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 갑옷 - 코트 오브 플레이트(Coat of plate)
저도 디펜스 코리아에서 자료좀 퍼왔습니다. (http://www.defence.co.kr/)
즐감하세요.
13세기에서 14세기에 접어들 무렵까지 유럽의 군사력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던 기사(knight)계급의 주된 방어구는 온몸을 완전히 감싸는 체인 메일 호버크(Chain mail hauberk)에 헬름(Helm)같은 양동이 투구가 주력이었소. 이 체인 메일들은 온몸에 빈틈이 없이 방어하여 도검에 대해서만큼은 절대적인 방어력을 보유했고, 또 움직이기가 매우 편해 노르만 기사들에 의해 널리 퍼진 이후로 당시 유럽의 갑옷의 주력을 차지하고 있었소.

그러나 이 체인 메일의 한계는 금방 들이닥치고 말았소. 우선 전투에서 도검의 날은 무력화시킬수 있었지만 체인 메일의 장점인 유연성이 도리어 단점이 되어 적에게 검이나 철퇴를 맞으면 체인 메일이 옷처럼 파고들어, 충격 흡수를 전혀 못하고 때때로 체인 메일의 고리가 살에 파고들어 파상풍을 일으키는 현상이 있었던 것이오. 고리가 파고드는 현상은 두꺼운 솜옷인 갬비슨(Gambison)을 받쳐입음으로써 어느정도 해결되었지만 아직 파상풍의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소.

또한 유명한 단점으로, 끝을 뾰족하게 한 검이나 창, 화살등에 찌르기를 맞으면 체인의 고리가 풀려버리면서 날에 관통당한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소.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가슴같은 중요부위에 몇겹을 더 댄다거나 반소매 셔츠 메일을 덧입는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끝끝내 완벽한 방호는 불가능하였소. 바로 윗짤방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오. 노르만 기사인데, 가슴부분에 특별히 몇겹을 덧대고 있소.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사들이 선택한 것은 일단 스케일 메일을 덧입는 것. 스케일 메일은 찰갑이라고도 불리는 존재로, 물고기 비늘 모양의 철조각을 가죽끈이나 철사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이오. 이것은 움직임이 불편하고 무게도 무거웠지만 충격에 대한 방어라는 면이나, 고리가 살로 파고들어 파상풍을 유발한다던가 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매우 좋은 방어책이 되었소. 그러나 몇몇 고문헌에서 스케일 메일을 입고 연습하는 기사의 그림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다지 많이 쓰이지는 않은 것 같소. 몽고와 전쟁하던 12세기 기사들의 복장은 대부분 여전히 문장이 그려진 코트인 서코트(Surcoat) 뿐이었으니 말이오. 아마 불편한 움직임을 싫어하던 기사들의 불만이 있었을 수도 있고, 또 스케일 메일이라 하더라도 철퇴나 도끼와 같은 무기에서 완전한 충격 흡수는 불가능했을 뿐더러, 연결부의 가죽끈이나 철사가 끟어지면 나머지 철조각들이 풀어지며 분해되는 사태가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고 보이오.


(스케일 메일 (Scale mail). 짤방의 것 무려 30kg!)
이처럼 체인메일의 단점은 여러 곳에서 지적되고 있었지만, 십자군전쟁때도 나름대로 위력을 발휘했고 만명동원도 어려운 유럽내 동네싸움에서 체인메일은 그럭저럭 쓸만했던 모양이오. 그러나 체인 메일의 단점을 치명적으로 드러내는 시기가 그들에게 도래하오. 바로 몽고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었소.
몽고군에 맞선 독일-폴란드 연합 기사단은 무참하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철저하게 박살이 나오. 병력수 부족, 고리타분한 전술, 개인플레이 위주의 전투방법등 여러가지 단점이 지적되지만 무엇보다도 뼈저린 패인은 그동안 입던 체인 메일이 처절하도록 몽고군에 화살에 무력했다는 점이었소. 또한 강력한 석궁이 전장에서 위치를 차지해가고 있었으므로, 기사들은 기존의 갑옷의 방어력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느끼고, 스케일 메일 이상으로 튼튼한 방어력을 보장해줄 새로운 갑옷의 출현을 원하게 되오.
그리고 14세기 초반, 아직 체인메일이 그래도 잘 나가던 시절에, 마침내 "코트 오브 플레이트"(coat of plate)가 등장하게 되오.


(코트 오브 플레이트)
이 갑옷의 기본 개념은 가죽이나 천 안에 두꺼운 철판을 부착하여 화살같은 무기로부터 착용자의 신체를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개념이었소. 특히 이러한 갑옷은 바깥의 가죽에서 화살의 속도를 우선 저지하고 내부의 철판으로 완전 저지함으로써 투사무기에 대한 방어력이 매우 높았다고 하며, 나중에 화기가 증가하던 시절의 조선과 청나라도 "두정갑"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채용하였다고 하니 투사무기에 대한 방어력이 높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수 있소.


또한 투사무기에 대한 철저 방어를 위해 내부에 부착된 철판은 매우 두꺼운 것이 사용되어, 주로 동체부분만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게는 8~10kg라는 매우 무거운 수준이었다고 하오. 이렇게 훌륭한 방어능력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 사용 기간은 플레이트 동체갑옷이 주력화될 때까지로, 그다지 길지는 않았소. 그것은 이 갑옷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소.
우선 이 갑옷은 사진과 같이 철판이 안이고 가죽이나 천같은 연질의 물체가 밖으로 나와 있소. 그래서 백병전시 검이나 창을 맞으면 일단 방어는 되더라도 전투가 한번 끝나면 겉의 가죽이나 천이 걸레가 되는 사태가 비일비재했소. 이런 상태로 계속 낡았다가는 철판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내구성이 급격히 떨어지므로 아무리 농민을 착취해 살았다고는 하지만 제코가 석자였던 기사들에게 있어서는 이 점은 결코 환영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소. 무엇보다 당시의 갑옷 가격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비쌌다고 하니...(플레이트 아머+마갑 세트 가격이 지금 세금포함 포르쉐 스포츠카 가격보다 비싸다 하오)
또한 갑옷류에 강철이 사용되어 3킬로 정도의 플레이트 가슴받이가 등장하자 더이상 8~10킬로에 달하는 엄청난 무게를 가진 코트 오브 플레이트는 기사들에게 더이상 환영받을 이유를 상실하고 말게 된 것이었소. 플레이트 동체갑옷은 코트오브 플레이트와는 달리 여러번 베인다해도 크게 내구성이 떨어진다거나 할 이유가 없었고, 또 강철을 사용하여 가벼운 무게로도 기존의 코트오브 플레이트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방어력을 발휘할수 있었으며(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갑옷은 영국 장궁병들의 화살에는 뚫리지 않았다는 것이 다큐로 입증되고 말았소. 이유는 전투 당시 장궁병 화살촉이 연철이라서라...)투사무기에도 높은 방어력을 발휘하여 더이상 무겁고 내구성 낮은 코트 오브 플레이트는 전장에서 있을 이유가 없어지게 된 것이었소.

(플레이트 가슴받이)
그러나 작은 철조각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겉모습이 화려했던 "브리건딘"(Brigandine)17세기까지 살아남아 의식용 장비로써의 역할을 다했으니,
갑옷치고는 오래 살았다고 보이오.


(브리건딘 "Brigandine")
첫댓글 조아요... 요즘가트면 일글거리 만아 살거가태...
데스라 총통님의 글이군요~ 언제나 좋은 지식을 주시는 고마운분~