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초등학교 시절의 박주선 형제>
1974년 3월 19일. 제16회 사법시험 발표가 있던 날 박주선(朴柱宣)은 남루한 행상 차림을 한 어머니의 옷깃 속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했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린 그는 “오늘의 영광은 어머니의 피눈물나는 뒷바라지 덕분입니다.”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법시험 합격, 그것도 수석합격이라는 박주선의 영광은 말 그대로 어머니와 가족의 눈물과 땀방울의 결정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박주선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주선은 1949년 음력(윤달) 7월23일 전남 보성군 보성읍 옥평리 156번지에서 태어났다. 보성읍에서 4km 떨어진 봉화산 정기를 받은 가는골(細洞)마을 토담집이었다. 박주선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장사를 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 집에 돌아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자연히 집안 살림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줄곧 어머니가 사실상의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면서 계란과 쌀을 사서 광주의 대인시장과 남광주 시장에 내다 파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렸고, 박주선과 그의 동생 주현 두 아들의 학비도 댔다.
어머니와 박주선은 꼬박 밤을 새워 짐을 꾸린 후 보성읍에서 6km 떨어진 봉산리에서 새벽 2시에 일어나 무거운 쌀자루와 채소, 달걀 등을 짐수레에 싣고 십오리 길을 뛰다시피 짐수레를 끌고 보성역에 도착하여 어머니는 새벽4시 기차를 타고 광주로 장사를 나갔다. 그 때문에 박주선의 어머니는 지금도 양 무릎에 심한 퇴행성 관절염과 어깨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박주선이 보성 남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해 도지사상을 받고 보성중학교에 합격했으나 당시 입학금 1,100원을 마련할 길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그만둘 처지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박주선을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자신의 피’를 뽑아 팔아서 입학금을 내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의 사법시험 수석합격의 영광은 바로 “어머니의 땀과 피와 눈물의 결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