니다."
("디지털 사원(digital cathedral)", millimeter, ellen wolff)
물 속으로 뛰어들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 나의 것이 된다". 이 말에서 보듯 빌 비올라의
작품들에선 직접적 체험이 끊임없이 강조된다. 빌 비올라는 그저 주입되는 이미지를 눈으로 보기를 원치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중세의 종교화인 "프레스코화" 처럼, 경건한 주시의
행위가 일종의 명상이 되고 기도가 되며 내면적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워크인 무비(walk-in movie)라고 생각한다. 이는 프레스코 사이클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원하는 곳에 멈춰 설 수 있다. 고정된 자리와 무대 칸막이에서 이미지를 해방시킬 때, 당신은 관람자의 신체와 교류하게 되며, 이미지와의
관계는 훨씬 더 개인적인 것이 된다."(millimeter)
그만큼 그의 작품은 "영화를 보기보다는 물 속을 헤엄치는 듯한 몰입적인 경험을 주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그는 앞서 클래이튼 캠벨과의 대담에서 또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관람자가 지성을 이용해 그것을 연구하기보다는, 그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신체와 함께 하기를 바랬습니다.어떤 틀로부터 그것을 연구하고 바라보며 거리를 두고 관찰하기보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런 체험을 풀장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뒤에서 밀어 물
안에 빠지게 되고 자신이 "물이며 물이 되는 것"에 비유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고는 경험할 수 없는 지식"을 추구한다.
체험되는 지식, 이것이야말로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익숙한 개념이다.
특히 이 두 작품과 <회상 remembrance>,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무언의 Unspoken>은 타인들의 감정과 조우하고 거기에 동참할 기회를
부여한다.
무언의(Unspoken)…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리
Unspoken |
<무언의 unspoken> 은 은박과 금박의 패널에 비탄과 고뇌를 표출하고 있는 남녀의 얼굴 영상이 투사된다. 프레스코화를 보는 듯한 어두운 조명 속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남녀 얼굴의 움직임은 제목 그대로 말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의 빛과 색깔, 밝기는 관람자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더욱 어둡게 보이거나 더욱 밝게 보인다.
그는 논리적인 말의 세계보다는 사람들이 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란다. 몸은 정신과 단절된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표현이고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표현이다. 그는 서구문명에서는 이런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몸을 통제함으로써 정신과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그의 관점을 유념해본다면, 그의 작품들에서 신체 언어가
강조되는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unspoken"이란 단어에 "말로 전해지지 않은" "입 밖에 내지 않은", "이심전심"의 의미도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한가지 흥미로운 단서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리, 그래서 때로 상징으로 표현되거나 비유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 신비주의적 배경은 여기서도
찾아진다.
도가에서나 선불교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리"라는 개념은 낯익은 것이다. 선불교의 표현을 빌자면, 진리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이심전심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 혹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인
것이다.
비디오, 21세기적 성화(聖畵)의 창조
이상에서 보듯 빌 비올라는 비디오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인간의 일상이 만들어가는 여정과 그 정서적 영역을 탐색하고 체험해 볼 기회를
부여한다. 그의 바램은 이런 기회를 통해 진리의 세계와 인간의 감정이 맞닿을 수 있도록 말 그대로 "매개체"(미디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테크놀로지가 영적 구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지각과 인식의 영역을 눈에 보이지 않았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키는 기회로 쓰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1500년경 현미경이 말 그대로 우리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지구상의 생물들을 처음 보게 했고, 그것들을 실제 있는 것으로 입증했듯이, 일단의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지각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테크놀로지를 표현한다.
"이런 도구들은 인간의 감각들을 확장시킴으로써, 정신과 영혼 또한 진정으로 확장시켰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
않는 이상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광대하고 보이지 않는 전체 세계를 다른 모든 이들도 보게 한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비디오라는 매체 자체가 매우 인간적이면서 영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디오는 그의 말대로 "시간에 기반한 매체(temporal based media)"로서, 비디오가 만들어낸 영상이라는 것은
삶이 또한 그러하듯, "문자 그대로 태어나고 창조되며 기계를 끄면 죽어버릴 이미지"인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Luca d'Egidio di Ventura de' Signorelli (1455 - 1523) 의 Orvieto Cathedral 프레스코화 일부 |
결국 그에게 있어 예술이란 것은 우리를 "매우 추상적인 영역으로 데려"가는 매개체다.
"예술가는 사람들이 울거나 부끄러움 없이 무언가를 느껴볼 수 있는
장소, 이런 행동이 허용될 뿐 아니라 그런 행동이 완전히 정상적인 장소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클래이튼의 말에, 빌 비올라는 스스로의 작업의 지향점을 "르네상스의 이상, 즉 진리와 아름다움(truth and
beauty)"라 답한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미지들은 때로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그것들은 그저 지나가버리는 환상이나 찰나적 오락거리, 혹은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느낌만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며 인간이 이 행성에서 진화 시켜 온 가장 심오한 지식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패널 속에 느리게 진행되는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정서적 반응들을 장시간 주시하게 만듦으로써, 그 감정을 통해 그 심오한 지식을 경험하고 숙고할 기회를 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비주의의 지향이 신과 인간의 합일, 신성과 자아의 일체화에 있고, 그를 위해 "내적 체험"이 중시되며, 그 체험이라는 것이 자아 혹은 영혼의 순화의 여정이라고 볼 때 , 빌 비올라 예술
세계가 추구하는 것도 결국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목표를 위해 그의 작품들에 명상적 요소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빌 비올라 자신이 <플래쉬 아트>와의 인터뷰에서 300년 전 성화의 관람자들이 그랬다고 표현한 것처럼, "단순히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환기(evocation)시키는 작품에는 명상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과거 영적인 구도자들과 종교 예술가들의 노력과 같은 차원으로
21세기적 성화를 창조해가고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빌 비올라 공식 사이트 (http://www.billviola.com)
빌 비올라 서울전 국제 갤러리 제공 인쇄물
빌 비올라 서울전 도록 Bill Viola
"Timeless Themes, Suddenly Timely" (Grace Glueck, the New York
Times)
"Bill Viola, The Domain of The Human Condition"(interviewed by
Clayton Campbell, www. flashartonline.com)
"Digital cathedral"(Ellen Wolff, millmet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